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밤은 추웠고 노래소리는 깊어갔다
정선 가리왕산 집에 온 민중가수 손병휘와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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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겨울밤은 추웠고 노래소리는 깊어갔다겨울밤 산촌에서 열린 즉석 콘서트.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있는 가수 손병휘씨. ⓒ 강기희
손병휘. 그는 가슴이 따듯한 민중가수이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길을 가는 이와 서러운 세상에 대해 따끔한 말을 할 줄 아는 투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소탈하면서도 강하다. 이렇게 말하면 옆집 아저씨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의 얼굴은 해맑고 정신은 아직도 뜨거운 피를 토해내는 청춘이다.
그는 지난 금요일(25일) 오후, 통기타 하나 둘러메고 정선의 가리왕산 자락에 있는 집으로 왔다. 병휘씨와 함께온 이는 '체 게바라'라는 닉네님을 쓰는 역시 피가 뜨거운 남자 김영준씨.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아들 형규와 병휘씨를 차에 태우고 서울서 정선까지 왔다. 병휘씨는 하룻밤, 게바라씨는 이틀밤을 묵기로 한 여행길이었다.
▲ 즉석 콘서트.노래하는 병휘씨. 여행 길에서 머문 집에서 즉석 콘서트가 열렸다. 분위기가 좋아 다시 가고 싶다는 집. ⓒ 강기희
사람의 온도로 살아가는 집, 가수 병휘씨와 게바라씨 부자 오다
정선의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집 마당엔 눈이 설원처럼 깔려 있고, 눈은 몰려온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솔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얼음장이 꺼지듯 푹푹 빠지는 눈밭. 그들은 그 눈밭을 걸어 가리왕산에 있는 우리집으로 왔다.
게바라씨와 아들 형규는 가방을 풀자마자 땔나무를 해야 한다며 앞산 자락으로 올라갔다. 자신들이 머물 방에 군불을 지피기 위함이었다. 병휘씨는 추운지 방안을 서성이며 문 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이사를 한 터라 몸살 기운도 있다고 했다. 게바라씨는 병휘씨 이사를 도우면서 허리를 삐끗했다고 하니 겨울철 이사가 사람 잡은 셈이다.
이사를 왜 했냐고 하니 집주인이 나가라는데 별 수 있냐는 병휘씨. 그렇지. 주인이 나가라는데 버틸 재주는 없겠지. 허리 삐끗한 게바라씨, 끌고온 나무를 톱으로 베느라 절절 맨다. 아들 형규는 아비를 돕는다고 하지만 아직 도움이 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 때 산에 올라 나무를 했던 내 기억은 요즘 아이들에겐 옛날이야기도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뻥'일 뿐이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기라도 하는 게바라씨. 나무를 베고 도끼질을 하더니 이번엔 고장난 아궁이를 고친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고장난 아궁이는 어머니가 사용하던 방의 아궁이. 열흘 전쯤 고장났는데, 아들은 추위를 핑계 삼아 고치기를 미루고 있었다. 다른 방도 있으니 봄이 되면 고치리라 마음 먹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게바라씨. 마른 진흙을 용케 구해 물을 섞은 후 흙을 썩썩 갠다. 손이 시릴 법도 한데 그런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단다. 무너진 아궁이를 척척 잘도 고친다. 어머니는 게바라씨만 오면 아들을 밀어내고 이것저것 주문이 많다. 게바라씨 솜씨를 어머니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얼어 붙은 보일러까지 녹여낸 게바라씨는 아들과 눈이 가득한 마당에서 축구시합을 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들도 마찬가지. 눈밭을 뛰어 다니며 두 사람은 마냥 즐거워했다. 그 시간 병휘씨는 방에서 기타를 쳤다. 저녁 시간 어느 모임에서 작은 공연을 해야 하기에 손을 풀고 있는 것이다. 손이 시려 기타조차 어렵다는 정선의 날씨. 그 시간 그의 손을 뎁혀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방에선 기타소리가 나고 마당에선 공을 차면서 내는 아들과 아비의 거친 숨소리가 하모니처럼 잘도 어울린다. 세 개의 아궁이에선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촌의 집. 마을 사람 누군가 보면 '저 집에 잔치라도 벌이나' 할 왁자함. 날은 춥지만 사람의 온도로 살아가는 집의 겨울 날 오후 풍경이다.
