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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싱글시대 7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등록|2008.01.23 19:57 수정|2008.01.23 19:57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민영을 나는 조금이라도 보살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민영이 생산직 여사원으로 합격한 뒤에도 자주 만나 주었습니다. 저녁 한 끼라도 사주며 대화하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둘 사이는 차츰 친남매처럼 가까워졌습니다.

항상 어둠속에서만 갇혀 지낸다는 민영의 오빠도 나오라고 해서 함께 만나보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 그렇게 어두운 관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세 사람은 웃으면서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나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문학을 하러 대학을 가겠다는 생각이 도진 것입니다. 퇴직원은 수리되지 않았지만, 나는 15일간 무단결근하면 퇴직원이 자동 수리된다는 인사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5일간의 결근을 감행했습니다. 결국은 S전기 총무과 인사담당의 직장 생활도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공해로 점점 우중충해져 가는 하늘에서 깨끗한 흰 눈이 내리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놀라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환경을 훼손시켜 놓고 있어도 자연은 언제나 신비스럽습니다.

자연스러운 만큼 마음 상쾌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민영을 만나는 나의 마음은 상쾌하지가 못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뭘 먹고 싶니?”

반짝반짝 빛나는 민영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라면.”
“하필?”
“비싼 거 먹어도 돼요?”
“응.”
“그럼… 자장면.”

나와 민영은 동시에 웃었습니다.

“가자, 중국집으로. 그 대신 자장면 말고 탕수육으로 먹는 거다.”

민영이 소리내어 웃자 뺨에 볼우물이 패였습니다. 탕수육을 먹고 중화요리집에서 나올 때는 눈이 더욱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빠, 탕수육 잘 먹었어요.”

아버지가 정치 입문에 실패한 뒤로 탕수육 같은 음식은 입에 대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던 모양입니다.

“좀 걸을까?” 
“좋아요, 오빠.”

눈길을 민영과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나는 민영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해줄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여주는 일은 너무 한가할 것 같았습니다. 음식은 이미 배가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역시 눈이 오는 거리를 함께 걷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습니다.

“이 눈이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일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꼭 마지막 눈이길 바라는 것 같아요.”
“아니,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느낌이란 현실보다 집요하게 다가올 때가 많았습니다.

“민영이는 어떤 눈을 좋아한다고 했지?”
“어떤 눈?”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오빠 눈을 더 좋아해요.”

웃어줘야 할 텐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 말야, 실은….”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엿보았던 걸까요? 민영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왜요, 오빠?”

하지만 민영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오빠, 무슨 일이 있어요?”

민영은 우뚝 멈추어 선 채 더 이상 걷지 않았습니다. 뚫어져라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찬바람이 민영의 눈빛과 함께 나의 뺨에 와 부딪쳤습니다. 찬바람처럼 민영의 눈빛마저 싸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차피 이야기는 해야 되겠기에…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실은… 나, 직장을 그만두게 됐어.”

민영의 안색이 확 바뀌었습니다. 어째서요… 민영은 말없이 묻고 있었습니다.

“대학엘 갈 거야. 대학엘 가려면 1년 동안 공부해야 될 테니까 직장에 매달려 있을 틈이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꼭 대학엘 가야 해요, 오빠?”
“나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야.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장래의 위대한 작가’라고 적혀진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다녔을 정도야. 요즘들어 부쩍 그 꿈이 되살아난 거야.”
“1년만 미루면….”
“벌써 사직서가 수리됐어. 나는 오늘 부로 직장을 그만둔 몸이야.”

민영의 모습은 곧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오빠가 없으면 난 어떡해요? 즐거움이란 게 없어져 버릴 거예요.”
“하지만 아주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여긴 지방이에요. 오빠는 직장을 그만두었으니까 서울로 올라가 있을 거 아니에요?"
“가끔씩 만나면 되잖아. 우선 다음 주 토요일날 내려올 거야. 과에서 송별회를 해준다고 했으니까. 그날 만나자. 우리가 처음 만난 다방에서. 몇 시가 좋을까?”
“….”       

“그날 근무가 어떻게 되지?”
“아침에 내려올 수 있어요? 오전 열 시쯤.”
“민영이 근무는 어떡하고?”
“나도 그만둘 거예요. 오빠가 없는데 회사에 나가면 기분만 이상할 거예요.”
“….”

“그런데 오빠….”
“응?”
“만일 그날… 내가 못 나오면….”
“못 나오면?”
“내가 죽었는 줄 아세요. 그 동안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그러고서 민영은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입장에선 조금도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안 들은 걸로 해둬요, 오빠.”
“대관절….”
“그리구 오빠… 저한테 소원이 한 가지 있어요.”
“소원?”
“….”

“왜 말이 없니?”
“후훗.”
“웃기는 소원이니?”
“웃기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오빠한테 꼬옥 안겨 보고 싶어요, 꼬옥.”

포옹이란, 말이 앞서서 이루어지는 법이 드뭅니다.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민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껴안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포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한 포옹이 이별의 선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약속한 그날 그 시각에, 민영은 처음 만났던 다방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S전기에 다니고 있다면 그녀가 다니던 생산부서 서무를 통하여 알아보겠지만 내가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눈 내리는 날 헤어질 때, 민영의 집 연락처를 물어두지 않은 게 후회되었습니다. 약속한 날 나오면 물어두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던 겁니다. 오직 그녀에게 ‘죽음’이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S전기 직장 생활은 1980년 3월에서 1981년 1월까지 11개월에 걸쳐 막을 내렸지만, 예희도 민영도 모두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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