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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평화 원한다면 먼저 평화가 되라"

생명평화운동가 황대권 선생에게 듣다

등록|2008.01.20 16:16 수정|2008.01.20 16:16
제법 추운 날씨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어도 살을 에는 추위가 도시를 휘감았다.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추운 날씨를 투덜대며 따뜻한 겨울을 고대하는 눈치다. 겨울이 따뜻한 것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며 걱정하던 일들은 모두 옛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따뜻한 겨울이 낫다는 투정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추웠기 때문일까?

추워야 겨울다운 거란 나의 생각이 다소 낭만적인 말처럼 들리는 그런 날씨였다. 섣불리 옷을 입고는 밖에 나서기 힘든 날이었다. 그래도 특별한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겨울에 입는 옷들 중 가장 두꺼운 외투를 입고 평소에 잘하지 않던 목도리와 장갑까지 끼고 추운 서울 거리를 걸었다.

“서울이 더 춥네요.” 시골은 늘 춥다는 인식을 가지고 묻는 나의 말에 황대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서울이 더 북쪽이기 때문에 당연히 더 추울 수밖에 없다는 황 선생님의 말에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를 비껴간 내 현실적 편견이 드러났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도시문명의 열기도 자연의 순리를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는 이치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황대권 선생님을 만나다

▲ ⓒ 이국헌

그 추운 도심의 한 복판에서 황대권 선생님을 만났다. 영동의 보금자리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일정이 바쁘신 관계로 강연 차 서울에 올라온 짬을 이용해 짧지만 의미 있는 만남을 가졌다.

시간이 조금 남아 교보문고를 한 바퀴 둘러보니 <야생초 편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등등 황대권 선생님께서 쓰신 책들이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 아래 진열되어 있었다. 작년 9월에 출간된 근간 <바우 올림>도 눈에 띄었다.

스스로를 “바우”라 칭하는 사람! 남들 같으면 이름 앞에 그럴 듯한 호를 붙이기를 좋아하지만 황대권 선생님은 스스로를 바우라 칭한다.

바위란 뜻이기도 하고, 또 명사 뒤에 붙으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 ‘바우’는 정말로 토속적이며 정감 있는 명칭이라고 느껴진다. 그 바위 같이 올곧고 진솔한 사람, 황대권 선생님은 ‘생명’을 화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 그런 분임에 틀림없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 지, 근황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을 작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 많이 들어온단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이 많다. 자신의 사상을 담은 단행본도 써야겠지만 그것보다는 이곳저곳에서 들어온 생명평화와 관련된 글들을 많이 쓴다. 평화운동가로 알려지다 보니 강연 요청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니느라 너무 바쁜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황대권 선생님께서 심혈을 기울이시는 진짜 일이 있다. 생명평화결사(생명평화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모임)의 교육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이다. 생명평화결사에서는 생명평화사상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교육 및 생명평화사상의 확산을 위해 여러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이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 및 운영을 담당하고 계신다.

그래서 이 일에 큰 공력을 기울이고 계셨다. 특별히 요즘은 다음 주에 있을 ‘2008 겨울생명평화학교’를 위해서 많은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 아울러 2월 초에 20여명의 순례여행단과 더불어 쿠바로 순례여행을 계획 중이다.

“공동체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과 생태공동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마침 유기농을 통한 식량의 자급자족에 성공한 지상 유일의 국가인 쿠바를 여행할 계기가 있어서 이번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쿠바에 가서 유기농을 통한 경제적 자급자족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 오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인들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생태공동체인 ‘아쉬람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대권 선생님이 추진하고 계시는 아쉬람 공동체는 그동안 서울서 공동체 모임의 형태로만 모색해왔던 생태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이상공동체이다. 이는 기존의 경제자립 공동체 개념에 수행을 가미한 공동체를 지향한단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생활공동체들이 영성을 배제함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아쉬람 공동체는 지속적인 공동체 유지를 위해 영성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게 황대권 선생님의 설명이다.

이처럼 다양한 글쓰기와 강연 외에도 생명평화학교 운영 및 생태공동체 설립 추진까지 황대권 선생님의 근황은 과거나 현재나 오직 생명평화 사상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여기에 작년 하반기에 출판한 <바우 올림>까지 황선생님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생명평화를 위한 삶 그 자체였다.

모든 생명의 평화를 위하여!

