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에는 왜 신화와 전설, 금기가 많을까
[내가 만난 아프리카] 밤하늘을 보며 야간행군하는 버스승객들
▲ 돼지를 어깨에 메고 팔러가는 마다가스카르 젊은이 ⓒ 김민구<아프리카클럽 바오밥>
마다가스카르는 왜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질까
오늘은 바오밥 나무로 유명한 서쪽 해안가의 모론다바를 가는 날이다. 내가 마다가스카르에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바오밥 나무와 여우 원숭이를 보기 위해서다. 모잠비크 해협의 서쪽 인도양에 위치한 모론다바에서 바오밥 나무를, 베마라하 국립공원에서는 칭기라는 기암괴석을 볼 예정이다.
여행책자를 보니 타나에서 모론다바로 가는 길은 최악의 코스이다. 비행기 좌석이 없다면 올 때도 똑같은 길을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 나는 비행기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항공사 사무실을 나왔다. 나중에 이 대기자 명단은 모론다바에서 타나로 오는 길에 엄청난 혼선을 일으켜 예상치 못했던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된다. 기차역 앞의 ‘독립로’는 택시와 일반 차량, 사람들로 뒤섞여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번화가답게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호텔과 레스토랑, 카페, 선물용 가게 등이 많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답지 않다. 타나 시내를 돌아다닐수록 드는 느낌이다. 마치 동남아시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가 동남아시아 사람 그대로이다. 간혹 동남아시아인과 흑인사이의 혼혈과, 덩치가 큰 아프리카인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조상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건너왔다. 중국인도 100만 명이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동남아시아 느낌을 풍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와 달리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동남아시아인 같은 외모와, 조상과 어른을 공경하는 동양적 전통, 쌀농사와 주식인 밥 등 동질적 음식문화 때문이다. 쌀이 주식이고, 손님에게 음식 대접이 후한 것도 속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마다가스카르 속담인 “솥뚜껑을 사지 않는 사람은 설익은 밥을 먹어야 한다”거나 “준비된 음식에는 주인이 없다(음식에는 따로 주인이 없으니, 아무나 먹어도 된다는 뜻)”는 이야기에는 동양적 접대문화가 깔려 있다.
동남아시아는 거리상 우리와 가깝고 자주 접하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것이다. 교류하지 않으면 낯설고 편견을 갖게 된다. 여행은 교류의 시작이고 편견을 깨는 지름길이다.
▲ 마다가스카르 택시인 구식 '르노4' ⓒ 김성호
마다가스카르와 케냐 택시운전사의 차이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치안이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특히 택시운전사들도 편하게 승객을 대한다. 물론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는 경우는 있는데, 케냐의 나이로비처럼 위압적이지 않다. 마다가스카르 택시운전사들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있다. 나이로비 운전사처럼 “경찰에 신고할 것이냐”며 공격적 위압감을 주진 않고, 못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 방식으로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숙소에서 마다가스카르 항공사까지 3000아리아리를 주기로 하고 택시를 탔는데, 5000아리아리를 줬는데도 택시운전사가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내가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자 운전사는 말라가시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잔돈이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택시운전사들이 항상 써먹는 수법이다. 내가 다시 몇 번을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자 그 뒤로는 아예 못들은 척하면서 창문을 열고 엉뚱한 ‘독립로’ 거리만을 쳐다본다. 벙어리 작전이요, 시간 끌기 작전이다. 결국 거스름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구식 ‘르노 4(Renault 4)’인데, 30년 이상 된 차다. 고물차 정도가 아니라, 박물관에 있어야할 정도로 오래된 차다. 르노 ‘4’는 네 바퀴 굴림 방식, 이른바 4륜구동방식(4WD)이라는 뜻. 네 바퀴 굴림 방식 차량은 두 바퀴 굴림 방식(이륜구동방식, 2WD)에 비해 승차감은 떨어지지만 힘이 좋아 비포장도로나 경사가 급한 도로, 길이 미끄러운 도로 등에 알맞은 차량이다. 크기도 작은 ‘르노 4’ 택시는 마다가스카르 도로를 위해 태어난 차량이다. 타나 시내는 높은 언덕에서 평지로 내려오는 급경사 길이 흔하고, 지방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천지인데다 비가 많이 와 길이 항상 미끄럽다.
타나에서 운행되는 ‘르노 4’는 그 자체가 자동차 박물관이다. 수동식 차량인데 기어 넣는 기계가 운전대 바로 위쪽 옆에 붙어 있고, 기어도 앞뒤로 미는 것이 아니라 넣었다 뺐다하는 식이다. 기름을 아끼려고 언덕에서 내려갈 때는 아예 엔진을 끄고, 평지에 다달으면 다시 시동을 건다. 타나는 언덕이 많다보니 효율적인 기름절약형 운행인지 모른다. 거의 모든 택시가 예외 없이 이렇게 한다. 택시는 은회색으로 칠해져 있고 지붕 위에 택시라는 글귀가 있다.
