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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의 아내가 목을 놓아 운 '장사 벌지지'

치술령 오르기 전에 꼭 들러야 할 '슬픈 곳'

등록|2008.01.19 12:05 수정|2008.01.19 14:31

남천 너머 남산이 보인다남산 아래를 흘러 경주 시내로 흘러들어가는 남천의 모습. 긴 모래사장이 물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 모래밭에서 박제상의 아내가 목을 길게 늘이고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정만진



경주에서 울산으로 남하하는 도로를 따라 5분쯤 내려가노라면 오른쪽으로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화랑수련원이 보인다. 화랑수련원으로 들어가는 일차선 길로 접어들면 금세 '화랑교'라는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 아래로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그 이름이 남천이다.

경주의 남쪽인 남산 아래를 흘러가니 그 이름이 남천으로 정해진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이 남천은 흘러흘러 경주 시내로 들어가 북천과 만나고, 남천과 북천이 모인 물은 이윽고 형산강이 되어 포항을 거쳐서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경주 사람 박제상의 아내 김씨가 치술령에 올라 살아 생전 내내 동해만 바라보았듯이 경주를 관통하는 남천 또한 흘러흘러 동해로만 달려가는 것이다.

멀리 화랑교가 보인다남천은 망덕사지와 화랑수련원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른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던 망덕사는 이제 그 터만 남아 있다. 지금 사진을 찍은 지점의 등뒤가 바로 망덕사지이다. ⓒ 정만진



화랑교를 건너지 말고 남천 강둑을 따라 왼쪽으로 100m 남짓 들어가면 비석이 하나 방둑 위에 외로이 서 있다. 여기서 비석이 외로이 서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현장에 가본 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실제로 강둑에는 이 비석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길게 이어지는 강둑을 이루는 천연스러운 흙들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마른 풀 정도를 제외하면 천지사방에는 그저 바람만 일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곳을 찾은 사람이 있어 그가 홀로라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신과 이 비석이 형제처럼, 벗처럼 만났다는 느낌을 받을 터이다.

장사 벌지지이 비석 뒤로 보이는 솔숲이 바로 망덕사지이다. 절터에는 주춧돌들이 줄을 지어 널부러져 있고, 당간지주도 남아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등뒤로 남천 강물이 흐른다. ⓒ 정만진



두 손으로 비석을 붙들고 그 몸을 들여다보면 한자로 쓰여진 "長沙 伐知旨" 다섯 글자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이게 무슨 뜻인가? '장사'라면 길 장(長)에 모래 사(沙)이니 '긴 모래밭' 정도의 뜻일 게다. 과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천을 따라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보면 이곳에 ‘장사’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금방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곳에 장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단지 그러한 자연적인 연유 때문만이 아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이곳에서 박제상의 아내는 '목을 길게 늘이고 울었다'. 고구려에 가서 눌지왕의 아우 복호를 구출해온 박제상이 이번에는 왕의 다른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시중에서 전해들은 그의 아내는 남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뒤를 쫓았으나 이미 지아비는 저 멀리 사라져간 뒤였다.

죽음의 땅인 바다 너머로 떠나가는 남편을 뒤쫓다가 쓰러진 아내는 남천 이 모래밭에서 목을 길게 늘이고 울었으니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장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망덕사지 당간지주긴 세월 무너지지 않고 망덕사 당간지주는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다. 박제상의 아내 김씨의 마음처럼 그토록 오랜 시간을 이겨내고 그렇게. ⓒ 정만진



그렇다면 '벌지지'란 무슨 의미인가? 박제상의 아내가 장사 모래밭에서 울다가 쓰러졌을 때 그의 친척들이 달려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혼절한 박제상의 아내 김씨는 몸이 굳어 두 다리가 '뻗치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사람들은 그녀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고, 억지로 부등켜 세워도 그녀는 걷지 못했다.

온달이 죽어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전설에서도 확인이 되고, 의학적으로도 인정할 수 있듯이,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몸이 경색되는 법이니, 아마 박제상의 아내도 슬픔에 겨워 전신이 나무토막처럼 굳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다리를 뻗치지도 오므리지도 못하게 된 이곳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벌지지'로 음차하였다.

