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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포구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3] 광산 - 오성술 의병장 (4)

등록|2008.02.03 20:04 수정|2008.02.18 14:46

영산강.구한말 호남 의병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으로 이송될 때, 나룻배로 건너던 피눈물의 강이다. 그 무렵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영산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다시 대구로 갔다고 한다. 답사 중 미처 영산강 자료사진을 마련치 못하였는데, 고병하(광주 봉주초) 선생님 도움으로 싣게 되었다. ⓒ 고병하


석문산 전적지로 가는 길

▲ 의병들의 무기제작소 들머리 '석문동천' 표지석 ⓒ 박도

오용진씨는 석문산 전적지로 가는 길, 한 마을 앞에다 차를 세웠다. 그 마을은 할아버지 부하 오상렬 의병이 태어난 ‘가마마을’로, 마을 어귀에 순절기념비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곧장 순절기념비에 다가가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드렸다.

곧 이어 지난날 의병들의 무기제작소였다는 대명동산(大明洞山) 들머리 ‘석문동천(石門洞天)’ 표지석 일대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석문산 전적지로 달려갔다.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둔 탓으로 그 흔적은 지워지고 말로만 전할 뿐이라고 하였다.

석문산(石門山)은 지난날 치열했던 전적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야트막하고 예쁜 두 산봉우리가 호수에 잠겼다. 나는 호수 둑에서 석문산 전적지를 향해 깊이 묵념을 드렸다. 이 산에서 일군 총칼에 죽어간 이름 없는 의병 혼령에게 머리 숙였다. 

마지막 답사 전적지는 오성술 의병장이 일군에게 체포된 용문산이었다. 용문산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기에 먼 곳에서도 빤히 잘 보였다. 오후에는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씨를 만나기로 하였기에, 굳이 용문사 가까이 가지 않고, 광주로 가는 길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답사를 마쳤다.

▲ 석문산 전적지 ⓒ 박도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오용진씨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38선은 먼저 왜놈들이 만든 바, 그놈들이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38선 이북은 만주국으로, 그 이남은 일본 본토로, 분할 편입하려던 계획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만일 일본이 망하지 않았더라도 조선 국토가 두 쪽 나는 그런 불행도 왔을 건데, 엉뚱하게도 정작 미소 양국이 이를 분단시켰다고 역사의 뒷이야기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의 하나는, 당신 가계를 이어온 이야기였다. 그 당시 의병에 투신한 대부분 전사들은 대가 끊어져서 출계로 사자(嗣子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드는 아들)를 이어가는 집안이 많은데, 다행히 오성술 의병장은 외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용문산오성술 의병장이 일제 토벌대에게 체포된 용문산 ⓒ 박도


대낮의 방사(房事)

오성술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오 의병장은 외아들이었다.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어머니(오용진씨 증조할머니)는 부대로 찾아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아들은 차마 어머니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옷 갈아입고자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 오 의병장 부인)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치마로 방문을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이 고맙습니다.”

오용진씨는 고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에도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는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였다. 마침 나도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 길에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도 단 한 차례 대낮의 방사로 득남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관련기사: 혁명가의 성생활은 어땠을까?). 

영산강 포구의 슬픈 노래

오성술 의병장은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오성술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케 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구로 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거기서 대구로 갔던 모양이다. 오 의병장이 일본 순사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자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서 포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산강 포구 뱃전에서 첫 상봉이자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 아마도 이들 부자는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 대구감옥에서 수감 중일 때 오성술 의병장, 누가를 향해 불끈 쥔 주먹인가. ⓒ 박도

“임을 떠나보내는 남포나루에는 슬픈 노래가 흐른다”는 고려 정지상의 <송인(送人)> 한 구절을 연상케 했다. 갓난아이를 사이에 둔 젊은 부부의 영산강 나루터 이별은 아마도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이었으리라.

“여보, 잘 가시오.”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 잘 부탁하오.”
“염려 마시오.”
“………”

부인 나씨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들을 누가 볼세라 시집을 떠나 몰래 길렀다. 일제 군경과 밀정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나주군 문평면 쌍정마을 친정 남동생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 아들은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자라면서도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악몽 같은 일제강점기를 넘겼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오용진씨 이야기를 웃으며 들었는데 곧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그 무렵 이런 비극이 이 집안뿐이었겠는가? 왜 우리나라에는 해방 후 이런 애국자 집안들이 빛을 못 볼까? 잘못 낀 첫 단추는 그 언제 바로 잡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안 이야기를 듣는 새 승용차는 송정리역을 지나고 있었다. 송정리역은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다. 1969년 3월 1일 새벽, 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하고자 용산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와 이곳에 내렸던 곳이 아닌가. 밤잠을 설친 데다 여기서부터 보병학교까지 구보로 뛰어갔던, 힘들었던 보병학교 생활 첫 출발지였다. 하지만 이곳 일대도 그때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오용진씨는 당신 집안사람이 한다는 역전 한 밥집으로 안내하고는 비빔밥을 시켰다. 쇠고기 육회에, 갈비탕 국물에 그 비빔밥 맛이 일품이었다. 한 그릇에 오천 원이었다. 이 돈 받고 수지 타산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시작 때는 남의 집 가게를 얻어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 가게에서 영업한다고 자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전적지를 쏘다녔는데도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씨와 약속시간을 조금 넘겼다. 전남 도청 앞 황금다방에서 목을 뽑고 기다린다는 전화였다.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의 투쟁사가 자못 궁금했다.
덧붙이는 글 다음 회는 양진녀 양상기 부자 의병장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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