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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싱글시대 6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등록|2008.01.23 13:32 수정|2008.01.23 13:32
눈 내리는 날의 마지막 포옹

그런데, 그해 12월이 다 가기 전에 예희를 잊게 만들어 주는 한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납니다. 어느 날, 생산직 여사원 신체검사 때의 일입니다. 거래하고 있는 종합병원에서였습니다. 신체검사장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내 앞으로 한 면접 합격자가 다가왔습니다.

“저어….”

작고 예쁘장한 소녀였습니다.

“왜 나왔나요?”

나의 물음에 소녀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도 합격할 수 있을까요?”
“….”
“실은 말이죠….”

소녀는 막상 이야기하기가 난감한 지 머뭇거렸습니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안색으로 보아서는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피가 나왔거든요.”

나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코피를 흘렸다고 말할 리는 없겠지요. 어떤 특정한 부위에서 피를 흘렸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어디서 피가?”
“저어….”

소녀는 또다시 머뭇거렸습니다. 말하기 곤란한 부위일까 하고 내가 생각했을 때 소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부끄러운 데서요.”

나는 그 소녀가 하혈(下血)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그제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여자들한테는 그게 생리적인 현상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나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습니다.

“아팠던 거예요. 그래서 이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는데요.”
“아직도 아파요?”
“아뇨. 지금은 다 나았지만 괜히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때 아팠었기 때문에 신체검사가 안 좋게 나올까 봐.”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좋아요.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한 명 꼴인데, 그것도 폐결핵 같은 전염성이 있는 병에 걸렸거나 고혈압처럼 일하는 데 지장이 있는 경우만 해당되니까.”
“그래도 전….”
“글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소녀의 표정이 다소 밝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저어…, 저한테 커피 한 잔 사주시면 안 돼요?”

나는 소녀의 당돌함에 다소 놀랐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귀염성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거절하기는 싫었습니다.

“우선 신체검사를 받아요. 받고 나서 병원 옆에 있는 다방으로 오도록 해요. 커피라면 두 잔도 사줄 수 있으니까.”

소녀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인사를 꾸벅 하고서 신체검사장으로 들어가다가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아는 모양인지 눈인사를 했습니다. 소녀가 신체검사장으로 들어가고 나자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소녀가 이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나요?”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디가 아파서요?”
“음….”

간호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자살을 기도했었대요.”
“….”

나는 할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깜찍하게 생긴 소녀가 자살을 기도하다니….

“제가 얘기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서 간호사는 자기 일을 보러 갔습니다. 어느덧 신체검사가 끝났고, 다방 안으로 소녀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는 소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녀는 사뿐히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 꼭 합격시켜 주셔야 돼요.”

나는 대답대신 씨깅 웃어 보였지만, 떨어질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저씨 성함은 어떻게 되죠?”

나는 성함이라는 단어가 깜찍한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물 밖에 안 된 내가 아저씨라는 말을 듣는 것도 어색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봐요.”
“왜요?”
“이렇게 말예요. 오빠 이름은 어떻게 되죠?”

소녀는 활짝 웃어보이고는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후훗. 그럼 오라버니 이름은 어떻게 되죠?”
“문욱.”
“어머, 멋있어요!”
“그런 셈이지요, 뭐.”

나는 이미 이력서를 주의깊게 살펴본 터라 소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이제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인 열 여섯. 이름은….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제 이름은 민영이에요, 한민영.”
“예쁜 이름이군요.”
“문욱과 한민영의 만남.”

민영이 깜찍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다방 여종업원이 다가오자 내가 물었습니다.

“참, 뭐 먹을래요?”
“잊으셨어요? 커피 사달라고 했잖아요.”
“한 잔?”
“두 잔 먹어도 돼요?”
“아무렴요.”

나는 다방 여종업원에게 커피 석 잔을 시켰다. 그러고서 물었다.

“왜 몸에도 안 좋은 걸 두 잔씩이나?”
“따뜻하니까요.”
“….”

“아저씨… 아니, 오빠도 커피만큼이나 따뜻한 분인 것 같아요. 목소리도 참 따뜻하고.”
“겨우 커피만큼?”
“아유, 오빠두….”

나와 민영은 서로 마주보며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뭘 했나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테이블 위에 커피 석 잔이 놓였습니다.

“참… 말씀 놓으세요.”
“…그, 그러지 뭐.”

나도 그러는 게 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학교는 안 다니고?”
“고등학교 다니다가 그만두었어요. 공부하기가 싫어졌거든요.”
“그런데 왜 취직을?”
“돈을 벌고 싶어서요.”
“집이 어렵니?”
“….”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들자, 나는 괜한 걸 물어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민영은 입을 열었습니다.

“용돈이라도 마음대로 쓰고 싶어서요. 아빠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뒤로 집안이 어렵게 됐어요.”

뜻밖이었습니다.

“다른 가족은 없니?”
“엄마랑은 떨어져 살아요. 오빠가 있는데 맨날 어두운 방안에만 묻혀 살구요.”

나는 민영의 가족 이야기가 마치 꾸며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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