다섯 사람이 있으면 다섯 사람의 온도로 끓고, 두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의 온도로 마음을 뎁히는 우리집. 가끔 어머니와 냉랭하게 다투다가도 마주 않으면 그 만큼의 온도로 사는 집. 산촌에 있어 사람의 온도보다 바깥 날씨가 더 추운 곳. 그러나 그런 추위를 견디며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운 사람 하나 찾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 톱질.아비는 톱질하고 아들은 도끼질하고. 에구 그러다 발등 찍는다. ⓒ 강기희
▲ 아들의 도끼질.큰 통나무를 톱질도 않고 도끼로 반쪽을 냈다. 대단한 부자지간. 나이 마흔에 얻은 아들이 아비를 가장 많이 닮았다. ⓒ 강기희
군불을 잔뜩 지펴놓고 읍내로 나갔다. 어둠은 산촌을 더욱 춥게 만들었고 모임 장소는 술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늘의 모임은 정선군농민회가 만든 자리. 올해의 투쟁기금을 만들기 위한 '일일주점'이 있는 날. 안면 있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술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시작되는 곳이라 병휘씨가 노래를 부를 형편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음향마저 준비되지 않은 터라 결국 공연은 포기하고 정만 나누기로 했다.
산촌에서 펼쳐진 작은 음악회, 뜻밖의 자리에 모두들 "우와~!"
병휘씨를 정선까지 초대한 것은 나였기에 미안함이 앞섰다. 지난해에도 병휘씨를 몇 차례 정선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오던 날은 이상하게도 음향이 문제가 있거나 객석은 텅 비었다. 그날도 기타는 꺼내지도 못한 채 술잔만 돌았다. 애초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선에서 술 한잔 하자고 했으니 그 약속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일주점과 같은 행사는 빨리 자리를 내어 주는 게 행사를 주최한 측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식사만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 집으로 돌아와 산촌의 밤을 보내리라 했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 정선문화연대 고문인 이도현씨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솟대를 깎으며 겨울을 나고 있는 그의 집은 거실에 연탄난로가 있어 추위는 면할 수 있었다.
일행은 술자리를 폈고, 병휘씨는 기타를 꺼냈다. 그는 '샤이를 마시며'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몇 곡의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보통의 가수들은 뒤풀이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병휘씨는 자리와 상관없이 함께한 사람들이 좋으면 장소와 관계없이 기타를 꺼냈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병휘씨는 울릉도의 어느 횟집에서도 밤새 노래를 불렀고, 설악산에 있는 만해마을 어느 방에서도 정태춘 박은옥 부부와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지난 해 여름엔 동강변에서 노래를 했고, 가을에는 우리 집에서 어머니를 앞자리에 모셔놓고 밤늦도록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내 작은 샤이 잔이 넘치게 따랐지요
한 잔 마시고 나면 다시 새 잔에 넘치게 따랐지요
맨발의 아이들이 뛰노는 골목 까페에서
붉은 노을에 샤이는 피 빛처럼 곱고 뜨거웠지요
아잔 소리마저 쓸쓸히 들리는 석양의 바그다드에서
당신의 마음은 뜨거운 샤이처럼 내 잔에 넘쳤지요
이 먼 사막나라까지 달려와 줘서 고맙다고
좋게 만나야 하는데 이렇게 만나게 한 저들이 밉다고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이년생 양고기 한 번 굽자고
당신은 담배 연기 날리며 또 샤이를 넘치게 따랐지요
아잔 소리마저 쓸쓸히 들리는 석양의 바그다드에서
당신의 마음은 뜨거운 샤이처럼 내 잔에 넘쳤지요
- 박노해 시 '샤이를 마시며' 작곡. 노래 손병휘
지난해 그는 '삶86'을 타이틀로 4집 앨범을 냈다. 86학번으로 대학 생활을 보낸 그에게 노래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노래한 세월만 해도 벌써 20여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민중들과 함께 했다. 즐거운 자리보다 가슴 아픈 자리를 더 많이 보고 살아온 병휘씨. 그는 지난 해 연말 자신을 좋아하는 펜들을 위해 콘서트도 열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뭇없이 슬퍼지다가도 이렇게 살아선 안 되지 하며 불끈 주먹을 쥐게 되는 힘이 있다.
낮에 눈밭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는 옆 방에서 잠이 들고, 겨울밤에 펼쳐진 작은 음악회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그 시간에도 바람은 휘몰아쳤고, 언 강은 자꾸만 제 몸을 두텁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 아궁이.고장난 아궁이를 고치는 게바라씨. 지켜본 바 도시 생활보다 시골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 강기희
▲ 트럭.제무시(GMC)라고 부르는 산판용 트럭. 산촌에 와야 만날 수 있는 귀한 차다. ⓒ 강기희
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노력으로 덥혀진 방은 엉덩이를 델 수도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게바라씨를 위해 또 다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코드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이라 할 이야기도 많고, 들을 이야기도 많은 자리가 이어졌다.
