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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조선문제를 외무부에 안 맡긴 이유

청, 1881년에 조선 관할 부서 바꿔...국외 문제 아닌 국내 문제로 간주

등록|2008.01.18 11:11 수정|2008.01.18 16:56

▲ 청나라의 궁궐이었던 베이징 자금성. ⓒ 김종성


1881년(고종 집권기)에 청나라 정부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조치를 내놓았다. 조선문제 관할권을 종래의 예부(예조)에서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으로 이관한 것이다. 이로써 일종의 지방장관인 북양대신이 조선문제에 관한 한 사실상의 자유재량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예부는 일종의 외교를 담당한 기구이고, 북양대신은 지금의 허난·산둥·랴오닝 등 연해 3성의 양무개혁·국영산업·통상·대외관계를 담당한 기구였다.

여기서 북양대신은 국내업무와 국제업무를 함께 관장했지만, 원칙적으로는 국내사무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 특히 바닷가를 끼고 있는 지방도시가 원칙적으로는 국내사무를 담당하면서도 필요할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대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에서 ‘이례적인 조치’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북양대신이 원칙상으로는 외교기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구에 조선문제 관할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 속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19세기 당시 청나라의 외교기구 편제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 패배 후 외교부서 재편

청나라의 외교는 본래 예부와 이번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예부는 예법질서의 원칙에 입각하여 종주국과 번속국(속국)의 관계를 담당하는 일반 외교기구였고, 이번원은 원칙상 몽골족·회족 등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특수 외교기구였다. 이 두 기구는 외교 상대방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다루는 곳이었다.

그런데 제2차 아편전쟁 패배(1860년) 이후 청나라는 더 이상 예법 질서만으로는 외교관계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서양열강과의 전쟁에 패배한 ‘주제’에 더 이상 서양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수행하기 위해 1860년 12월에 신설한 기구가 바로 총리각국사무아문(‘총서’)이었다. 총서는 상하관계가 아닌 대등관계에 입각해서 서양 각국과의 사무를 처리하는 현대적 외교부서였다. 이 기구는 1901년 6월에 외무부로 개칭된다.

“19세기의 청나라는 서양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대등한 관계를 체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등이란 개념과 평등이란 개념이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등은 두 주체의 형식적·법적 관계를, 평등은 두 주체의 실질적·사실적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중국과 서양이 형식상으로는 상호 대등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상호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법적으로 대등한 인격의 소유자 간에 사실상의 불평등 계약이 체결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튼 외무부의 전신인 총서의 등장으로 인해 1860년대 이후 청나라에는 세 개의 외교부서가 병렬하는 특이한 구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예부는 종래의 일반 번속국을 담당하고 이번원은 몽골족·회족을 담당하고 총서는 서양열강을 담당하는 3원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3원 체제 하에서 1860년대 이후에도 조선문제는 종전대로 예부에서 관장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1881년에 청나라 정부는 조선문제를 예부에서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으로 이관했다. 이로써 세 개의 외교부서인 예부·이번원·총서 중 어느 한 쪽도 조선문제를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조선문제는 종전처럼 예부에서 관장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했다. 1881년 당시에도 조선은 여전히 중국에 사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조선문제를 일종의 지방장관인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게 넘겨주었다.

장차 조선을 통합하겠다는 뜻

그럼, 1881년의 조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조선문제 관할권을 종래의 예부에서 다른 기구로 이관함으로써, 과거처럼 조선을 자율적인 번속국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전통적인 책봉조공관계(사대관계) 하에서 종주국은 번속국에게 형식적 사대만 요구했을 뿐 실질적 복속은 요구하지 않았다. 일정한 예외는 있지만, 그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는 원칙상 자율적이었다. 그런 동아시아적 외교관계를 관장한 곳이 바로 예부였다. 그런데 조선문제 관할권을 예부에서 박탈한 것은 조선을 더 이상 자율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둘째, 조선문제 관할권을 외무부 즉, 총서에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을 서양열강처럼 대우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총서는 대등한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셋째, 조선문제를 지방장관인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게 이관함으로써 조선문제를 국내문제처럼 다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세 가지 의미 중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에게 더 이상 자율권을 주지 않을 것이고 또 조선을 대등한 나라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며, 앞으로는 마치 국내문제를 다루듯이 조선문제를 취급하겠다는 의지를 이로써 천명한 것이다.

그럼, 1881년에 청나라가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1879년의 동아시아 정세변화가 있었다.

1879년에 중국의 전통적인 번속국인 유구(오키나와)가 일본에 합병되는 장면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청나라는 ‘조선만큼은 일본 등 서양세력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사전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그 새로운 시도란, 조선이 약화된 틈을 타서 조선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등 서양열강이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청나라의 정책변화를 잘 반영하는 것이 광서 5년(1879) 7월 4일자 광서황제의 유지였다(실제로는 서태후의 명령). 전통적으로 자율성이 존중되던 한중관계에서 이로 인해 자율성이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자율성이 타율성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책변화를 반영한 것이 1881년의 조선문제 관할권 이관조치였다. 조선문제를 외교부서인 예부에서 내국부서인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게 이관함으로써, 조선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조선을 ‘내국’처럼 다루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이관조치에 이어 이듬해인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청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대해 내정간섭용 파병을 감행했으며, 이후 청일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12년 동안 조선을 상대로 전무후무한 간섭정책을 일삼았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목표 즉 조선을 병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1881년 조선문제 관할권 변경에 이어 1882년 임오군란 개입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가 조선문제 관할권을 내국부서인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게 넘겨준 것은 결코 가볍게 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장차 조선을 통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민족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1881년의 조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비록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조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1882~1894년 기간에 청나라가 사상 처음으로 조선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1879년 광서제의 유지와 1881년 조선문제 관할권 변경이라는 사전 조치가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조직개편은 통치자의 정책목표 잘 보여줘야

이러한 청나라의 사례는, 비록 한민족에게는 큰 상처를 안겨 주었지만, 청나라 자신의 입장에서는 ‘국가기구 간 권한분담에 국가의 의지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국가경영을 위해 고려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기구 간 권한분담에는 국가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1881년의 청나라는 부서 간 권한분담에 국가의 의지를 잘 반영시켰다. 적어도 중국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이 글의 결론은 이것이다. 청나라가 조선문제 관할권을 외무부에 맡기지 않은 것은 조선을 외국처럼 다루지 않고 조만간 통합 내지는 통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만약 청나라가 조선문제 관할권을 외무부에 맡겼다면, 이는 조선을 외국처럼 다루면서 통합 내지는 통일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통치자가 어떤 기구에 어떤 권한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은 그 통치자가 어떤 정책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만약 1881년의 청나라 통치자가 “조선을 통합하기 위해 조선문제를 외무부인 총서에 맡기겠다”고 천명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대해 국제사회는 비웃음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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