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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이야기 274] 강정을 빚으며

등록|2008.01.21 10:53 수정|2008.01.21 16:17

▲ 강정 빚는 아낙네들 ⓒ 윤희경

명절이 가까워오면 동네 아줌마들이 돌아가며 강정 품앗이를 합니다. 찹쌀을 기름에 튀겨 유과를 만들고 고명(겉모양을 꾸미기 위해 음식 위에 뿌리는 실고추 따위, 여기서는 참깨나 튀밥을 말함)을 발라내느라 웃음소리 가득합니다.

마른 찹쌀과자가 기름 솥에서 발버둥 칠 때마다 고향냄새가 풍겨 나옵니다. 강정 빚는 풍경이 좋아 여인들 속에서 핀잔을 들어가며 일손도 거들고 지범지범 부스러기도 얻어먹습니다.

강정은 견병(繭甁)이라 하여 예부터 다식 약과 등과 함께 잔칫상에 오르는 귀한 과자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이 번거롭기 때문에 여인들의 정성과 손끝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찹쌀을 일주일 정도 냉수에 담갔다 빻아 겹체로 쳐 반죽을 만듭니다. 반죽을 펄펄 끓는 물에 뜯어 넣고 찐 다음, 꽈리가 일어 부풀어 오를 때까지 방망이로 팡팡 두들겨댑니다. 반죽을 말리고 썰어 기름에 튀겨내기까지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해야 좋은 강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조청을 바르는 섬섬옥수 ⓒ 윤희경


강정의 재료는 토종 참깨와 튀밥이나 지장을 사용합니다. 참깨를 볶을 때 고소한 냄새는 늘 코 속을 즐겁게 해줍니다. 고소한 맛은 메마른 기운을 기름지게 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노화방지와 수명 장수하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 먹던 깨보숭이, 깨설기, 깨다식, 깨경단, 깨죽 등 말만 들어도 아직까지 입안에 침이 고여 옵니다. 깨로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법이 없으므로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가 내어주는 분량으론 양에 차지 않아 껄떡대던 추억이 어제와 같습니다. 깨로 만든 음식들을 입아귀가 터지도록 욕심 사납게 먹을라치면 죽어서 아귀(餓鬼)가 된다 겁을 덜컥 주곤 하였습니다. 

▲ 찹쌀을 튀겨낸 속살 강정 ⓒ 윤희경


“엄마, 아귀가 뭐야?”
“허기가 진 귀신”
“?….”
“몸은 앙상하게 말랐지만 배는 불룩한데 목구멍이 좁아 음식을 먹을 수 없단다.”


막 튀겨낸 참깨와 튀밥 강정을 입안에 넣고 씹고 있으려니 어린 시절 엄마의 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달착지근하고 고신 맛, 참 오랜만에 씹어보는 고향냄새입니다.

▲ 참깨강정 ⓒ 윤희경


설날이 오면, 아줌마들은 강정을 제사상에 올려 한 해의 풍년과 건강을 축원도 하고, 설 손님에겐 한 접시씩 수북이 담아 고향의 긴 겨울이야길 녹여냅니다. 때깔 좋고 번듯한 강정이야 시중에 가면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맑은 물과 청정 찹쌀로 빚어낸 아늑한 맛을 어디 가 맛보랴 싶습니다.

겉모양이나 차림새만 화려하고 속내는 보잘 것 없는 꼴을 ‘속빈강정’이라 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끔씩 속을 비우고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휴지통에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은 늘 헛바람이 들어 비우기가 그만큼 힘이 듭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선 마음을 버리고 비우라 재촉을 해댑니다.

▲ 흑깨강정, 참깨강정, 튀밥강정, 지장강정 ⓒ 윤희경


속빈강정, 손끝으로 빚어낸 ‘텅 빈’ 정성 속에 우러나는 깊고 그윽한 맛, 비워서 얻어낸 여백과 넉넉함을 대하는 순간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설날이 가까워옵니다.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속을 달래고 추스르며 ‘텅빈충만’에 대하여 다시 곱씹어봅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월마을 포털사이즈,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상류'를 찾아오시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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