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20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전남 여수 명물을 소개한다. 그 명물 중에 마래터널을 소개한다. 큰 애가 가보자고 한다. 마래터널만 갈 수는 없고 산에도 가야한다며 집을 나섰다. 제과점에 들러 점심으로 빵과 우유를 샀다.
만성리해수욕장 근처에 천성산을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고 하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몇 번 차를 세우고 길을 찾다가 산길을 발견하였다. 모든 길은 산 정상으로 향한다는 무모한 원칙으로 길을 잡고 올라섰다. 조금 들어서니 산길은 끊어지고 임도와 만났다가, 민둥산으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보인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검게 그을린 채 잘려나간 많은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산불로 숲이 파괴된 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시야가 확보되어 좋을 것 같지만 산이 활기가 없으니 그 위를 밟아가는 것도 힘이 든다. 민둥산을 지나니 애들도 힘들어하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산에는 나무가 있어야 하는 가 보다.
천성산(天聖山) 정상(430m)은 삼각점만 있다. 쭉 이어진 등산로 끝에는 봉화대가 있는 봉화산이다. 애들에게 저기까지 갈까? 하니 안 간다고 한다. 사실 나도 갈 마음은 없다.
어린 시절 아련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산에서 내려와 만성리해수욕장에 들렀다. 날씨도 추운데 가족끼리 낚시 온 분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사실 모닥불을 피우고 나면 검은 흔적이 남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따뜻한 게 더 끌린다. 낚시가방 안에는 노래미 한 마리가 자유를 포기한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서글픈 생각이 든다.
만성리해수욕장은 검은 모래로 유명하다는데 모래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어렸을 때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여름에 피서로 당연히 해수욕장을 찾아간다. 부모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만성리로 행했고, 전라선을 타고 여수로 내려가는 기차는 역을 지날 때마다 사람사람을 가득 채우고서 구부러진 철길을 힘들게 간다.
역사도 없는 만성역에 내려섰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리고 바다를 느끼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수심이 깊어 조금만 들어가도 무서웠던 바다에 대한 기억들.
겨울바다는 한적하기만 하다. 해안을 걷는 연인들, 활기찬 젊은이들이 뛰어다니며 겨울바다를 즐기고 있는 열정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픔이 배어나오는 마래터널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시고 좁다란 길로 들어선다. 차는 서로 양보하면서 비켜가야 한다. 철도 건널목을 넘어서니 현대사의 아픈 추억을 알려주는 '형제묘' 안내판을 만난다. 여순사건이라고도 하고, 14연대반란사건이라고도 한다.
학교 다닐 때 기억으로는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배웠다. 당시 좌익 혐의를 받은 수많은 민간인들이 군인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형제묘에서도 시내에서 끌려온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라고 한다.
요즘 나는 늦게나마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있다.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처럼 거부감이 일어난다.
해방의 감격도 잠시 1948년 10월, 여수항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시작한 군인들의 반란. 결국 좌우익간 충돌로 변질되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면서 반목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좁다란 길 아래로는 전라선이 흐르고 있다. 기차라도 지나가면 더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간절하다. 마래터널 앞에서 맞은 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초행길일까? 맞은 편에서 오는 하얀 승용차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서는 멋쩍어 한다. 연세가 드신 것을 파악한 처(妻)는 바로 후진을 한다. 뒤에서는 빵빵거린다. 무시하고 뒤로 계속 후진하여 조금 넓은 길에서 비켜 주었다.
양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마래터널을 들어가려면 먼저 양보를 배우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마래터널의 정식명칭은 마래 제2터널이며, 국내유일의 자연 암반터널로 1926년도 일제강점기에 군사용 도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총 길이 640m로 중간 다섯 곳에 여유공간을 만들어 차량이 대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최근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청에서는 등록문화제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시달렸을까?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터널은 자연암반을 깬 흔적이 그대로 살아있다. 터널 내부는 음산한 기운이 묻어나고 있다. 노란 전등 불빛이 그날의 아픔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엷게 비추고 있다.
어두운 터널 끝에는 하얀 출구가 빛나고 있다. 마치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으로 다가온다. 그 문을 지나서면 기나긴 어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날, 군인들에 의해 이끌리며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던 하얀 문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애들이 터널을 지날 때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즐거워한다.
"다시 갔다 올까?"
"예"
터널 안에서 차량을 피해 다니며 지나 다니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한번 더 갔다 왔다.
동백꽃이 피었을까?
여수역을 지나고 오동도로 향했다. 오동도 입구에는 여수팔경의 으뜸이라고 죽도청풍(竹島淸風-오동도의 맑고 시원한 바람)을 자랑하고 있다. 입구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가판이 있고 애들은 어김없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닭꼬치를 하나씩 맛있게 먹는다.
오동도로 가는 길은 1935년 여수항을 개발하면서 방파제 768m를 건설하였다. 입구에는 당시 채취했던 암반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바다에 길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높은 절개지 암벽을 바라보니 또 다른 아픔이 밀려온다.
방파제 시작점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이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동백열차를 탈까도 생각했지만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바다날씨가 무척추운데도 관광객들은 북적거린다. 해는 빛을 잃어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방파제가 끝나고 산책로를 따라 올라서니 기대만큼 동백은 피지 않았다. 붉게 떨어진 동백을 기대했었는데, 너무 이른 걸음에 아쉽기만 하다.
여수항 개항 : 1923년
마래터널 : 1926년 완공
철도 여수~광주 개통 : 1930년
오동도 방파제 착공 : 1935년
신항일대 매립 : 1936년
14연대반란사건 : 1948년
만성리해수욕장 근처에 천성산을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고 하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몇 번 차를 세우고 길을 찾다가 산길을 발견하였다. 모든 길은 산 정상으로 향한다는 무모한 원칙으로 길을 잡고 올라섰다. 조금 들어서니 산길은 끊어지고 임도와 만났다가, 민둥산으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보인다.