▲ ⓒ 이국헌


생명과 평화를 화두고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그런 단체들도 많다. ‘생명과 평화’는 모든 인간이 양보할 수 없는 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과 평화에 대한 구체적인 철학적 정의와 더불어서 생명평화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생명과 평화라는 화두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선생님께서 붙들고 계신 생명과 평화란 화두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생명과 평화의 의미와 선생님의 화두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황대권 선생님은 “생명과 평화”란 용어 대신에 “생명평화”란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말씀하셨다. “생명”과 “평화”라는 단어는 서로 독립된 두 단어라기보다는 하나로 연결된 복합어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생명 따로 평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평화,” 혹은 “생명평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이 화두의 의미를 훨씬 더 잘 드러내준다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생명이지요. 그러나 그 생명이 있다고 항상 평화로운 건 아닙니다. 불의한 곳에서도 생명은 있죠. 살아있다고 해서 다 평화가 구현되지는 않습니다. 개별 생명이 평화로운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생명평화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아무리 강조해도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생명들이 서로 조화롭지 않으면 생명과 평화의 화두를 지켜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본주의적 개발은 그것이 아무리 생명친화적이라 할지라도 생명과 평화를 깨버린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건강한 생태계와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진정한 생명평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황대권 선생님은 진정한 생태주의자였다.

역사의 흐름이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다시 생태주의로 흘러오고 있다. 신본주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는 신을 중심으로 한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인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명과 평화는 인간의 이성과 가치를 구현하는 쪽으로 그 중심이 변하였다. 그러나 인본주의 역시 우주적 생명체 전체를 간과한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는 것으로 어떻게 생명과 평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류는 비로소 생태주의로 인식의 전환을 꾀하였다. 진정한 생명과 평화는 건강한 생태계의 조화로운 삶이 전제되어야만 구현될 수 있다. 황대권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평화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든 생명의 평화를 위한 생명평화의 화두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화두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실 건가요?

생명평화운동가로서 황대권 선생님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그의 책들은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생명과 평화주의로 돌이키기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 연유 때문에 그의 활동 하나 하나가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특별히 ‘생명평화결사’라는 단체 및 운동을 통해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황대권 선생님의 생명운동의 목적성에 대해서 물었다.

“생명평화결사는 결국 우리 사회를 생명평화사상으로 변화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것입니까?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생명평화결사의 모토는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라’입니다. 이전의 시민운동가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희생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적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한국 사회의 시민운동은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황대권 선생님은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감옥에서 수인(囚人)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따라서 그의 사회의식은 남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옥중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혁명적인 이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적인 성찰을 통한 자신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단다.

“감옥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회운동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념으로서만 치열했지 자신의 인격이나 삶의 의지, 철학적 변화에 대해서는 철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사회만 변화시키려다 보니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민중운동의 시대로부터 시민운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던 운동가들의 한계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성찰의 부족에 있음을 깨달은 황대권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과격한 사회운동보다는 생태공동체 운동을 지향하도록 하는 정신적 동인이 되었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감하면서 변화에 고무되었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그 가치가 전도되면서 시민사회는 큰 혼란 속에 휩싸이고 있다.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민주화 세력들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망연자실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황대권 선생님은 중요한 통찰을 던져주었다.

“어떤 면에서 작금의 현상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민운동가들은 자신들이 던진 아젠다의 당위성만을 내세워 사회 변혁을 끌고 갔지만 실패했습니다. 자신들의 삶 역시 상대 이데올로기에 처한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시민운동가들로 하여금 자기 성찰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충분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자신들의 변화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정말로 귀 기울여 경청해야할 말이었다. 지금까지 여당의 위치에 있었던 진보세력들과 특히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에 소속된 정치가들은 이 말을 꼭 유념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시민운동의 변증법적 전환이 이르러오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거시적 사회 변혁을 부르짖었지만 그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그에 대한 반명제(antithesis)로서 개인적 자기성찰이 더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라”는 생명평화결사의 모토는 이런 역사적 비평인식을 통해서 나온 변증법적 결과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황대권 선생님이 추구하는 공동체적 이상이 왜 영성을 앞세운 자기성찰에 있는 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기 성찰과 영성 추구만으로 사회변화를 이룰 수 있는지 물었다.

“영성적 자기 성찰 외에 사회 변화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실 건가요?”

