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 기도굴이 있는 곳
진신사리가 모셔진 천년고찰 경산 불굴사를 찾아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팔공산 자락에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굴과 신라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이 17세 때 이곳의 석굴에서 심신을 연마했고 기도했다는 설과 화랑의 수련장이었다는 구전이 남아 있는 불굴사를 찾았다.
갓바위 맞은 편인데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통일신라 삼층석탑
주 건물이 적멸보궁인데 1996년에 입적하신 원조스님께서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건립했으며 이 속에 삼층석탑을 조성하여 1988년 인도에서 봉안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다. 당연히 법당 내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주련이 다 한글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른 사찰에 비해 독특하다.
적멸보궁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429호)은 불굴사에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 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 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9세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노승의 현몽으로 발견된 약사여래불
약사보전에는 석조 입불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01호)이 모셔져 있는데, 동북을 향해서 있다. 전각은 정동쪽으로 건립되어 있어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는데 약사여래불로서 영험도 크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송광사 노승이 현몽을 받아 산사태로 매몰된 것을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땅 위에 있는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로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네모난 형태이며 각 면에 안상을 새겨 놓았고, 윗단은 둥근 형태로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머리 부분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 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앞으로 향한 모습이나 왼손은 없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 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 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음양설의 전설
전설에는 갓바위 부처님(관봉 석조여래좌상)은 남자이고 불굴사의 약사불은 여자로 부르기도 하는데 팔공산이 양(陽)이면 안산인 불굴사의 산세는 음(陰)이라고 한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석으로 자연 상태의 예측불이라고 하여 얼굴 부분에 땀이 나고 온몸이 젖으면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산 아래 음양리가 있는데 갓바위 쪽의 마을을 양지리라하고 불굴사쪽의 마을을 음지리라 하니 이는 음양조화가 원만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약사보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는 석등도 하나 있는데 현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네모난 기단위에 8엽의 복련 넣었고 그 위로 괴임을 두어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고 화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등이라 하겠다.
김유신 장군과 원효사대가 머물렀다는 홍주암
높은 절벽 위에 좁은 철책으로 난간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해 놓고 올라가는 길목에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는 홍주암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17세인 소년시절 현몽을 받고 이 석굴에 들어와서 기단을 쌓고 기도 사일 만에 선인을 만나 비법을 배워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토담을 쌓고 수행하던 장소로 전해지며 석굴 내에 제일약수는 김유신 장군이 사용했던 물이고 원효대사도 수도시 사용했던 물이라 한다.
가장 윗 부분에는 독성각이 있는데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다. 이 곳에서 주변 경관을 보면 그야말로 한 눈에 다 풍광이 들어온다.
약수 한 바가지를 마시면 온갖 시름과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무거운 짐 등이 다 사라지고 속세로부터 떠나는 듯 마음 또한 평온함을 느낀다.
갓바위 맞은 편인데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 전경건물은 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천년 고찰로써의 맛은 없다. ⓒ 김환대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통일신라 삼층석탑
주 건물이 적멸보궁인데 1996년에 입적하신 원조스님께서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건립했으며 이 속에 삼층석탑을 조성하여 1988년 인도에서 봉안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다. 당연히 법당 내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주련이 다 한글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른 사찰에 비해 독특하다.
▲ 적멸보궁진신사리를 모신 건물로 불상은 없다. ⓒ 김환대
▲ 적멸보궁 내부근래 만든 것 처럼 탑이 보인다. ⓒ 김환대
적멸보궁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429호)은 불굴사에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 삼층석탑통일신라 후기 석탑으로 불굴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조물이다. ⓒ 김환대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 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 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9세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노승의 현몽으로 발견된 약사여래불
약사보전에는 석조 입불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01호)이 모셔져 있는데, 동북을 향해서 있다. 전각은 정동쪽으로 건립되어 있어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는데 약사여래불로서 영험도 크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송광사 노승이 현몽을 받아 산사태로 매몰된 것을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 전각 짓기 전 불상약사보전 짓기 전에 노천에 발견 당시 불상 ⓒ 김환대
▲ 약사여래불약사보전에 있으나 방향이 좀 톡득하다. ⓒ 김환대
땅 위에 있는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로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네모난 형태이며 각 면에 안상을 새겨 놓았고, 윗단은 둥근 형태로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머리 부분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 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앞으로 향한 모습이나 왼손은 없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 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 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음양설의 전설
전설에는 갓바위 부처님(관봉 석조여래좌상)은 남자이고 불굴사의 약사불은 여자로 부르기도 하는데 팔공산이 양(陽)이면 안산인 불굴사의 산세는 음(陰)이라고 한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석으로 자연 상태의 예측불이라고 하여 얼굴 부분에 땀이 나고 온몸이 젖으면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산 아래 음양리가 있는데 갓바위 쪽의 마을을 양지리라하고 불굴사쪽의 마을을 음지리라 하니 이는 음양조화가 원만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약사보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는 석등도 하나 있는데 현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 석등오랜 역사를 증명하나 하 듯 파손된 부분이 보인다. ⓒ 김환대
네모난 기단위에 8엽의 복련 넣었고 그 위로 괴임을 두어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고 화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등이라 하겠다.
김유신 장군과 원효사대가 머물렀다는 홍주암
높은 절벽 위에 좁은 철책으로 난간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해 놓고 올라가는 길목에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는 홍주암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17세인 소년시절 현몽을 받고 이 석굴에 들어와서 기단을 쌓고 기도 사일 만에 선인을 만나 비법을 배워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토담을 쌓고 수행하던 장소로 전해지며 석굴 내에 제일약수는 김유신 장군이 사용했던 물이고 원효대사도 수도시 사용했던 물이라 한다.
▲ 전경오르면 홍주암이다. ⓒ 김환대
▲ 약수물이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의 양이다. ⓒ 김환대
▲ 석굴법당 내부는 근래 조성된 듯 하다. ⓒ 김환대
가장 윗 부분에는 독성각이 있는데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다. 이 곳에서 주변 경관을 보면 그야말로 한 눈에 다 풍광이 들어온다.
▲ 독성각독성각에는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다. ⓒ 김환대
약수 한 바가지를 마시면 온갖 시름과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무거운 짐 등이 다 사라지고 속세로부터 떠나는 듯 마음 또한 평온함을 느낀다.
덧붙이는 글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대구.경북)과 함께한 답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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