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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화와 곰신'의 미래, 곰신에게 달려있다?

'곰신의 지조'에만 초점 맞추는 '군대 간 남친 기다리기' 서사

등록|2008.01.27 10:51 수정|2008.01.29 11:07
얼마 전, 군 입대로 인해 생이별을 하게 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기다리다 미쳐>가 개봉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만 하는 군대. 2년이란 시간을 홀로 기다려야 하는 '곰신'(남자친구가 군인인 여자, '고무신'의 줄임말)들의 이야기도, 행여나 여자 친구의 마음이 변할까 애태우는 '군화'(군인인 남자)들의 이야기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만한 소재였다.

군 입대는 연인들에게 크나 큰 장애물이다. 혈기왕성한 20대, 하루 24시간을 붙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영화 제목처럼 (제대할 때까지) '기다리다 미쳐'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군 입대 이후에도 사랑을 이어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에 출연했던 장희진, 한여름, 김산호는 군 입대 이후에 연인과 헤어진 경험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기다리다 미쳐>군입대 후 연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영화 홈페이지


내가 '곰신'이었을 때

나에게도 '곰신' 시절이 있었다. 2005년 8월,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낼 때 난 참 많이도 울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는 동안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어차피 군대 가면 다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미련하게 기다리지 말고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한편 남자친구는 군 생활 내내 선임들, 친구들, 가족들로부터 "여자 친구가 변심하면 어쩌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2006년 2월, 나는 9개월 동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생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그 동안 면회, 외출, 휴가 등을 통해서 잠깐이나마 볼 수 있던 것마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외에도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2007년 8월, 마침내 나는 '곰신'이 아니라 '꽃신' ('꽃신'은 남자친구가 전역할 때까지 기다린 '곰신'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게 "기다릴 거야?"..."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어떻게 2년이나 기다렸냐?"고 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나는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헤어지느냐, 마느냐... '칼자루'는 여자가 쥐고 있다?

'2년 동안 한 눈팔지 않고 기다리겠다며 훈련소 앞에서 울고불고 맹세했지만 결국엔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 여자의 배신에 괴로워하는 불쌍한 남자.' 사람들이 '군 입대 후 연인관계'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일 것이다. '군대간 남친 기다리기'서사에서 군 입대 후에도 연인관계가 지속되느냐 마느냐의 칼자루는 여자가 쥐고 있다.

군대간 남자친구 버리지 마세요사진에 '비오는 날 전화부스 속에서 한참이나 떠나지 못한 건 누구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라고 적혀있다. ⓒ 다음 블로그


'군 입대 후에도 연애는 계속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군대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다' 라는 말의 뉘앙스는 마치 '전쟁터로 떠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연인이라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목소리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군 입대 후 커플 사이에는 그러한 관계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군대라는 벽 때문에 군대 밖에 있는 것처럼 자주 만나고 또 자주 연락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전화로, 편지로 혹은 잠깐 동안의 만남으로 우리의 연인관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했기 때문에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군 입대 후에  나와 남자친구가 '함께' 군대라는 제약 없이 연애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면 말이 되겠지만, 나 혼자 기다린 것은 아니다.

"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고 있다"

또한 나는 '군화만을 바라보며 기다린 곰신'도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9개월간의 외국생활을 포함해서 하루하루 바쁘게 '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와의 연애도 그러한 '나의 삶'의 일부였다.  

2008년 7월에 남자친구의 전역을 앞두고 있는 김모씨(24)는 요즘 취업준비로 바쁘다. 남자친구가 상근으로 복무하고 있는 그녀는 "요즘 세상에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여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여자들도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학 시절 꾸준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고 있다. 기다린다는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2년 동안 기다릴게", 어떻게 확신해?

나는 전역까지 기다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군대 밖에서도 2년 동안 사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2년이라는 군 생활 동안 둘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2년 동안 기다릴게"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군생활도 힘든데 헤어지자고 말하는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서?

수년전 화제가 되었던 '김제동 어록'에는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남자친구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랑스러운 남자친구를 내 조국에 임대해주었다고 생각하고, 나도 같이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을 하면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군대간 남친 기다리기'서사 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남자가 군대에 간 것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간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여자가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군 입대 후에도 연애는 계속되고 있으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자만 안 흔들리면 되는 걸까?

'여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말 역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자는 '군대'라는 특수한 사회에 속해 있고 다른 이성과 만날 기회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마음이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군대에 있는 남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를 '군화 거꾸로 신는다'고 한다.

군 입대 후에도 '연인관계가 지속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여자에게만 달려 있는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군대간 남친 기다리기'서사에는 그러한 관계성은 결여된 채 '한 눈 파느냐, 지조를 지키느냐'의 기로에 선 '곰신'만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꽃신'이 되었을 때

남자친구가 전역한 후 내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은 "대단하다"라는 말과 "어쩌다 보니 기다려진 거 아냐?"라는 말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역시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2년 동안 헤어지지 않은 것은 내가 대단해서도 혹은 못나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간 남자친구가 전역을 하게 되면, 여자의 지조에 초점을 맞추던 '군대간 남친 기다리기' 서사는 전환점을 맞는다. 2년 동안 제대로 사귀지도 못했으면서 끝까지 기다리다니...한마디로 '여자가 못났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7월, 개그맨 김인석은 KBS 폭소클럽에서 했던 '곰신 비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김인석 : 그런데요. 남자들이 생각할 때 100점짜리 여자친구가 있고 0점짜리 여자친구가 있어요.
...
김인석 : 남자친구가 군대를 가잖아요. 100점짜리 여자친구는 울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야. 걱정하지마. 내가 기다릴게" 
... 
김인석 : 근데, 빵점짜리 여자친구는... 진짜로 기다려.
김인석 : 빵점이야! 왜 기다려? 어? 공군 갔다와도 그래. 공군은 1년이 더 긴데  공군 갔다와도 기다리는 애들 있어. 왜 그러는 거야. 없어 보여. 없어 보여. 하지마 기다리지마. 빵점이야.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를 배신하는 여자는 '지조없는 여자'가 되고, 끝까지 기다리는 여자는 '빵점짜리 여자'가 된다. 2년 동안 이 커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군대간 남친 기다리기'서사에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혹은 기다리지 않는 여자만이 있을 뿐이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는 100쌍의 커플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100개의 사랑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곰신과 군화'의 이야기는 각 커플이 처해 있는 상황 차이는 고려하지 않은 채 '곰신의 지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떠한 만남도 일방적인 것은 없으며, 특히 연인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긴 시간 지속되기 힘들다. 군 입대 후 연인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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