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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여사 갤러리'에 이미 접근했던 두 도둑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의 의미를 되살린 삼성 비자금 사건

등록|2008.01.24 20:28 수정|2008.01.25 10:45
특검이 삼성가(家) '홍 여사'의 갤러리에서 그림 찾기에 혈안이다. 일각에서는 특검이 그림을 확보해 놓고도 공개시점과 수위를 놓고 고심 중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삼성가의 갤러리가 경기도에 한두 개가 아니라고도 한다. 삼성과 특검이 힘겨루기와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고가의 그림 30여점의 행방이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삼성가 미술품의 근저에 다가선 이들이 있었다. 비록 이 그림의 값어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고스란히 놔둔 채 덜미를 잡히긴 했지만. 도널드 주드의 1980년 산 <무제>를 털려 했던 '더 늙은 도둑'과 '덜 늙은 도둑'이 주인공인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 이야기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했던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목전에 둔 2008년. 날카로운 풍자극에서 배우들의 개인기가 돋보이는 코미디로 탈바꿈한 <늘근도둑 이야기>의 의미를 삼성과 '홍여사'가 되살릴 줄이야.

녹슬지 않은 풍자의 칼날과 코미디 사이

▲ <늘근도둑 이야기> 포스터 ⓒ 연극열전

사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는 '대학로의 간장게장'으로 불러도 무방할 스테디셀러다. 맛깔 나는 풍자극으로 유명한 극단 '차이무'의 이상우가 극본과 연출을 맡고 강신일과 문성근이 출연한 <늙은도둑 이야기>이라는 제목으로 초연한 것이 1989년 4월.

이후 김영삼 정권이던 1996년과 1997년,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막집권한 2003년까지 명계남, 박광정, 유오성, 정은표, 이대연, 박철민, 최덕문 등 연극판의 실력파 배우들이 거쳐 가며 매진사례를 일궈낸 바 있다.

특히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명계남이 '더 늙은 도둑'으로 두 번째 출연했던 4번째 작품을 관람해 화제를 모았다. 절대 권력인 '그 분'을 가감 없이 풍자하는 이 작품을 보고 대통령이 파안대소 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이 연출을 맡은 2008년의 <늘근도둑 이야기>.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극의 구조는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다. 도둑질과 사기로 평생을 살아 온 두 노인이 한밤 중, 고가의 미술품이 즐비한 '그 분'의 집에 잠입했다 경비견에게 들켜 붙잡힌다는 내용. 주요 공간도 '그 분' 저택 거실과 취조실 단 두 곳이요, 주요 등장인물도 수사관까지 합이 셋이다. 그러나 이 단출한 연극의 힘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언중유골'의 매력에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가 대통령을 여덟 분 다 모신 도둑놈이야. 이승만 때는 미군부대 전문적으로 털어먹고, 박정희 때는 금고 전문가로 데뷔해 가지고 전국 수사기관에서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최규하 때는 꿈에 떡 맛보듯 지나가서 내가 제대로 못 모셨어. 전두환 때는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전국의 부잣집 금고만 털어먹었지. 노태우 때, 김영삼 때, 김대중 때는 죽 안(감방)에 들어가 있었다고!" '더 늙은 도둑'의 걸쭉한 입담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사들은 '절대 권력'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 <늘근도둑 이야기>의 박철민(왼쪽)과 박원상 ⓒ 연극열전


이 정도는 약과다. 금고 털이의 수익을 몇 대 몇으로 나눌까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덜 늙은 도둑'은 이제 그만 헤어지자며 이렇게 외친다. "YS랑 DJ도 헤어지고, 노무현, 정몽준도 헤어지고, 국현이랑 DY는 만나지도 않았어! 인제는 인제, 인제 안돼!" 또, 신윤복 선생과 '학교' 생활을 함께 했다는 더 늙은 도둑이 그의 저서를 '학교로부터의 사색'이라고 바꿔 부른다거나, 시대에 맞게 원더걸스의 '텔 미'로 슬랩스틱을 이끌어내는 식이다. 동시대에 대한 풍자와 함께 젊은 관객들과의 호흡도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심지어 이 풍자의 칼은 <화려한 휴가>로 8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연출가 김지훈조차 피할 수 없다. "전직 대통령 아들 중 몇 명이 학교에 갔다 온 줄 아나? 홍업이, 홍걸이, 현철이도 다 갔다 왔다, 자고로 크게 되려면 별을 달아야 한다"고 비꼰다. 그리고는 "<씨네21>이란 잡지를 보면 <화려한 휴가>가 별을 두 개 받았다, 그 감독은 아직도 세 번이나 더 갔다 와야 한다"고 농을 친다.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던 '더 늙은 도둑' 박원상과 '덜 늙은 도둑' 박철민과의 관계를 떠 올린다면 한 번 더 웃을 수 있는 연출인 셈이다.

우리 시대의 '그 분'은 삼성?

<늘근도둑 이야기>를 보며 삼성을 떠올린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누군지 모를 권력자의 집안에 떡 하니 걸린 미술품들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90억을 호가한다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과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이 가장 큰 이슈다. 연극 속 '그 분'의 소장 목록은 현실과 일치하는 주드의 '무제'를 필두로, 피카소의 '여인의 머리', 막스 에른스트의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등이다. 팝 아트와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는 '홍 여사'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진다. 1980년대의 끝자락 노태우 정권 때 극본을 썼던 연출가 이상무는 이런 취향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하필 1980년에 완성된 '무제'라는 작품이 일치하는 건 우연이라고 치자. 그리고 <늘근도둑 이야기>가 80, 90년대만큼 강력한 풍자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이 '못해먹겠다'고 읍소하는, '반미'가 '용미'로 변모해야 된다는, 1980년 5월 광주를 대중 영화로 소비하는 시대에 '절대 권력'과 정치인들에 대한 비아냥은 이제 인터넷 상의 일상이 되지 않았던가. 

▲ <늘근도둑 이야기>의 취조실 장면 ⓒ 연극열전


하지만 요즘 현실은 돌아보자. 한화 김승연 사장의 폭력사건에서 보듯 초현실적이고 영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상황이 버젓이 일어나는 대한민국 아니던가. 연극 속에서 수사관은 "도대체 거기가 어딘 줄 알았느냐, '그 분'이 누구인 줄 알고는 있느냐"며 다그친다. 거대한 금고를 감춰놓고, 세계적인 명화를 컬렉션 해 놓은 '그 분'은 물론 독재자와 권력에 대한 풍자다. 이는 노태우와 김영삼 정권에 이 풍자극이 무대에 올려졌을 때 더더욱 선명하게 다가왔으리라.

역사는 돌고 돈다. 현명한 이들은 그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고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2008년에 '실향민'인 '더 늙은 도둑'과 '광주' 출신 '덜 늙은 도둑'이 벌이는 풍자극 <늘근도둑 이야기>를 보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불분명한 절대 권력은 이제 시장과 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그 분'이 '무제'를 몰래 소유하고 있던 '그 분'들일지 모른다는 것. 코미디로 변모한 <늘근 도둑 이야기>의 의미를 되살려준 것은 삼성과 '홍 여사', 다름 아닌 그대들이다.
덧붙이는 글 '연극열전'의 두번째 작품인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는 3월 9일까지 사다리아트센터 동그라미극장에서 상연된다. '더 늙은 도둑'은 박원상, 유형관이, '덜 늙은 도둑'은 박철민, 정경호가 더블 캐스팅 됐으며, '수사관' 역은 최덕문이 연기한다.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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