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나는 일본의 불법체류 노동자였다
강제출국 당해도 돈 떼일 걱정은 없었던 일본, 지금 한국은?
▲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청와대 앞에서 1년 넘게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재중동포 허병숙 할머니.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임금을 떼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 조호진
2004년에 2300만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했던 그는 2005년 7월 불법체류 자진신고 후 중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엊그제는 비슷한 사정의 조선족 동포가 체불임금을 받으러 오라는 업주의 연락을 받고 반가운 마음으로 공장을 찾았다가 역시 체포됐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강제 출국을 당할 것이고 체불 임금이나 전세금 같은 개인 사정은 하소연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을 고용한 업주나 세 들었던 집주인들이 제멋대로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게 아직도 우리의 현실이다. 이 착잡한 소식을 접하면서 18년 전 일이 떠올랐다.
18년 전, 나는 일본의 불법체류 노동자였다
18년 전, 난 일본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학 비자로 일본에 입국해서는 학교는 다니지 않고 사업 궁리만 하다가 6개월 시한이 지나버린 것이다.
사업 파트너로 나를 초청했던 회사에서 체류 비자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지만 나름의 사정으로 계속 미뤄졌다. 물론 거기엔 경험 없이 외국 사업 한번 해보려고 성급하게 대들었던 내 불찰도 한몫했다.
불안했던 마음은 곧바로 현실로 다가왔다. 어느 날 새벽녘, 갑자기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다짜고짜 여권을 보여 달란다.
"누구시죠?"
"출입국관리소에서 나왔습니다."
"......"
그렇게 나는 체포됐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출입국 관리소 시설에서 머무르게 됐다. 걱정과는 달리 시설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시설 안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직원들도 대단히 친절했다. '감옥 같은 엄격한 시설이 아닐까'하며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금세 안심이 됐다.
닭싸움, 카드놀이... 여기가 보호소야 놀이터야?
▲ 2007년 2월 27명의 사상자를 낸 여수보호소 참사를 기억하는가? 18년 전 내가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일본의 보호소는 화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내가 들었던 방에는 수개월째 장기 투숙(?)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국적은 다양했지만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에 있던 그들은 서로에게 너그럽고 따뜻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과 함께 지냈던 그 일주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입소하자마자 답답한 나머지 줄담배를 태우다가 담배가 떨어진 내게 선뜻 담배를 내밀던 이란인 핫산 아저씨. 내 한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어떻게든 알아내기 위해 '과격하도록' 친절함을 베풀었던 중국인 청년 세 명.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만 되면 자리를 펴고 알라께 기도하던 말레이시아인 아저씨.
내가 구두 관계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자기 나라에 가죽이 많으니 거래를 트자고 끈질기게 조르던 방글라데시인 젊은이. 5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던 버마의 잘 생긴 '마웅 텐 오'라는 이름의 청년.
비자 만기가 되지도 않았는데 잡혀왔다며 계속 투덜대던 고등학교 선생 출신의 온두라스인 남자. 매일 같이 일본인 애인에게 일본말을 소리나는 대로 영문(로마자)로 표기해 편지를 쓰던 아프리카 출신의 청년 등. 당연하게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우리는 각자의 사정 이야기를 듣다가 울적해지면 그 널찍한 다다미방에서 별 일을 다 벌였다.
각 나라 대항 넓이뛰기, 커피내기 닭싸움, 컵라면 내기 포커게임, 페르시안 식 씨름놀이, 중국식 카드놀이, 각 나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먼저 외우기, 자기 나라 글자 가르쳐 주기, 복도 쪽 창살에 매달려서 지나가는 관리소 직원 골려 주기.
강제출국 당해도 돈 떼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사정은 하나 같이 암담했다. 중국인 청년들은 거금을 들여 일본에 밀입국해 돌아가는 절차가 복잡했다. 게다가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제 출국을 당하게 돼서 밀입국에 든 비용(빚)을 어떻게 갚을지 막막한 사람들이었다.
이란인 아저씨는 팔레비 왕 시절 고위 공무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슬람 혁명체제가 들어선 이후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결석재판에서였다. 그 후 그는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3개월 넘게 일본 출입국 관리소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늘 쾌활하고 온정이 넘쳤다. 그래서 사람들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매일 기도에 열심이었던 말레이시아인 아저씨는 당장 16명이나 되는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가 걱정이었다. 그 역시 돈 좀 벌어 보겠다고 일본에 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불법체류자로 잡혔기 때문이다. 그 외 사람들도 대개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도 그들은 돈을 떼이지는 않았다. 일단 출입국 관리소에 들어오면 조사를 받는데 아직 받지 못한 임금이나 특별히 연락해야 할 곳이 있다면 관리소 직원들이 성심껏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최소한 각자 일하던 일본 업주들에게 받아야 하는 돈은 모두 받아 놓고 있었다.
일본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한결같이 이주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한다. 예를 들어 업주와 이주노동자들의 주장이 엇갈리면 가능한 한 이주노동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일처리도 무척 신속했는데 아마도 강제출국 당하게 된 외국인들에게 그런 일로 더 큰 원망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18년 전 내가 보았던 일본 출입국 관리소 풍경은 지금 한국에 있는 불법체류자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느니, 한류 바람을 타고 문화를 수출한다느니, 여기저기에서 긍지에 찬 소리로 가득한 주위에 휩싸여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에 소홀하거나 무관심하다. 개혁은 크고 거창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변화해갈 때 더 큰 개혁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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