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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2] 광산 - 오성술 의병장 (3)

등록|2008.02.03 10:59 수정|2008.02.03 14:04
어찌 친척들까지 고생시킬 수 있겠는가?

1909년 3월초, 호남 의병장들은 심남일 의병장 주선으로 전략회의를 가졌다. 일제 군경의 의병 토벌작전에 맞서는 합동작전을 벌이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그 해 3월 8일, 나주군 함평면 거성동에서 오성술 의병부대는 심남일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무렵의 일화를 이태룡 지음  <의병 찾아가는 길 2>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봄이 되자 본진을 용진산에서 영사재로 또 옮겨야만 했다. 점점 노골화되는 일제의 감시와 부왜인(밀정)들의 눈초리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데다가 부친으로부터 군자금이 고갈되어 군량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오 대장은 마침내 좌익장 오성범에게 자신의 친척집을 찾아가서 군량을 헌납케 했다.

며칠 후, 오성범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군량을 헌납할 마음은 있으나 밀고가 두려워 자진 헌납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를 들은 오 대장은 의병들을 이끌고 마을에 도착한 다음 족장(族長 집안 어른)들을 묶게 하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의병들에게 대접이 이렇게 소홀한가?”

이를 지켜본 족친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항의하려 하자, 다짜고짜 다가가서 뺨을 후려친 다음, 당장이라도 요절을 낼 듯한 행동에 모두 놀라고 말았다. 군량을 확보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장들이 의아해 하였다.

“어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어선 우리가 하물며 내 혈족을 아끼지 않으랴! 우리 가족들이야 왜놈들의 핍박을 받고 있지만 어찌 친척들까지 고생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강제로 빼앗아 온 것처럼 한 걸세.”

▲ 오성술 의병장 묘소 ⓒ 박도


용문산 전투에서 체포되다

오성술 의병부대는 그 해 여름까지도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의병부대와 서로 협조하면서
대일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함평 대명동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뒤, 그 규모가 30여 명으로 줄었다. 이 무렵 일제는 호남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하여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병탄을 눈앞에 둔 최후 경지정리 마무리 작업이었다.

1909년 10월 2일, 영산포 헌병대 소속 요시무라(吉村) 중위가 이끄는 토벌대는 용문산에 오성술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폭도토벌대를 파견하여 추격해 왔다. 오성술 대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의병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하였지만, 화력의 열세를 끝내 극복치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1907년 2월부터 3년간 광주 나주 담양 함평 고창 일대를 무대로 끈질기게 펼친 오성술 의병부대의 항일 투쟁은 막을 내렸다.

오성술 의병장은 1909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그러나 복역 중 살인 및 방화죄가 추가되어, 이듬해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가족들이 대구공소원(大邱控所院 현,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 결국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소에서 26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오성술 의병장의 항일투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용진정사(湧珍精舍)

▲ 오성술 의병장 생가 터, 생가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 박도

2007년 11월 7일 8시 30분, 오성술 의병장 손자 오용진씨와 나는 승용차를 타고 창평 숙소를 벗어나 광주로 달렸다.

오성술 의병장 전적지도, 이 지방 지리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모든 걸 오용진씨에게 맡겼다. 먼저 광주 시민공원 어귀로 가서 장국밥을 먹은 뒤 오성술 의병장의 생가 터이며, 오 의병장이 고이 잠드신 송산마을로 갔다.

마을 들머리 가게에서 오용진씨는 막걸리 한 병과 오징어를 마련하였다. 곧 송산마을 독배산 묘소에 이르러 손자 오용진씨는 산소 언저리를 정성껏 보살핀 뒤 상석에 술잔을 올리고, 고유의 인사를 드렸다. 나도 뒤 이어 절을 드렸다. 나주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이어 엎어지면 무릎 닿을 송산마을에 오성술 의병장 생가 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타성이 살고 있다고 하여, 집 어귀에서 사진만 찍었다. 다음 간 곳이 오성술 의병장이 집안 숙부뻘 되는 오준선에게 배웠던,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에 있는 용진산 용진정사(湧珍精舍)로 갔다.

▲ 용진정사 현판 ⓒ 박도

이곳은 당시 도학과 문장이 장성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쌍벽을 이루던, 대유학자 오준선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 오성술이 이곳에서 스승에게 배우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곳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서성거리자 어귀 밥집 주인 내외가 오용진씨를 알아보고서 달려와, 급히 진지를 지어 대접하겠다고 하였으나 갈 길이 바쁘다고 극구 사양하고는, 다음 전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 용진정사 ⓒ 박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박민영 박사가 쓴 “오성술 선생의 생애와 호남의병”과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광주 전남 항일운동가 재조명”, 이태룡 선생의 “의병 찾아가는 길 ”, 국가보훈처의 “공훈록”등을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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