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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묻지 않겠다?

정부조직개편의 유탄 맞은 과거청산

등록|2008.01.24 08:19 수정|2008.01.24 09:35
재미없는 세상에 ‘재미있는’ 구경거리 하나가 생겼다. 이명박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다. 오늘은 또 어떤 엉뚱한 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나 지켜보는 낙도 제법 쏠쏠하다.

이들은 결코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 빨라지는 세태에 걸맞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시간 단위로 ‘웃겨준다.’ 경제는 물론 교육·행정·통일·여성·문화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종횡무진하며 ‘웃겨주니’ 세상의 온갖 일에 관심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겐 정말 제격인 ‘엔터테이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별종이다. 세상만사가 경제와 경쟁과 시장으로 다 통한다는 사고는 어디에서 배웠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다. 경쟁이 지나치면 신경줄이 끊어져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고 시장이 지나치면 그 파편과 쓰레기가 세상에 넘쳐 세상이 사람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유구한 진리도 이들만은 아마 비껴가는 모양이다.

종횡무진 '웃겨주는' 인수위

고작 30%의 표를 얻고 신의 부름을 받은 양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꼴이 아무래도 오래 못 갈 것 같다. 무리만 하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가 당분간은 순항할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새판 짜느라 바쁘신 분들의 귀에 들어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 순항의 절대조건인 세계경제의 흐름은 새해 벽두부터 요동치고 있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문단속부터 하는 게 순리거늘 온 국민이 영어의 달인이 되어 해외로, 해외로 뻗어나가잔다. 세계의 흐름은 이미 문단속을 강화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한국인만은 무슨 신통한 외계인이라고 전세계인이 쌍수 들고 환영할까?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게서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매사가 임기응변식 땜질과 처방이다.

어차피 살기 힘든 세상, 어떻게든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민초들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막연한 심정으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리더보다는 정신없이 들었다놨다하는 리더가 적어도 당분간은 안심을 준다. 최소한 놀지 않고 일은 하는 것 같아 보이니까.

그러나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최근 세계경제의 흐름에 비추어본 인수위의 처방으로는 아마 기업도, 가진 자들도 제대로 먹여살리기 힘들 것 같다. 그 ‘트리클 다운’ (정부의 재정지출은 대기업을 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이론) 효과는 최상층 국민 단 몇 퍼센트와 외국투기자본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후순위인 민초들 걱정은 아마 생색을 내려 들겠지만 미처 할 틈이 없을 것 같다. 도덕이 밥먹여주냐며 다른 건 다 접어두고 경제라도 살려보라는 것이 이명박 찍은 국민들의 바람이었는데, 요즘 하는 꼴을 보니 일년도 안 돼서 쪽박마저 깨겠다.

경제·경쟁·시장 외 다른 가치들은 모조리 찬밥 신세

한편, 경제, 경제, 경쟁, 경쟁, 시장, 시장 하는 사이에 다른 모든 가치들은 모조리 찬밥신세다. 경제와 경쟁과 시장이 빚어내는 천박함을 감싸안으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모든 가치들은 완전히 뒷방신세다. 지혜롭게 사는 것, 바르게 사는 것, 더불어 사는 것을 가능케 함으로써 인간사회를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모든 가치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역사의 교훈에서 배우는 자는 흥하고 못 배우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이토록 인간의 삶에 무지하고 역사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들이 마치 세상이 제것인 양 다중 환시하에 마이크 잡고 어깨 힘주고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들이 ‘신의 계시’를 받아 국민의 동의 과정도 생략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정부조직개편의 유탄을 맞은 것 중 하나가 과거청산이다. 반백년 만에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 책임을 다하는 나라의 초석을 놓을 목적으로 설립된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이른 시일 내에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사의 많은 일들이 이제야 한창 정리되고 있는 판에 문제가 아니 되는 영역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이제 먹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국가 차원의 전쟁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작업은 날개도 펴지 못한 채 압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현재 민간인학살 조사를 맡고 있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진척 상황은 겨우 10퍼센트 수준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목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이렇게 무참하게 사람을 죽이지는 말자는 것,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학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권사회의 초석을 다지자는 것이었다.

전쟁범죄가 먼 나라 남의 일만이던가?

반인륜적인 극악한 범죄 행위가 저 먼 나라의 유태인 학살이나 우간다, 난징만이 아니라 반백년 전 바로 이곳 한반도의 마을 곳곳에서 광범하게 자행됐음을 확인하면서 그런 처참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성찰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여러 여건의 불비로 말미암아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작업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가 1차 활동기한인 2년 후까지로 제약될 경우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시간에 쫓긴 졸속 조사와 발표는 역사의 또 다른 왜곡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마저도 일부 사건의 조사에 그쳐 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혀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역사의 교훈을 얻는다는 본래의 취지는 물건너가기 십상이다.

게다가 국무총리 산하의 국무조정실이 총리실로 통합되면서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 처리를 관장할 권고처리기획단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최악의 경우 국가가 애써 조사를 하여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웃지 못할 직무유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과거는 묻지 말라고?

1월 24일 오후 2시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추모식에서 그동안 미루어져온 대통령 사과가 있을 예정이란다. 각 부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 책임자인 대통령이 영상 메시지를 통해 과거 국가 공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한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는 정말 뜻깊은 일이지만 차기 정부의 방침을 접하고 난 지금 만시지탄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참여정부의 최대 치적이 될 뻔했던 과거청산이 난항을 겪은 것도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와 미지근한 지원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진상규명의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데 그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이 나라를 새로운 반석 위에 올려놓는 든든한 기지와 진지가 됐어야 하는데 시종일관 제도와 규정, 예산만을 강조하는 관료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면서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압살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누가 고삐를 틀어쥐고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인가? 역사의 참담한 교훈을 땅 속에 되묻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과거는 묻지 말라는 식의 이명박 정부에 역사의 교훈을 똑똑히 들려줄 방법은 무엇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예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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