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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도 좌절도... 불혹에 쓰는 자기소개서

스무 살에서 마흔 살까지

등록|2008.02.04 15:57 수정|2008.02.04 15:57
낮에는 자동차부품 제조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졸린 눈 비벼가며 공부하던 1987년 말. 나는 재수 끝에 모 대학 일본어과에 합격했다. 고향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며 축하해주었고, 산골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 대학생이 생겼으니 잔치라도 벌여야 한다고 성화였다. 합격통지서를 손에 쥔 어머니는 합격의 기쁨보다 학비 걱정이 태산이라 한숨만 내쉬었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던 해, 나는 스무 살의 나이에 봄 햇살 가득한 날 상경길에 올랐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는 내 손을 잡은 채 "데모만은 하지 말거라"며 거듭 당부했다. 마을 사람들 거의 모두 김대중은 간첩이라고 믿던 시절이었으니, 어머니가 행여 아들이 데모라도 할까 싶어 마음을 졸인 건 당연했다.

그 누가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진리탐구보다는 취업을 위해 강의실로 도서관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졸업 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첫 월급을 타서 평생 땡볕에서 얼굴 그을리며 농사지은 부모님께 따뜻한 내복 한 벌 사드리고 싶은 생각으로.

나는 어쩌다 교정에서 만난 학과 친구가 88올림픽 공동개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해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했다. 선배가 다가와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면 놀란 토끼 마냥 꽁무니를 뺐다. 솔직히 그들은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욕을 얻어먹으면서 시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대학생활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일이 생겼다. 교정을 걷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교지에서 수습을 뽑는데 지원하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받은 거였다. 교지(校誌)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책으로, 나는 입학식 때 교지를 한 권 받아들고 서너 장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문투성이였던 탓이다. 나는 책장을 덮으면서 언제 이 어려운 논문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만드는 곳에 들어가 활동하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좋겠지만 책도 몇 권 읽지 않은 시골 촌놈이 감히 어떻게 들어갈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괜히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집안 망신이야" 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친구는 "일단 시험부터 봐"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훗날 경쟁률이 1:1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날 그렇게 해서 나는 교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교지에서는 세상을 인식해나가는 이른바 '의식화 학습'이 이루어졌다. 역사나 철학 따위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세계에 대해 배워나간 것이다. 그제야 나는 4·19혁명이니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니 하는 한국현대사를 배웠고, 차차 학생들이 왜 공부를 하지 않고 시위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광주의 진실, 군사독재 정권의 본질 등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분노에 치를 떨었고,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레 전공서적 대신 짱돌과 화염병을 들게 되었다.

그렇게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로 맡고 또 맡던 시절 선배와 친구들은 하나둘씩 수배를 받거나 감옥에 끌려갔다. 급기야 전라도에서는 수배 중인 학생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는 사건도 생겨났다. 밤마다 나는 언젠가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이따금 고향 부모님으로부터 안부전화가 걸려오면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지하에서 미싱을 돌리던 누나는 이미 나의 변화를 알아채고 있었지만, 나는 누나한테 내가 왜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배운 사실을 아는 대로 설명하고는 절대로 부모님께 얘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던 1991년 6월 3일,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교정에서 학생들이 국무총리서리한테 달걀을 던지고 밀가루를 뿌린 이른바 '달걀투척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단지 학생회 간부였다는 이유로 나는 하루아침에 패륜아요 폭력배가 되어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가 되었다. 고향집에는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여동생이 다니던 학교에도 형사들이 나타났다.

