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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매력은...재밌다"

[인터뷰] <살육에 이르는 병> 번역자 권일영씨

등록|2008.01.21 16:06 수정|2008.01.28 11:43
혹자는 너무 가볍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신선한 재미가 있다고 한다. 일본소설을 두고 엇갈리는 명암이다. 그 명암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단지 취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취향의 흐름이 요즘처럼 두드러진 적은 일찍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장르 소설중 미스터리 소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소설을 통해 미스터리 소설에 눈을 떴다는 사람도 제법 된다. 왜 그들은 일본 미스터리에 열광하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국내에 번역하여 소개하는 권일영씨를 지난 13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기자 주>

* 이 기사의 내용에는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번역자 권일영씨 ⓒ 권일영

- 가장 최근에 읽은 미스터리 소설이 <살육에 이르는 병>(아비코 다케마루)이다. 막판의 반전과 강도 높은 현장 묘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사실 묘사가 끔찍하긴 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작가야 그렇다 치더라도 번역자는 굉장히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번역하면서 너무 끔찍하거나 잔인해서 잠 못이루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특별히 끔찍해서 잠을 못 자거나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다. 번역하고 있는 작품이 미스터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다 각오하고 시작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장면의 묘사 자체는 잔인하다. 하지만 그 일부만 가지고 특별히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 이루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던 중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작품이 있었다. <영원의 아이>(덴토 아라타)와 같은  작품이다. 특별히 한 장면이나 묘사가 끔찍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상처받고 다치는 내용이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말 잔인한 것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K-1의 경기 중 두 선수가 피터지게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잔인하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는다. 대등한 입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고 유혈이 낭자할 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K-1선수가 어린 아이를 상대로 싸운다고 생각해보라. 그 힘을 방어할 물리적인 힘이 없는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다. 생각만해도 소름끼친다. 정말로 잔인한 것은 이런 것이다. 난 K-1과 같은 격투기는 보지 않지만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는 거다."

- 어쨌거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 편한 소설은 아니다.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문구가 책표지에 씌여 있듯이 말이다. 비디오나 영화는 자주 봤지만 책에서 그런 문구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기도 하고.
"19세 미만 구독불가는 출판사와 합의하여 어떤 제제를 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붙인 것이다. 책표지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를 밝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출판사 측으로서는 상당 부문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이다. 물론 서점에서 진열할 수도 없다."

-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대부분 잔인하면서도 실감나는 현장묘사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에 숨겨져 있던 트릭, 이 두 가지를 꼽는다. 그런데 잔인한 현장묘사라면 <아웃>(기리노 나쓰오)도 이에 못지 않다. 그러나 <아웃>은 19세 미만 구독불가를 받지 않았다. 이 작품이 19세 미만 구독불가가 되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의 경우에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 어머니를 시간(屍姦)한다는 설정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설정은 다른 어떤 잔인한 현장 묘사보다 더 끔찍하고 충격적이다.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아직 가치관이나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미숙한 청소년들이 읽었을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어느 한 책을 읽고난 후 100명 중 90명이 좋다고 해도 10명에게 해가 될 수 있을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잔인한 것은 따로 있다

- 요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보면 그 배경이 ‘지금, 여기’인 경우가 많다. 안개 자욱한 으스스한 분위기의 고성(古城)이나 열차나 무인도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이 아닌. 특히 가족이 많다. 이 점은 같은 동양권 사회인 우리나라와 참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앞서 얘기한 친어머니를 시간하는 장면은 우리는 상상도 못할 ‘극악무도’한 설정이 아닌가.
"일본의 현대 미스터리 소설들은 대부분 가족의 해체를 다루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이에 비례해 가족의 붕괴와 분산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예전에는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등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다. 형제도 여러 명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대부분 핵가족화되고 아이는 하나, 많으면 둘밖에 낳지 않았다. 부모는 생계에 바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직장에 매달려야 하고 자녀들은 자녀대로 따로 놀게 되었다. 따라서 온가족이 모여앉아 밥 한끼 먹는 장면도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어버렸다.

아파트 열쇠를 목에 걸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그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원룸이나 오피스텔과 같이 개인 거주 형태가 발달하게 된 것도 모두 개인 위주의 생활패턴을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일본은 이미 가족 붕괴가 많이 진행된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그 초기로 보인다는 점이다."

- 그래도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덜받아서 그럴까. 우리나라보다는 가족에 대한 결속력이나 윤리의식이 조금 더 희박한 것 같다.
"가족에 대한 결속력은 오히려 일본도 강하다. 일본의 명문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나라나 매우 부유한 집안이나 명문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 확장하기 위해 자녀들을 뿔뿔이 흐트러 놓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미스터리에서 잔인하다거나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장면을 설정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가족 결속력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력의 차이랄 수 있다. "

- 상상력의 차이란 무얼까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한 가지 분야에 열중하면 거기에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다. 조금 더 미친다고나 할까. 어떤 단체에 소속된 일부로서는 소속감이나 일체감이 강하지만 개개인으로 봤을 때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제도로부터 퍽 자유로운 성향이 있는 듯하다."

