▲ 곽정수 엮음(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좌담),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 373쪽 ⓒ 인터넷서점
'경제' 화두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명박 당선자는 '경제'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최소한 2가지 이상 빠뜨렸다. 그는 오로지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는 정체 모를 수사만 반복하였다. 경제를 살린다면 반드시 경제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며 역시 '경제'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저마다 이전 정권의 실책을 극복한다고 선언했지만 실패에 대한 백서도 없고 실패의 원인도 모른다.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다르다면 반드시 '경제정책 실패'를 기록하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때를 넘긴 '경제 화두'가 최근 몇몇 소장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시장만능주의와 경제주체의 무한대립을 합리적인 정부의 법 집행과 상생의 경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요지의 책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와 함께, 글로벌 선진국의 자기 모순적인 행태를 고발한 <나쁜 사마리아인>을 들고 나타났다.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곽정수는 아래로부터의 경제민주주의를 일으킴으로써 재벌 위주의 왜곡된 경제 시스템을 선순환 시킬 수 있다는 해법을 내놓은 <한국경제 새판짜기>라는 책을 내놓았다. 저마다 한국경제의 문제에 대해서 대안을 내놓고 있으면서 서로 논쟁적인 경제사회서를 하나씩 훑어보며 '경제 민주주의'를 위한 방향을 잡아보고자 한다.
경제민주주의의 조건과 이를 가로막는 한계상황
<한국경제 새판짜기>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서 주요 경제정책을 입안한 경제학자와 경제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경제학자, 대기업 전문기사들이 좌담의 형식을 통해 한국경제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점을 구체적인 실증 사례를 버무렸다. 책의 내용이 좌담의 정리인지라 논의가 중구난방이 되기도 하고 이전의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비교적 현장성을 갖추고 문제의 구조를 정조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논의가 복잡하고 반복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한국의 경제정책이 그만큼 즉흥적이고 일관되지 못하며 환부가 깊고 광범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들이 '경제민주주의'를 위해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1. 공정하고 합리적 규칙을 제정하고 집행함으로써 경제시스템을 수행하는 경제주체들이 공평한 경쟁과 협력이라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간단히 말해 '남의 권리를 침해하면 부당 이득 이상의 제재를 받는다'는 관례가 일상화되어야 한다. (43쪽)
2. 경쟁 낙오자에 대한 보호와 재교육을 통해 사회적 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이직, 전업의 환경을 만들고 지속적인 교육과 복지를 통해 노동효율성과 기업역량,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180쪽)
3. 국가의 공공성을 높이고 동시에 정책의 자의성을 통제하고 기업의 시장 횡포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침묵했던 수동적 대중들과 소비자, 시민들이 주축이 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 (340~343쪽)
4. 개방의 압력이 날로 높아지는 현재의 상황일수록 개혁과 개방을 혼동하지 않고 개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부역량을 키우는 개혁정책을 일관되고 끈기 있게 추진해나가야 하며, 몇몇 이익집단이나 기득권의 이익을 변호하는 개방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개방을 이뤄내야 한다. (252쪽)
5. 경제가 잘된다는 것은 경제지표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인 만큼 모든 경제주체들이 경제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때 정책당국과 기업은 물론 언론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347쪽)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제민주화를 위한 위의 조건의 실현 가능성은 한마디로 '요원하다'. 실제로 <한국경제 새판짜기>의 분량 대부분은 '경제민주화를 위한 조건'보다는 '경제민주화를 방해하는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경제문제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낙관론이 판을 치는 현 상황에서 이들의 문제의식은 소중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실패의 백서'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해법에 실패했듯, 경제민주화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는 과정을 게을리 한다면 백약이 무효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현상황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 한계상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대한민국의 현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 조건을 앞서 제시했던 '경제민주화를 위한 조건'과 대비되도록 재구성해 보았다.
#1. 재벌과 기득권, 이익집단의 시장 장악과 법제도 농락이 극에 달했으며, 국가는 현 상황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거나 오히려 현 상황을 부추기고 있다. (74~87쪽) 단기성과를 위해 개혁과제를 팽개치는 직무유기의 대물림도 심각한 실정이다.(337~339쪽)
#2. 대한민국이 극도로 저조한 노조가입률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은 노동조합에 '전투적'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덧붙여 노동조합행위 자체를 범죄시하는 풍토를 만들었으며 직원을 해고시켜 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것을 경쟁력으로 알고 있으며 복지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면서 기득권을 위한 '감세'를 만병통치약처럼 여기고 있다. (124쪽)
#3. '공공성'을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며, 대기업/기득권과 함께 짬짜미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바로 '국가 정책을 수행하는 관료'이다. (269~270쪽)
#4. 현재 당국은 '개방'과 '개혁'을 구분할 줄 모른다. 때문에 외부의 메가톤급 '개방'을 통해서 '개혁'을 이루려는 허무맹랑한 착상을 매우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다. 개방은 양극화나 경제 위축 등 국가의 고질병을 모두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이자 구원의 신으로 여겨진다. (249~260쪽)
#5. 관료와 대기업과 언론은 삼위일체가 되었다. 당국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불합리한 기업 구조를 관용하였고 언론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언론의 못된 점은 대기업의 나팔수가 되어 일신을 영위하는 천민자본의 대변인이 되었거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천박함으로 당국이나 기업이 불러주는 대로 읊을 뿐, 문제제기나 비판기능이 상당 부분 퇴화해버렸다는 데 있다. (312~314쪽)
국민들은 국가기관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보다 신뢰하지 않는다.