나는 3개월에 걸친 수배 생활 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초등 시절 예방주사는 줄 서 있을 동안에는 두려웠지만 일단 맞고 나면 잠시 따끔할 뿐 괜찮았다. 감옥도 막상 갇히게 되니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3평 남짓한 방에서 8명이나 되는 수인들과 함께 밥도 먹고 칼잠을 잤다. 언제부턴가는 1.5평 남짓한 독방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냉수마찰하고, 좁은 방안에서 운동 하고 책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감옥생활 1년 6개월 만에 갇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온 나는 한동안 사회부적응자가 되었고, 이내 그립던 교정으로 다시 돌아가 졸업을 했다. 하지만 일본어과 졸업장을 받아도 변변한 일본어 회화조차 하지 못했고 겨우 낙제를 면한 학점 탓에 취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건축 현장에서 미장일을 하는 삼촌 밑에서 사모래(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모래)도 지고, 자그마한 공장에서 선반으로 쇠를 깎는 매형 밑에서 일도 도와주며 모은 돈을 들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해방 이후 처음 들어선 문민정부가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한창 개혁드라이브를 걸던 때, 등 떠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그렇게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시절처럼 낮에는 일본어 학교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이국 생활은 내 적성에 딱 맞았다. 나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안도감을 주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들과 대화도 나누게 되고, 일본 드라마도 차츰 알아듣게 되었다.

일하던 곳이 엄청 바빴던 식당이라 접시를 닦고 또 닦은 탓에 손가락 끝은 갈라져 피가 나왔고, 아물다 싶으면 다시 도져 피가 나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 무렵 나는 일본어 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고, 모 대학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다. 장차 대학원에 들어가 일본 문학을 공부하려는 야무진 꿈을 간직한 채.

1997년 5월의 어느 날, 내게 다시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어린이책 전문기획실인데 함께 일하면 어떠냐는, 서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계속 공부할 것인가, 아니면 취업할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속으로는 일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솔직히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나는 두 차례의 집필 테스트 끝에 2년 8개월의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다.

나는 자료 찾기, 자료판독, 1차 구성, 2차 구성, 그리고 집필과 마무리 작업 등 글쓰기 공부를 해나갔다. 그런데 내 글이 '사실성' 면에서 엉망이라는 팀장의 지적을 받았고, 나는 글을 못 쓴다는 생각에 수없이 회사를 그만두려고 결심했다. 사직서를 써서 가방에 넣어 다니기도 했고, 실제로 회사 대표에게 그만두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그때 대표는 "당신이 자신의 글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당신의 글을 사랑해줄까? 자신의 글을 사랑하면 한결 편안하게 쓸 수 있을 거야"라면서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한마디 말에 나는 용기를 얻었고, 내 자신의 글을 사랑하면서 나의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만나는 세상을 글로 표현하는 일에 다시 도전했다.

그로부터 4년여 동안 어린이용 감동 실화, 과학물, 위인전, 신문기사 등을 썼고, 그 글은 교열의 과정을 거쳐 활자화되었다. 활자화된 글을 읽는 것은 고통과 부끄러움도 뒤따랐지만 그만큼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2001년 가을, 나는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삼류 작가는 되어도 일류작가는 될 수 없다"는 냉철한 평가 속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글을 쓴 4년여 세월을 뒤로 한 순간. 그것은 아내와 딸을 둔 가장인 내 생애 최대의 시련이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나는 그새 알게 된 어린이 책과 글쓰기 경험을 바탕으로 학원에서 학생들을 만나 독서와 글쓰기 지도를 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영혼이 맑은 아이들은 한동안 글쓰기를 버거워했던 나의 자화상과도 같았고, 나는 그런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책을 읽고 가슴으로 느낀 걸 꺼내어 써봐. 멋진 글이 될 거야" 하고 말을 건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표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비로소 어렸을 적 어렴풋이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고 품었던 소망을 반쯤 이룬 듯했다.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감동과 재미를 전하는 책들을 소개해 주고, 글 쓰는 법을 알려주던 7년의 생활. 학원에서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생활의 기반을 충분히 닦을 세월에 나는 아직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시험에 찌든 아이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어려워도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지 않느냐고, 지금은 힘들어도 훗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면 다 보상받을 수 있다며 예전에 선생님에게 수없이 듣던 그 말을 앵무새처럼 읊으면서.

10대는 교정에서 공부하고, 20대는 거리에서 정의를 외치고, 30대는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도전도 하고 좌절도 한 내 인생. 이제 나는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더라도 지금까지의 만남과 한 일을 가슴에 소중히 간직한 채 이따금 떠올려보고 싶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하지 않기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스무 살에서 마흔 살까지 쉬없이 달려온 내 인생. 불혹의 나이에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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