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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써진 글을 보고 거문고 갑을 쏘다

[신라 불교 500년의 역사가 경주 남산에 있다] ⑬ 남산리의 문화유산

등록|2008.01.31 10:02 수정|2008.01.31 10:02
통일전에 대한 일 고찰

▲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경주 역사유적지구' 표지석 ⓒ 이상기


정강왕릉은 통일전 바로 옆에 있다. 우리는 차를 통일전 주차장에 세우고 관광안내소에 가서 남산 지도를 하나씩 얻는다. 나는 엊그제 경주 IC를 나온 다음 관광안내소에 들러 남산 지도를 하나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광안내소 옆에는 경주 남산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 통일전: 신라를 통일한 세 위인을 모신 사당 ⓒ 경주시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9월 세워졌다. 이 건물은 분단된 남북의 통일을 염원하는 당시 정권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 전통 건축양식으로 위 세 위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통일의 과정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 민족기록화라는 이름으로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급했던 생각이 난다.

통일전에는 들어가 보지를 않아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통일전을 참배하느니 차라리 무열왕릉과 김유신 장군묘를 찾아 그 위인들의 체취를 느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전은 남산을 뒤로 하고 앞에 문천을 낀 배산임수형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름도 어려운 서출지(書出池)와 사금갑(射琴匣)

▲ 글씨가 나온 연못 서출지 ⓒ 이상기


통일전 주차장 남쪽 끝에는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서출지란 ‘글이 나온 연못’이란 뜻이다. 글이 나왔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삼국유사>기이(紀異) 제1 ‘사금갑(射琴匣)’ 조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금갑이란 ‘거문고 갑을 쏜다’는 뜻이다. 때는 신라 비처왕(毗處王 479-499: 21대 소지왕) 10년,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동하게 되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고, 쥐가 왕에게 까마귀를 따라갈 것을 아뢴다.
 
“왕의 명을 받은 기사가 까마귀를 따라 피촌(避村 고려시대에는 양피사촌, 현재는 남산동 탑마을)에 이르러 산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이 때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하나 준다. 그 겉봉에는 ‘개견이인사 불견일인사(開見二人死 不見一人死)’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해석하면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된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열어보기를 주저했으나, 신하가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이니 열어보기를 권한다. 왕이 그 말에 따라 겉봉을 여니 ‘사금갑(射琴匣)’이라 쓰여 있었다. 사금갑이란 거문고 갑을 쏘라는 뜻이다. 왕이 궁중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게 하니 궁중에서 수도하던 중이 왕비(宮主)와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일연 스님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인용한 걸까? 기록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고, 전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사실 황량하고 쓸쓸한 연못이 서출지와 사금갑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의미 있는 연못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 서출지 한쪽의 이요당(二樂堂) ⓒ 이상기


우리 일행은 연못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요당(二樂堂)이라는 목조건물이다. 이요당은 조선 현종 2년(1664) 임적이 지은 건물로, 이요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두 글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요당에서는 뒤의 남산을 즐기고 앞 서출지의 물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서출지에는 현재 연이 심어져 있다. 여름 같으면 연꽃을 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겨울이라 마른 연줄기만 보인다. 그리고 물은 약간 얼어 있어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그런데 남쪽 방향에서 보니 돌축대 위 대청마루가 시원한 느낌이다.

▲ 서출지 옆의 무량사 ⓒ 이상기

▲ 서출지의 실루엣 ⓒ 이상기


서출지 옆에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무량사(無量寺)라는 절이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금오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모조품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 연못 동쪽에 이르니 연못 주변의 나목이 연못에 비쳐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면을 기준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남산리 3층석탑의 단순한 아름다움

▲ 남산리 3층석탑의 단순한 아름다움 ⓒ 이상기


서출지를 보고 나서 우리는 차를 타고 삼층석탑 옆 주차장으로 간다. 탑마을 한 가운데 있는 이 탑의 공식명칭은 남산리 3층석탑(보물 제 124호)이다.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되었다.

이 3층석탑은 다보탑과 석가탑처럼 모양이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감은사 탑처럼 모양이 완전히 똑같지도 않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 양식이고, 서탑은 2중 기단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 동탑 ⓒ 이상기


동탑의 기단부는 2중의 바닥돌 위에 잘 다듬은 큰 돌 여덟 개를 어긋나게 맞추어 2단의 기단을 만들었다. 탑신부는 몸돌 위에 지붕돌이 하나씩 얹혀 있는데, 지붕돌의 모양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지붕 윗면이 5단으로 층을 이룬 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 서탑 ⓒ 이상기


서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석탑이다. 2층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중상을 새겨 종교성과 예술성을 부각시켰다. 팔부중상은 신라 중대 이후 등장하는 양식으로 불법을 지키는 여덟 가지 신장상이다. 3개층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지붕돌의 모서리 끝이 약간 올라가 날렵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동탑과 같이 5단이다.

이들 두 탑은 어찌된 된 일인지 옥개부가 모두 훼손되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동서로 나란히 자리 잡은 3층석탑은 높이도 약간 다른데, 동탑이 7.04m, 서탑이 5.85m이다. 그리고 이 두 탑은 어디서 보나 자연과 잘 어울린다. 동탑 쪽에서 쌍탑을 보면 남산을 배경으로 단아한 느낌이고, 서탑 쪽에서 쌍탑을 보면 들판을 배경으로 안정된 느낌이다.

▲ 서탑에서 바라 본 쌍탑 ⓒ 이상기


탑 주변에는 이곳 절터에서 나온 연화대와 건축용 석재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쌍탑 뒤 남산 쪽으로는 불탑사라는 절이 있어 이 쌍탑이 이 절에 속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절은 최근에 생긴 것으로, 과거 이곳에 양피사(壤避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부 사람들은 이 쌍탑을 양피사지 3층석탑이라고 부른다.

▲ 아수라상 ⓒ 이상기

신라시대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가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리고 하층 기단 면석에 12지신상을, 상층 기단 면석에 8부중상을, 1층 옥신의 네 면에 4천왕상을 새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형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탑에 따라 이들 도상이 달리 표현되기도 한다.

이곳 남산리 3층석탑의 서탑 상층 기단 면석에는 8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8부중상은 동서남북 4면에 각 2개씩 8개의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면에는 손에 여의주를 든 용과 염주를 입에 문 야차가 있다. 서쪽 면에는 독수리 현상의 가루라와 금강저를 든 장수 천이 있다. 남쪽 면에는 음악과 춤에 능한 건달파와 얼굴이 셋 팔이 여덟인 아수라가 있다. 북쪽 면에는 뱀의 형상을 한 마후라와 소머리 양머리 형상을 한 긴나라가 있다.

이런 설명을 토대로 남산리 3층석탑의 사면을 돌아보았다. 8개의 도상 중 동쪽과 남쪽의 네 상과 서쪽의 오른편 도상은 아주 선명하다. 이에 비해 북쪽의 두 상과 서쪽의 왼편 도상은 검은 이끼로 인해 형상을 분명히 알기가 어렵다. 8개의 도상 중 보통 사람들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남쪽 면에 있는 지옥의 왕 아수라다. 이아수라에서도 8개의 팔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으며, 손에 든 무기와 정면 옆에 측면으로 향한 두 얼굴은 자세히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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