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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당신의 젊음에게

신현림 <내서른살은어디로갔나>를 읽고,

등록|2008.02.02 11:37 수정|2008.02.02 17:04

▲ 신현림<내서른살은어디로갔나> ⓒ 민음사

유능한 작가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상처라곤 받지 않았을 듯한 투명한 글을 써내는 작가, 하지만 그런 작가의 삶이, 그런 작가의 과거가 푸른빛 여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처음의 호기심은 한결 더 깊어져 감동으로 변하다.

그런면에서 신현림은 감동을 전해주는 사람이다. 지금이야 시인, 사진작가로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펼치고 있는 그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가난과 고통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과정을 거쳤다. 그 지난한 고통을 이겨내고 시인으로 우뚝서기까지의 과정이 아름답다.

그렇기에 신현림에겐 감동이라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그 감동이란 표현을 써도 될 것 같다. 요즘 서른을 앞둔 20대를 흔히들 88세대라고 한다. 정규직 취직은 어렵고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한달에 88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적은 급여로 살아가는 개개인의 젊은 삶은 얼마나 고달프게 힘들까. 때론 절망감도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라고, 빛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작은 위안이라도 될까? 다행히 신현림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교훈을 전해 줄 것 같다. 그녀는 지금의 88세대보다 훨씬 더 큰 절망감과 고통속에서 젊음을 맞이했다. 신현림이 자신의 서른을 기억하며 써낸 <내 서른살은 어디로 갔나>는 마음 구석구석에 남아있던 그 아픈 기억을 끄집어낸다.

세상은 이토록 푸르고 아름다운데 나만 홀로 천천히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주체하기 힘든 인생을 어쩌지 못해 늘 불안했다. 서른 살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스무살부터 거듭된 입시실패로 건강이 무너지고 자긍심도 깡그리 무너졌다. 갈곳도 없고 만날 이도 없고, 뭘해도 잘 될 것 같지 않고, 다리를 건널 때면 강물속으로 내 몸이 쏟아져 버릴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내가, 내가 아닌 듯, 바람 빠진 튜브처럼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이십대는 상실감과 치가 떨리도록 싸웠다.                                                                   -27쪽-

올해로 대학년 4학년생이 되는 필자는 사회생활을 목전에 뒀다. 그래서 88세대의 이야기가,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나 자신의 일같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걱정되고, 두려움도 있는 시기, 그런 이때 신현림의 이야기는 필자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준다.

책 속, 이제 마흔 중반을 향해가는 61년생 신현림에게  젊음은, 그리고 서른의 의미는 남달라보였다. 대학에 3번이나 떨어지고, 불면증을 앓고, 그리고 지독한 가난의 과정속에서 맞이했던 서른이 사실 그에게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럼에도 그를 견뎌내게 한 것은 한줄기 빛 같은 책읽기와 사랑의 기억인 것 같다.

'나의 시여, 나의 육체를 마셔라. 내 몸을 시로 바꾸어라. 내 몸의 굴뚝에서 피어오른 시의 흰 연기가 삶을 가득 채우게 하라. 저 소용돌이치는 세상으로 나아가 따뜻한 영혼의 반이 되게 더 많이 애쓰고 탐구하라. 나의 시가 맑은 눈물이 되고 거친 바다를 밀고 가는 아름다운 언어의 배가 되도록.                                                                            -29쪽-

그가 고통을 견뎌낸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해 익숙해지고,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경험을 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는 책에서 담담히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다.

그녀의 사랑과 이별은 외외로 특별하지 않다. 유난히 튀지도 않는다. 그저 사랑했고, 또 이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담담하다. 하지만 그 담담한 이야기들은 책을 읽고 자신의 사랑을 한번 돌이켜보게 했다. 나의 사랑은 어떠한가, 나의 이별은 어떠했는가 라고. 마치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같이.

신현림의 이야기는 서른을 넘은 기성인들에게 서른을 추억하는 묘한 여운을 전해줄 것 같다. 또한 서른을 향해가는 젊은이들에게는 서른에 대해 생각해보고 희구하고 전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이제 스물 여섯, 조금씩 서른을 향해가는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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