망덕사지절터 너머로 보이는 산은 낭산이다. 낭산에도 선덕여왕릉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남천은 남산과 낭산 사이를 흐르는 경주의 강이다. ⓒ 정만진



"장사 벌지지" 비석 오른쪽 뒤로 언덕 위에 솔숲이 보인다. 이 솔숲 바로 뒤의 언덕이 바로 망덕사지이다. 지금은 절은 볼 수 없고 그 터만 남았는데, 당간지주만은 오랜 풍상을 견디고 살아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말해준다. 박제상의 아내는 이 망덕사에서 남편의 무사 금의환향을 빌었지만 끝내 그 남편은 왜국 땅에서 불에 태워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동해 쪽에서 바라본 치술령울산 쪽에서 바라보는 치술령의 모습. 박제상의 아내 김씨는 치술령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오늘 동해 쪽에서 그녀가 서 있었을 치술령 정상을 바라본다. ⓒ 정만진


고구려와 왜국('일본'이라는 국명은 7세기 말이나 되어야 사용되는 표현이므로 4세기 초중반의 인물인 박제상의 활동을 기록하는 문서에서는 '왜국'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다)을 오가며 왕제들을 귀국시킨 박제상의 이름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어지간히들 아는 저명한 성명이다.

그러나 박제상은 왜국에서 불에 태워져 처형되고, 그의 부인은 치술령에 올라 목놓아 울며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죽어 돌로 변해버린다. 그 돌을 '망부석(望夫石)'이라 하고, 그녀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숨어버린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남편[夫]을 기다리다가[望] 돌[石]이 되었으니 그 돌의 이름은 망부석이 되었고, 새[乙]가 되어 암벽[岩] 속에 숨었으니[隱] 그 바위의 이름은 은을암이 되었을 터, 그토록 슬픈 사연을 간직한 망부석과 은을암은 지금도 치술령에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치산서원치술령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치산서원. 박제상을 제향하는 이 서원 앞에서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어느쪽으로 가든 치술령 정상과 망부석으로 가는 등산로가 펼쳐진다. 왼쪽으로 가면 (차를 몰고 가서 전원주택지와 미술관이 있는 등산로 입구에서 주차한 다음) 치술령 서북 능선을 타게 되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산속 오솔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고, 오른쪽으로 가면 (치산서원 바로앞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반쯤은 포장된 임도를 걷다가 나머지 반쯤은 가파른 등산로를 걷게 된다. 정상까지 가는 데에는 두 길 모두 한 시간 가량 걸린다. ⓒ 정만진


나는 내일이나 모레나 치술령에 오르려 한다. 박제상의 아내는 하염없이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지만, 나는 그저 운동 삼아 치술령을 한번 올라보려 한다. 그녀는 죽어서 새가 되었고, 죽은 뒤에도 한을 삭이지 못해 암벽 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나는 그저 가벼운 몸으로 치술령에 올라 망부석과 은을암을 구경하려는 것이다.

죽은 이여, 산 자를 용서하소서.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가 될 수는 없다”면서 불에 태워져 죽은 신라의 만고충신 박제상과 그의 아내 김씨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을 믿는 수준의 세속적 가치관을 가진 천박한 이 후손을 용서하소서.

그래도 치술령 정상 망부석에 올라 저 멀리 푸르른 동해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마음이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묵념을 꼭 올릴 터이니 부디 해량하소서.

치술령 등산로 안내판치술령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그 중에서 평범한 등산객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박제상유적지(치산서원 소재지, 사진의 하단 중앙 네거리 부분)에서 오른쪽으로 충효사, 법왕사를 거쳐 망부석에 닿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유적지에서 왼쪽으로 차를 몰고 가 전원주택이 여러 채 서 있는 곳(사진 하단의 왼쪽 저수지 가기 전 지점)에서 주차한 다음 서북 능선을 타는 코스이다. 두 길 다 정상보다 망부석에 먼저 닿는데(망부석과 정상 사이는 300m)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 정만진



[현지 안내판] 망덕사지 (사적 제7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56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외침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당(唐)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당황제 고종을 위한 절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 예부시랑 악붕구(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신라 조정에서 당의 사신을 망덕사로 인도하자, 그들은 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 하여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망덕사지는 국립 경주박물관에 의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13층 목탑지와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악랑터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남쪽에는 계단터, 서남쪽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현지 안내판]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6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64

당간은 옛날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인데,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남쪽에 65cm의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형태를 보면 안쪽면은 위로 평면을 이루고, 나머지 세 면은 아래쪽에서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진다.

기둥의 맨 위는 바깥쪽이 둥글고 경사지게 처리되었다. 바깥쪽 양 모서리는 중간쯤에서부터 위로 모를 죽였으나 다른 장식은 없다. 보통은 상․중․하 세 곳, 또는 상․하 두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던 구멍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맨 위쪽 끝에만 네모나게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망덕사는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 당간지주도 절이 처음 건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시대 초기의 양식이나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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