뒤바뀐 정권에 대한 걱정은 훌륭한 안주거리가 되었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인수위의 행태도 접시 위에 올려 놓았다. 앞날에 대한 토로와 걱정, 대책없는 진보라는 얼굴의 무딘 걸음들. 병휘씨와 나는 진보단체들이 새로운 포지티브를 찾지 않으면 모두가 공멸한다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새벽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산촌에 온 아이, 춥다며 식사도 안해 "아빠, 집에 가자 응?"
다음 날 아침, 병휘씨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으로 식사를 하면서 나물 반찬이 무척 맛있다는 소리를 몇 번이고 했다. 병휘씨가 맛있다고 한 나물은 어머니가 장터에서 팔기 위해 지난해 여름 내내 기른 피마자 잎, 아주까리라고도 하는 나물이다. 아들에게도 주지 않는 피마자 나물을 벗들이 온다고 해 어머니가 특별히 꺼내 놓았다. 아들도 그런 날이라야 얻어 먹을 수 있는 것이니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침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간 병휘씨는 기타를 둘러메고 가리왕산 자락을 빠져 나갔다. 서울에서의 공연 시간을 맞추기 위한 걸음에는 게바라씨가 버스터미널까지 동행했다. 병휘씨를 태워다 준 게바라씨는 잠시 후 돌아왔고 늦은 식사를 함께 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게바라씨의 아들 형규가 춥다며 아침식사도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밭을 뒹굴던 형규였다. 아이는 새파래진 입술을 하고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렸다.
집주인으로서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아이는 아비에게 집으로 돌아가자며 조르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만 해도 우리집에 놀러 가자며 떼를 쓰던 아이에게도 정선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기만 한 듯했다.
"그렇게 추워?"
"으휴, 이렇게 추운 건 처음이야."
아비의 물음에 아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도시의 겨울이 춥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어른이 생각해도 정선의 날씨는 추웠다. 어제의 정선 날씨는 영하 21.4도. 보통의 사람이 견디기엔 힘든 날씨임에는 틀림없었다.
읍내의 기온이 그 정도였으니 산촌에 있는 우리집은 그보다 더 기온이 내려갔을 것이다. 몸으로 느끼는 체감 온도를 따지면 영하 30도라고 우긴다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추위로 인해 눈덮인 산에 올라가기로 했던 계획은 취소했다. 형규를 데리고 산에 오른다는 것은 무리렸다. 대신 정선아라리의 발상지 중의 한 곳인 아우라지로 갔다. 그동안 게바라씨도 정선에 몇 차례 왔지만 아우라지를 간 것은 처음이었다.
눈과 얼음의 축제가 펼쳐지는 아우라지에서 아이의 언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눈썰매를 타면서 비로소 웃음을 보이는 아이에게 옛날엔 말이지, 하면서 '오줌을 누면 오줌발이 그대로 얼어 붙는다'는 말을 했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 아우라지 섶다리.게바라씨와 아들이 함께 걷는 길. 형규의 입에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 강기희
▲ 아우라지.눈 가득한 아우라지를 굽어보는 아우라지 처녀. 섶다리를 따라 걸으면 아우라지 처녀를 만날 수 있다. ⓒ 강기희
겨울엔 다시도 정선으로 오지 않을 것 같은 형규는 아비를 따라 오늘 아침 집으로 갔다. 날씨가 풀릴 것이라는 기상예보와 달리 정선의 아침은 여전히 영하 20도를 오르내리고 나무들은 어제도 오늘도 얼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추위에 놀란 아이, 이 추위가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자양분 되길
게바라씨의 차를 타고 모처럼 정선장터로 나간 어머니는 새벽 5시부터 우리의 잠을 깨웠고, 형규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좋아하며 2박 3일간의 추위에 대한 기억을 털어냈다. 차창에 내려앉은 서리꽃이 지워지기도 전에 게바라씨의 차는 눈으로 덮인 비룡동 마을을 떠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눈밭을 걸어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 여행의 끝에서 배운 것은 우습게도 '함부로 집 떠나는 게 아니다'였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집을 떠났다. 세상에는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그때 만났던 인연들이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바라씨의 아들 형규. 이번 여행에서 아이가 견딘 추위가 세상과 맞서는 날이 올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작은 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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