사회적 아젠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내면적 영성 추구와 자기 성찰에 집중하다보니 “사회의식의 결여”에 대한 비난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변화를 등한시하는 것을 결코 아니라고 못 박는다. 비록 현재의 시민운동가들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구체적으로 사회 변화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 황대권 선생님의 대답이다.

“사회의식의 결여 역시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문제를 등한시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사회 변화에 대한 의식을 함께 모색하고 있습니다. 다만 프라이어리티를 정하는데 있어서 사회변화보다는 자신의 성찰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시민운동이 자신의 변화를 등한시한 채 사회 변화만을 추구함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죠.”

개인적 영성과 성찰을 강조하는 것이 자칫 사회의식의 결여로 비춰질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회 변혁을 위해서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황선생님의 말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렇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시민운동은 그것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기성찰적 생명평화운동을 추구하겠다는 그 분명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생명평화결사를 통해서 개인의 삶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 변화가 사회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그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을 가져본다. 물론 나도 기꺼이 그 운동에 어떤 형태로든 함께 할 것이다.

합리적 낙관론이 있었다

황대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여러 대목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낙관주의를 볼 수 있었다. 황선생님은 수행과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가 바뀌어질 수 있고, 그 변화로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은 이데올로기적 당위를 앞세운 운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만큼만 바뀌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분은 확실히 낙관주의자였다. 우선 인간이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수행과 자기성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영성과 수양을 강조하는 아쉬람 공동체를 통해서 그 변화를 이끌어보겠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보인다. 결국 인간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사형제 폐지국가 기념식과 관련해서 최근에 활동하고 있는 사형제도 폐지 운동과 관련한 질문에서도 황대권 선생님은 낙관론을 내비쳤다.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에는 효율적 공리주의와 보상적 처벌주의 외에도 교정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오랜 수감생활 속에서 그가 목격한 수감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잔악한 범죄자라도 교정이 가능하다는 그의 지론 속에서 합리적 낙관론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변화될 수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의지가 있다는 칸트의 이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안의 선의지가 있음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그 선의지의 계발을 통해 인간은 참된 인간성을 구현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린 모두 황대권 선생님과 같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사회의 미래 희망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서 낙관론을 보았다.

“감옥에 있을 때 가졌던 한 가지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다 좋은 수련장이다’라는 것이었지요. 어떤 환경에서든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미래는 늘 희망적이지 않겠습니까? 한국사회가 그런 희망의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 궁극적 목적을 소망하고 바라는 한 희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환경이 어렵더라도 그 환경 속에서도 역시 할 일이 있다면 굳이 희망을 버릴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정권 교체와 더불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낙담적 분위기가 팽배한 것을 보면서 그렇게 낙담할 이유가 없다고 황대권 선생님은 말한다. 나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반대하는 정권일지라도 그 아래서 해야할 일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기 때문에 늘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그분의 충고이다.

이 변화의 기회를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고 목표한 바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할 시대적 사명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모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있다.

다시, 황대권 선생님을 만나며

우리 사회의 큰 바위, 황대권 선생님을 만나면서 한국 사회의 시민운동이 가야할 미래를 보았다. 그것은 과거 간디의 길이었고, 함석헌의 길이었다. 물론 우리의 선배들은 그 선구자들을 통해서 사회 투쟁과 변화에 몰두했지만 한 시대를 비껴 다시 그들을 보면 자기 성찰에 철저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철저한 자기 성찰과 영성의 추구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임을 알게 된다.

황대권 선생님은 그런 깨달음의 매개가 되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평화 운동은 21세기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이 중요한 화두를 던져준 그분의 사상과 많은 사람들이 연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변화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시민운동이 그 근본적인 성찰의 부족으로 실패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 그 운동의 정신적 중심에는 바로 자기 성찰이라는 매우 막중한 과제가 놓여 있다.

이 땅의 많은 주체들이 영성적 자기 성찰의 길을 간다면 생명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황대권 선생이 오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야생초 편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잔잔하게 감동시켰던 그 큰 바위가 오늘 다시 우리에게 진지한 수행과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합리적 낙관론에 입각해서 말이다. 참으로 크고 고상한 외침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생명평화운동가 황대권 선생님과 특별한 인터뷰를 요청해 인터뷰했다. 이명박 정권 시대와 더불어 황대권선생은 진보운동에 자기성찰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 기사는 본인의 인터뷰 기사로 [라이프가디언]과 [인터넷한겨레]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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