▲ 오천동 모사금 해수욕장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보인다. ⓒ 전용호
▲ 산길산불정리작업을 위해 내 놓은 길을 따라 간다. 지친다. ⓒ 전용호
천성산(天聖山) 정상(430m)은 삼각점만 있다. 쭉 이어진 등산로 끝에는 봉화대가 있는 봉화산이다. 애들에게 저기까지 갈까? 하니 안 간다고 한다. 사실 나도 갈 마음은 없다.
어린 시절 아련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산에서 내려와 만성리해수욕장에 들렀다. 날씨도 추운데 가족끼리 낚시 온 분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사실 모닥불을 피우고 나면 검은 흔적이 남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따뜻한 게 더 끌린다. 낚시가방 안에는 노래미 한 마리가 자유를 포기한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서글픈 생각이 든다.
▲ 만성리해수욕장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없다. 간간히 낚시객과 겨울바다를 즐기는 연인들이 보인다. ⓒ 전용호
▲ 모닥불날씨가 춥다보니 애들과 함께온 낚시객이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 전용호
어렸을 때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여름에 피서로 당연히 해수욕장을 찾아간다. 부모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만성리로 행했고, 전라선을 타고 여수로 내려가는 기차는 역을 지날 때마다 사람사람을 가득 채우고서 구부러진 철길을 힘들게 간다.
역사도 없는 만성역에 내려섰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리고 바다를 느끼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수심이 깊어 조금만 들어가도 무서웠던 바다에 대한 기억들.
겨울바다는 한적하기만 하다. 해안을 걷는 연인들, 활기찬 젊은이들이 뛰어다니며 겨울바다를 즐기고 있는 열정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픔이 배어나오는 마래터널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시고 좁다란 길로 들어선다. 차는 서로 양보하면서 비켜가야 한다. 철도 건널목을 넘어서니 현대사의 아픈 추억을 알려주는 '형제묘' 안내판을 만난다. 여순사건이라고도 하고, 14연대반란사건이라고도 한다.
학교 다닐 때 기억으로는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배웠다. 당시 좌익 혐의를 받은 수많은 민간인들이 군인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형제묘에서도 시내에서 끌려온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라고 한다.
요즘 나는 늦게나마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있다.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처럼 거부감이 일어난다.
해방의 감격도 잠시 1948년 10월, 여수항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시작한 군인들의 반란. 결국 좌우익간 충돌로 변질되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면서 반목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좁다란 길 아래로는 전라선이 흐르고 있다. 기차라도 지나가면 더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간절하다. 마래터널 앞에서 맞은 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초행길일까? 맞은 편에서 오는 하얀 승용차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서는 멋쩍어 한다. 연세가 드신 것을 파악한 처(妻)는 바로 후진을 한다. 뒤에서는 빵빵거린다. 무시하고 뒤로 계속 후진하여 조금 넓은 길에서 비켜 주었다.
양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마래터널을 들어가려면 먼저 양보를 배우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 마래터널 입구차 한대 다닐 정도로 좁다. ⓒ 전용호
▲ 터널 내부어둡다. ⓒ 전용호
▲ 터널 출구하얀 문처럼 다가온다. ⓒ 전용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시달렸을까?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터널은 자연암반을 깬 흔적이 그대로 살아있다. 터널 내부는 음산한 기운이 묻어나고 있다. 노란 전등 불빛이 그날의 아픔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엷게 비추고 있다.
어두운 터널 끝에는 하얀 출구가 빛나고 있다. 마치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으로 다가온다. 그 문을 지나서면 기나긴 어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날, 군인들에 의해 이끌리며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던 하얀 문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애들이 터널을 지날 때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즐거워한다.
"다시 갔다 올까?"
"예"
터널 안에서 차량을 피해 다니며 지나 다니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한번 더 갔다 왔다.
동백꽃이 피었을까?
여수역을 지나고 오동도로 향했다. 오동도 입구에는 여수팔경의 으뜸이라고 죽도청풍(竹島淸風-오동도의 맑고 시원한 바람)을 자랑하고 있다. 입구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가판이 있고 애들은 어김없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닭꼬치를 하나씩 맛있게 먹는다.
▲ 1930년대 여수항오동도가 바다에 떠있다. ⓒ 전용호
▲ 1930년대 여수 신항 매립 사진오동도 입구 해안을 절개하여 오동도 방파제와 여수항을 매립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절개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 전용호
▲ 오동도 방파제바다를 바라보며 도란도란 걸어가는 길 ⓒ 전용호
오동도로 가는 길은 1935년 여수항을 개발하면서 방파제 768m를 건설하였다. 입구에는 당시 채취했던 암반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바다에 길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높은 절개지 암벽을 바라보니 또 다른 아픔이 밀려온다.
방파제 시작점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이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동백열차를 탈까도 생각했지만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바다날씨가 무척추운데도 관광객들은 북적거린다. 해는 빛을 잃어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방파제가 끝나고 산책로를 따라 올라서니 기대만큼 동백은 피지 않았다. 붉게 떨어진 동백을 기대했었는데, 너무 이른 걸음에 아쉽기만 하다.
여수항 개항 : 1923년
마래터널 : 1926년 완공
철도 여수~광주 개통 : 1930년
오동도 방파제 착공 : 1935년
신항일대 매립 : 1936년
14연대반란사건 :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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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로 여행갈 때에는 만성리에서 마래터널을 한번 다녀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