- 일본 미스터리는 좀 잔인한 장면이 많다. 여기에 일본인 특유의 ‘자살미학’이나 죽음에 대한 동경(타나토너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도 토막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일본인에게도 이 사건들이 충격이다. 토막살인 장면을 묘사하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할 작가가 과연 있을까. 아니다. 그는 그가 사는 사회의 충격적 사건에 대해 발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하고 어두운 면을 미스터리 작가 나름의 불안을 토로하는 것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씨랜드 사건이나 성수대교 사건, 삼풍백화점 사건 등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앞서 잔인한 것은 따로 있다고 했는데 이런게 정말 야만스럽고 잔인한 사건들이다. 이런 사건과 사고들을 소재로 하거나 이용한 작품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문학이 그런 사건이나 사고들에 더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회 병폐, 부조리... 문학으로 승화시켜야

▲ 번역자 권일영씨 ⓒ 권일영


- 우리나라와 비교해 일본에서 미스터리가 발달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의 환경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하루아침에 마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저런 점을 감안했을 때 한일간 미스터리 작가들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일본과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을 미스터리 작품과 작가들이 없지 않다. 일본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은 출판사나 독자의 몫도 있지만 가장 큰 역할은 작가 스스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본 미스터리를 굉장히 즐겨 읽는다.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정확히 말하면 잘 모른다. 굳이 답변을 하자면, 아마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원래 미스터리를 즐겨읽었던 독자들. 이들은 딱히 일본 미스터리만 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젊은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대개 미스터리가 주는 ‘반전’, ‘의외성’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유행에 따라 잠시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계속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지고 즐긴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와 비교해서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취할 것은 취하되 또 따질 것은 따진다. 그게 요즘 젊은이들인 것 같다."
  
- 미스터리 소설을 읽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려고 했는데 우문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미스터리의 매력은?
"그것도 잘 모른다.(웃음)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 문화를 즐기는 잣대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소설도 순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소설은 ‘재미’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락’이다. 소설 중에서도 특별히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미스터리의 매력은 재밌다는 것이다. 일상을 잠시 접고 빠져들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시간 때우기’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돌 때 ‘시간때우기’는 나쁘지만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시간때우기’는 재충전이자 휴식이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미스터리를 왜 읽냐구? 재미있으니까!

▲ 권일영씨는 오늘도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번역한다. ⓒ 권일영


- 프로필이 의외다. 경제학과를 졸업했는데 일본어는 어떻게 접하게 되었나?

"대학 다닐 때 경제학 전문서적을 보는데 관심있던 ‘경제사’ 분야에 일본 서적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번역서가 흔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책들만 다 읽을 수 있어도 대학생활은 성공한 셈이라치고 그때부터 독학하기 시작했다. 일본어와 독일어는 비교적 문법이 정확하고 예외가 많지 않은 언어라서 기초를 익히기 어렵지 않다."

- 번역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일본 소설의 경우 지명과 인명이다. 일본의 한자는 음과 훈에 따라서 다르게 읽기도 한다. 따라서 ‘서울’이나 ‘도쿄’ ‘오사카’ 같은 잘 알려진 지명이라면 다행이지만 ‘~부락’ ‘~마을’ 규모의 지명의 발음 표기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때는 지명만 찾다가 며칠을 보낸 적이 있다. 지명의 발음을 찾느라 시간을 오래 소비해야 할 때는 굉장히 지친다.

인명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一’은 '이치, 히토, 히토쓰, 하지메, 가즈' 등 여러 가지로 읽힌다. 주요인물이 아닌 작품중 자잘하게 등장하는 이름 중 다소 번역이 틀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번역자의 실수 아닌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애로사항이 있다는 점을 독자분들이 조금 감안해주었으면 한다."    

- 작업하면서 가장 즐거운 작품이 있었다면? 또는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가장 짜릿했던 작품은 <다크>(기리노나쓰오)의 1장과 <호숫가살인사건>(히가시노게이고)의 앞부분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의 경우 대부분 술술 읽히므로 작업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중의 한 명이기도 한 다카무라 가오루의 문체는 굉장히 ‘하드(Hard)'하다. 일본 특유의 피동형문장이 줄줄이 이어질 때는 번역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가를 좋아하고 극소수의 작가를 싫어한다. 독자들에게 작가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제로 주입한다고 느껴지는 작품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 스트레스는 어떤 방법으로 푸는지?
"주로 독서로 푼다. 가끔 산에도 간다."

- 올해 출판예정인 도서나 작업중인 작품을 소개한다면
"하라료의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가 첫 선을 보인다.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倒錯)시리즈 3부작과 <모방범>(미야베미유키)의 후속작인 <낙원>도 소개될 예정이다. 작년에 허응을 얻었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가이도 다케루)의 후속작이랄 수 있는 <나이팅게일의 침묵>도 올해 독자들을 찾아간다. 오츠이치의 <고스(Goth)>도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메인디쉬 못지않게 맛깔스러운 역자후기
개인적으로 권일영씨의 번역 소설을 좋아한다.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 바로 권일영씨가 번역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저자는 오래도록 기억해도 역자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법.

그러나 내가 그가 번역한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본편 못지않게 재미있는 역자후기때문이었다. 그의 역자후기에는 생생한 육성이 있다. 그의 후기를 읽으면서 어느 때는 곰곰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쿡쿡 웃기도 했다.

지금껏 읽었던 여타의 역자후기가 일종의 ‘심심한 감상문’이었던 데 반해, 그의 후기는 정말 번역자만이 느낄 수 있고 쓸 수있는 생동감과 맛깔스러움이 있다.

번역자 권일영씨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사에서 월간지와 멀티미디어 관련 기자로 일했다. 현재 번역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게임의 이름은 유괴> <배틀로얄> <환야> <편지> <누군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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