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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싱글시대 12

대학에 입학하고 2년간

등록|2008.01.27 11:47 수정|2008.01.27 11:47
우리는 연인이었을까?

이미 직장 생활을 하던 때부터 유흥업소 출입을 통해서 얼굴과 몸매를 무기로 삼아 장사를 하는 여자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나는, 성적(性的) 매력이 없는 여성들에게서는 조금도 이성(異性)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의 눈은 문예창작과생이 아닌 공연과 학생들에게로 가 있었습니다. 연극과나 영화과나 방송연예과나 무용과 학생들은 레스토랑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도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일 만큼 빼어난 성적 매력을 대부분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예창작과 동기생들 가운데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굳이 들자면 이민정이라는 여자를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등학교 때 무용 공부를 한 데서 비롯되었을 날씬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클래스의 마스코트라 불릴 정도로 너무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지 이성(異性)이라는 느낌은 역시 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성민경이 접근하던 시절의 1학년 1학기에는 이미 결혼한 사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유롭게 나와 키스를 주고받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과(日課)의 하나인 것처럼 키싱 버그에 취해 있었으며 아예 키싱 버그가 되어 있었습니다. 키싱 버그(kissing bug)란 키스하는 곤충을 말하는 게 아니라 끔찍하게도 침노린재류의 흡혈(吸血) 곤충을 말합니다. 그러나 키스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비유하여 일컫기도 합니다.

퇴계로 2가에 위치한 어느 작은 공간, 그러니까 대연각 빌딩 맞은편의 대로변에 ‘겨울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룸카페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아가씨가 시중드는 술집으로 변신하는, 그러나 낮에는 커피를 취급하는 작은 공간. 그곳에는 초희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주는 분위기처럼 가냘픈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맨처음 그 공간, 그리고 그곳의 한 작은 룸 안으로 들어간 것은 내가 S예술대학에 원서를 접수시키러 퇴계로 2가에 나타난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민경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S예술대학이 터잡고 있는 남산 중턱으로 향하기 이전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다방에는 어쩐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밤에는 아가씨가 시중드는 술집으로 변신하는, 그러나 낮에는 커피를 취급할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공간 ‘겨울숲’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커튼이 쳐져 있는 룸 안으로 들어가 앉자, 20대 중반쯤 되었을 여자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뭐 드실래요?”
여종업원의 얼굴과 몸은 야윈 편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커피 됩니까?”
“예.”
커피를 팔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커피 한 잔.”
“한 잔만요?”
“아가씨도 한 잔 하고 싶소?”
나는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점잖게 말했습니다.
“같이 한 잔 했음 좋겠어요.”
“그럽시다.”

그녀는 룸 안으로 커피를 가지고 들어와서 탁자 위에 놓고는 커튼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나의 맞은편도 아닌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프림, 설탕 각각 몇 스푼 넣어 드려요?”
“둘 둘.”
“후후후.”
그 웃음소리에는 남성의 가슴을 녹여주는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어찌 되오?”
스푼을 젓고 있는 여종업원의 눈매를 훔쳐보며 내가 물었습니다. 계란형의 다소 까무잡잡한 얼굴에 살짝 쌍꺼풀진 그녀의 눈은 제법 크고 검었으며 또한 귀염성마저 있었습니다.
“초희예요.”
“난초 같은 그대의 이미지에 꼭 맞는 이름이군요.”
“후후후, 좋아요?”
“너무 좋군요.”
“후후후.”
깨가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때 넉넉한 몸매의 여주인이 커튼 틈바구니로 슬쩍 엿보았습니다.

“처음 오신 것 같아요.”
여주인의 엿보기에 개의치 않고 그녀가 물어왔습니다. 둔부가 접촉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여서 그녀의 입김이 나의 콧속으로 스며들어왔습니다. 향긋했습니다.
“그렇소. 처음이오.”
“반가워요.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녀는 나에게 커피잔을 내밀고 자기 것을 젓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습니다. 커피맛은 그녀의 적당히 가무스름한 얼굴빛처럼, 그리고 초희라는 이름처럼 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커피잔도 먹빛이었습니다.

“커피맛이 참 좋소.”
“후후, 고마워요.”
정말 오랜만에 여자와 옆자리에 앉아 마셔보는 커피였습니다. 그래서 더 맛이 좋았던 것일까요?
그때 나의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명진, 예희, 민영… 그런 여자들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는 곧 질서를 잃고 뒤엉켰습니다.

“근데 손님은 뭐하는 분이세요?”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여자의 이름들을 쫓아내려고 하는 듯 그녀가 불쑥 물었습니다.
“간첩 같소?”
“후후후. 간첩? 후후후. 그렇담 신고해야겠죠?”

“음… 내 직업은…”
“…”
“초희가 보기에는 뭐 하는 사람 같소?”
“글쎄요… 화가 아니면 시인?”
“비슷한데.”
나는 거짓말을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소설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나는 자신의 직업을 속였던 것입니다. 직장을 그만 두고 대학의 문을 두들기는 별볼일없는 수험생이라는 말을 하기는 싫었습니다. 실업자나 재수생인 것을 여자들이 대개 싫어한다는 것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났을 때 이미 은행원인 주미현과 J서적 매장 여직원인 설현정이라는 두 여자를 통해서 익히 경험한 바였습니다.

“정말? 손님, 정말 소설가 맞아요?”
“그렇소.”
“어쩐지 분위기가 달랐어. 처음 들어오실 때부터.”
나는 진한 커피의 맛이 한결 진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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