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수, 퇴출 정치인의 화려한 친정 귀환
한보사태 책임론→공천탈락→DJ정권 장관, 그리고 이명박정부 총리
▲ 새정부 첫 총리로 지명된 한승수 유엔기후변화 특사가 28일 오전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1. 2·18 대학살
2000년 2월 18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차떼기 당'의 오명을 씻기 위해 2004년 매각한 당시의 당사는 10층 건물 전체를 당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한나라당사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새벽부터 청원경찰들이 출입구를 비롯한 요소요소에 포진, 삼엄한 경계를 펴면서 출입자들의 신원을 일일이 체크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227개 선거구의 공천자를 확정하는 당무회의가 이날 오후 예정돼 있었던 것. 새벽부터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벌써 낌새를 느끼고 지지자들을 끌고 온 의원과 공천신청자들로 당사 주변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 2002년 10월 9일 한나라당에 복당한 한승수 의원이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 악수를 나누며 인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씨에게 패배한 뒤 총선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당시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씨가 던진 회심의 승부수였다. 구시대 정치인을 정리하고 과감한 '물갈이'를 통해 거듭 태어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한나라당 쪽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현역의원 약 4분의1을 탈락시킨 것이다. 국보위 입법위원 출신이며, 노태우 정권에서 민정당 공천을 받아 배지를 단 한승수 의원도 여기에 포함됐다.
당사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으로 나타났다. 김윤환 의원 등은 "뭐 이 따위가 있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래도 구사일생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당 실력자들에게 매달려보는 부류도 있었다. 아예 당사 복도에 주저앉아 눈물로 호소하는 의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한나라당사에는 하루 종일 격렬한 몸싸움과 고함이 떠나지 않는 가운데 오후 당무회의가 열렸다. 이회창 총재는 원안대로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는 이를 '공천혁명'이라고 했고, 밀려난 측은 '2·18 대학살'이라 불렀다.
#2. 한보사태
한승수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공천에서 배제된 이유는 '구시대 인물'로 낙인찍혔다는 점 외에, 1997년 한국사회를 뒤흔들어놓았던 '한보사태'의 관련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한보사태'란 97년 1월 당시 재계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를 발단으로 밝혀진 권력형 금융비리 사건을 말한다. 한보그룹에 제공된 부실대출의 규모가 무려 5조7천억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여서 온 나라가 술렁였다. 실제 부도의 여파로 170여 개 하청업체와 거래기업이 파산하고,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국가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준 건국 이래 최대 금융부정 사건이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부실대출이 가능했던 것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수천억원 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정계·관계·금융계 인사들과 유착했기 때문.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있다고 알려진 인사들이 검찰에 줄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국회의 국정조사도 별도로 실시됐다.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의원으로서 경제부총리였던 한승수씨도 '정태수 리스트'와 관련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무혐의' 처분. 검찰은 정태수 회장이 한승수씨 앞으로 5천만원을 보냈으나 중간 전달자인 신한국당 정재철 의원이 가로채 15대 총선의 강원지역 홍보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 지난 97년 5월 정태수리스트와 관련,신한국당 한승수 의원이 7일 오전 대검에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한보그룹 부도 20여일 후 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한보 부도 경위 및 대책'을 보고했다. 그는 부도의 원인으로 ▲무리한 공사확장 ▲과다한 단기 고금리자금 동원 ▲갑작스런 철강경기 냉각 ▲한보그룹의 방만한 경영 등 4가지를 들면서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아 국민적 분노를 샀다.
지금은 '한승수 총리'에 대해 가장 호의적 보도를 하고 있는 <동아일보>의 당시 사설을 보자.