위에서 거론한 문제점은 논조나 지면 비중의 차이가 다소 있지만 책에서 언급된 내용을 토대로 필자가 윤색(潤色)한 것임을 밝힌다. 특히 책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재벌구조의 문제점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즉 소수 대기업 시장장악이 심각하다는 점(74쪽) 재벌기업의 성장이 내수로 연결되지 않은 점(76쪽), 재벌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령탑인 구조조정본부가 법적 실체와 책임 없이 운용되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81쪽), 하도급 횡포와 자사 계열사를 통한 회사기회 편취(계열사 몰아주기)로 건강한 시장경쟁구조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82쪽), 중소기업의 90% 정도가 외부 경영자문, 법률자문 등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업 활동에 대한 서비스가 대기업 위주로 치우친 점(87쪽)을 주요 문제로 거론했다.
특히 2200만~2300만개의 국내 일자리 중에서 500인 이상 대기업, 금융, 공공기관의 일자리는 130만~140만 정도로 재벌이 우리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음이 명백한 데도 역할에 비해서 엄청난 혜택을 보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125쪽)
고정관념, 편견을 버리고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경제관
기득권은 시민, 소비자에게 '무지'를 강요한다. 시민이 똑똑하면 돈을 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돈을 번다'는 것은 건강한 기업 활동과 경쟁을 통해서 얻어낸 정당한 이익과 상관없이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말한다. 이는 가까이는 우민화정책을 떠올리게 만들고, 멀리는 옛날 백성을 보자기에 싼 아이처럼 부드럽게 다스려야 한다는 양반들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조상들이야 국가의 옳은 방향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기득권이 만들어내는 무지의 카르텔에는 '사익(私益)'이라는 지상 과제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경제문제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은 대부분 거기서 비롯된다.
이 책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한 여러 가지 지적을 해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반드시 환기해야만 하는 편견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소개했듯 재벌이 우리 경제에 기여하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도 이상으로 고평가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중론이다. 특히 일자리 창출에 있어서 대기업은 미미한 기능밖에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기업집단에 대한 양면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제활동의 중심주체는 개별기업에서 기업집단으로 이동하고 있는 추세이다. 기업집단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너지 효과와 위험 공유 효과이다. 10개의 기업 중 1~2개의 기업에서 선전을 해주면 기업 전체가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 공유는 위험전가의 역기능을 피할 수 없다. IMF라는 국가 위기 상황은 한보그룹이나 대우그룹 등 기업집단의 연쇄부도를 계기로 폭발되었다는 점은 이를 설명해 준다.
먹튀자본에 대한 민족적 반감도 환기할 필요가 있는 편견으로 꼽혔다. 책에는 두 가지 사례, 즉 SK-소비린과 KT&G-칼 아이칸이 소개되었는데, SK는 불법적인 분식회계로 적정가치 이하로 폭락했으며 이를 소버린이라는 자본이 인수한 것이다. 당시 SK의 분식회계 수준은 해당 기업회장도 모를 만큼 SK는 불안정성이 극도의 상황이었다.
소버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결정한 만큼 그들이 가져간 과실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반감을 가지는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자본이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생리가 있기 때문이다.
KT&G는 잠재적 가치도 평가받지 못하는 우량 기업이었는데 이 가치를 칼 아이칸이 확인하고 투자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소버린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주식 시장에서 외국인의 투자지수는 800~900포인트인 것으로 추산되는데 오히려 국내 기관투자가들보다 외국인 자본이 오래 머무른다는 점에서 '단기 자본/핫머니'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에 저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국내기업들의 지배구조 문제와 금융구조의 문제점이 외국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의 본질적인 내용"(280쪽)인 셈이다.
외국자본의 선진금융기법에 대한 환상 역시 환기해야 할 편견이다. 론스타 같은 사모 펀드는 은행의 경영경험도 없고 경영할 의지도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선진금융기법을 기대할 수 있느냐고 저자들은 반문했다.
금산분리에 대한 편견 역시 중대한 문제다. 저자들은 칠레의 예를 들었는데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를 없애 버렸는데, 그 결과 은행은 기업들의 사금고로 전락하였고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금융시스템 전체가 무너져 내려 결국 가장 극단적으로 자유 시장경제를 했던 나라에서 결과적으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살릴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일어났다.
은행은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서 사전심사를 하고 빌려준 후에도 경영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데, 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면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면서 자기관리의 기회를 잃게 된다. 산업이 금융을 지배하는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저자들은 경고했다.
<한국경제 새판짜기>는 읽기도 쉽지 않고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복잡한 경제 문제를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문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동안 정치와 이념에 과잉돼 있어서 '경제동물'의 특징을 잊어버린 데 있다고 본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경제주체가 되는 것이다. 결혼, 가족계획, 보율, 교육 등 인생의 마디마디마다 비용과 경제활동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경제주체들을 길게 늘어뜨리면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된다. 그 중에서도 대기업이나 국가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기업과 국가가 주요한 경제주체임에는 틀림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민'이라는 경제주체를 이들과 동등하게 평가해야만 경제시스템이 안착될 수 있다.
김상조 교수의 말에 따라 "경제시스템이란 기업지배구조, 금융제도, 하도급제도, 시장 경쟁구조, 조세시스템, 노사관계, 사회복지제도 등이 합쳐져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여기서 시민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있는가. 소비자로서 노동자로서 과세국민으로서 사업파트너로서 사회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왜곡된 경제구도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도 시민은 마땅히 경제주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아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기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이 주제는 이명박 당선자의 '경제살리기'와 뜨거운 논쟁을 벌여야 했으나 그런 상황을 기대할 수 없었다. 늦었지만 이 논쟁이 한국경제가 발전방향을 잡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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