"한보 비리사건에 책임이 없다는 한승수 경제부총리의 발뺌에 국민들은 경악하고 있다. 한보 비리사건은 정부수립 이후 최대의 권력형 금융부정사건이다. 그런데도 이 사건에 책임 있는 사람이 정부 내에 아무도 없다는 것인가. 한 부총리는 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금융기관의 대출활동에 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철강산업은 정부 허가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한보사건에 대한 정부책임을 부인, 여당의원들까지 격분케 했다. 경제정책의 책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무책임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한승수 경제부총리는 결국 3월 들어서 경질됐다. 7개월만의 불명예 퇴진이었다. 이후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사법적 책임은 면했지만,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보사태의 책임을 이유로 경실련과 총선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낙천운동 대상자 리스트'에 올랐다.
#3. 민국당
다시 2000년 16대 총선 직전. 이회창 총재에게 예기치 못한 허를 찔린 한나라당 공천 탈락 인사들은 '신당 창당' 길에 나섰다. '팽 당한' 인사들이 속속 합류했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민주당 공천탈락 인사들과도 결합했다. 바로 '민국당'의 탄생이다.
민국당은 15대 대선 이후 이 총재와 갈라선 조순씨가 대표를 맡았고, 김윤환 김상현 이기택 신상우 장기표 김광일 박찬종 허화평 김현규씨 등이 최고위원으로 추대됐다. 한승수 의원은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돌이켜보면 민국당은 마치 한승수 의원 한 사람을 위해 태어났던 당 같다. 그 해 4월 실시된 총선에서 민국당은 참패를 당했다. 자기 선거구에서 '만년 여당의원'의 지위를 누려오던 거물 정치인들이 거센 '물갈이' 바람에 속속 나가떨어진 것. 그런 와중에도 한승수 의원은 민국당 후보 중 유일하게 지역구(춘천)에서 살아남아 16대 국회에 등원했다.
▲ 지난 2001년 7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일본 역사교과서 재수정 무시에 따른 정부의 대응방침을 보고하기에 앞서 입을 지긋이 깨물고 있다. ⓒ 연합뉴스
2001년 들어서 김대중 정권은 민국당 2석을 여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승수 의원에게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전격 제의한다. 민국당이 이의 수용 여부를 놓고 갈등을 겪는 가운데, 한 의원은 3월 26일 장관에 취임한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 상공장관, 김영삼 정부 하에서 경제부총리에 이어 3개 정권에 걸친 3번째 입각이었다.
처음부터 DJ의 계산이었겠지만 민국당은 한승수 의원의 입각을 계기로 사실상 와해의 길을 걷는다. 한 장관 홀로 승승장구, 그 해 9월에는 한국 외교장관 차례였던 유엔총회 의장을 맡아 국제적 명성을 높였다.
쿠데타에서 시작해 '국민의정부' 거쳐 '실용 총리'까지
서울대 교수로 군사쿠데타 직후 국보위 참여. 군인 출신 대통령 하에서 정계입문과 최초의 입각. 3당 합당 이후에는 재빨리 'YS맨'으로 변신해 주미대사와 경제부총리를 지냈고, 여야 정권교체 후에는 '여소야대' 상황을 지렛대로 새 정부에 참여. 그리고 다시 '실용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화려하게 친정으로 복귀한 한승수 총리 지명자.
이명박 당선인은 여야를 오가며 쌓아 올린 그의 다양한 경력을 높이 샀다. 28일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국내외 경험을 갖추고, 누구보다도 글로벌 마인드를 가졌으며, 특히 국민화합 차원에서도 적격자"라고 인선 이유를 설명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처세술은 가히 정치학 교과서에 '케이스 스터디' 감으로 오를 법도 하다. 한 지명자를 잘 아는 한 원로 정치학자는 "아무나 여야를 넘나들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면서 그의 '특별한 능력'을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일국의 재상이라면 나름의 역사의식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 노무현 대통령과 한승수 유치위원장, 전이경씨가 과테말라시티 웨스틴 카미노호텔에서 열린 제119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PT)을 마친뒤 로게 IOC위원장으로부터 유치활동 참여증서인 디플로마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박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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