▲ 타나 시내 남서쪽 버스터미널 ⓒ 김성호
마다가스카르에서 영어는 통하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남쪽 모론다바로 가는 남서쪽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을 보자 다시 동부 아프리카로 돌아간 느낌이다. 버스정류장도 지저분하고 혼잡하고, 차량이 내뿜는 검은 연기로 코가 콱콱 막힐 지경이다. 호객꾼들이 달라붙어 서로 자기 버스를 타라고 권유한다. 버스도 대형버스는 없고 봉고버스나 미니버스다. 아프리카 닭장차이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버스 정류장도 흙먼지가 날아다니고, 주변 음식점의 위생상태도 엉망이다.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하는 모론다바 가는 봉고버스표를 30000 아리아리(미국 돈 15달러)에 예매했다. 마다가스카르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물가는 싼데, 장거리 버스 요금은 비싼 편이다. 석유가 나지 않아 기름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닭장차라 부르는 대중교통 버스인 봉고버스를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택시-브루스(Taxi-Brousse)’라고 한다. 프랑스어인 ‘택시-브루스’는 영어로는 ‘부시 택시(Bush Taxi)’이다. 영어의 ‘부시(Bush)’와 프랑스의 ‘브루스(Taxi-Brousse)’는 덤불이라는 같은 뜻이다. ‘택시-브루스(Taxi-Brousse)’는 덤불지역을 달리는 택시라는 뜻으로, 영어는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고 프랑스는 형용사가 보통 뒤에 오는 말 순서 차이(어순차이) 일 뿐이다.
버스정류장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지저분했지만, 꼬박 하루를 택시-브루스를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배를 골릴 수는 없다. 나이 많은 할머니가 주인이다. 나는 항상 그렇듯 가장 친숙하고 탈이 나지 않을 음식을 주문했다. 영어로 “라이스(쌀밥)”와 “치킨(닭고기)”를 시켰다. 할머니가 알아듣지를 못한다. 식당을 하는 주인이 “라이스”와 “치킨”을 모르다니. 결국 옆에 현지인이 먹고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같은 것을 달라고 하자 그때서야 할머니는 “로마자바(Romazava)”라고 알아들었다는 듯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쌀밥과, 야채를 넣어 끓인 쇠고기국, 감자 으깬 것 등이 나온다.
밥을 먹은 뒤 나는 물을 시켰다. “워터(물)”라고 했는데도, 할머니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당황해 한다. 내가 다시 프랑스어로 “오(Eau)”라고 하자 할머니는 “라노(Rano·말라가시어로 물)”하면서 알아듣고 생수를 한통 갖다 준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로 배운 프랑스어에서 지금도 기억하는 몇 가지 단어 중 하나가 “오(물)”였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먹는 물(생수)은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어로 “오비브(Eaux vives)이지만 그냥 “오”해도 알아듣는다.
나와 마다가스카르 할머니 사이에서 밥을 먹는 동안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된 것이 있다. 바로 “코카콜라”이다. 쌀밥과 쇠고기 국, 작은 물, 콜라 한 병을 합쳐 2700아리아리 밖에 안 된다. 우리 돈으로 1350원이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국가 중 물가가 가장 싸다.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 어려운 점은 바로 언어다. 모든 의사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말이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기까지 하다. 현지어인 말라가시어와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어에다 아랍 말과 아프리카 말, 영어까지 섞여 있다. 표기도 프랑스어와 말라가시어가 모두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어 발음도 프랑스식으로 해야 하는지, 영어식으로 해야 하는 지 헷갈린다.
같은 로마자로 표기되다보니 프랑스 철자 고유의 ‘악상 떼귀(Accent aigu. 알파벳 이(e) 위에 점이 붙는 악상 떼귀(é))’와 같은 것이 없으면 어떤 말이 프랑스어고, 어떤 말이 말라가시어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로마자라도 프랑스식 발음과 영어식 발음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어라는 말은 있었으나 문자가 없다보니 아랍상인들에 의해 ‘소라베(Sorabe)’라는 아랍 문자로 표기되다 19세기 영국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표기도 로마자로 바뀌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여행객 숙소에는 여행책자나 투어회사 팸플릿이 적은데다, 그나마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되어 있어 영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불편하다. 여행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고 인프라도 떨어지고, 언어 소통에도 장벽이 있다 보니 배낭여행객에게는 여행하기 어렵다. 여행객 숙소의 주인도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만을 한다.
프랑스어는 교육받은 사람들이나 여행객 숙소 등 외국인을 상대하는 현지인들이나 사용하고, 대부분 마다가스카르인은 버스정류장의 할머니처럼 말라가시어만 안다. 아랍과 아프리카어의 흔적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살라마(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서 찾을 수 있다. 살라마는 아랍의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 인도양의 동해안에 사용되는 스와힐리어의 ‘살라마’에서 따온 말이다. 살라마는 아랍어로 ‘평화’나 ‘안전’을 뜻한다.
▲ 타나 로바 뒷골목길에서 기타치는 젊은이 ⓒ 김성호
마다가스카르가 영어를 공용어로 추가한 이유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완전 독립하기 직전인 1957년 자치령으로 있을 때는 ‘말라가시 공화국’으로 불리다 1960년 독립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마다가스카르로 바뀌었다. 독립 이후 남아공을 비롯한 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식 지명이나 이름을 서서히 말라가시 고유어로 바꿔 나가고 있다. 수도 이름이 프랑스식의 타나나리브(Tananarive)에서 안타나나리보로 바뀌었고, 동쪽 해안도시 타마타브는 토아마시나로, 북서부의 해안도시인 마중가는 마하장가, 서부 해안도시 툴레아르는 톨리아라로 바뀌었다.
마다가스카르는 그동안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가 사실상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내가 여행을 하고 다녀온 뒤인 2007년 4월 헌법개정을 통해 “국어는 말라가시어로, 공용어는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 영어”로 규정했다. 세계화의 명분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추가했는데,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줄이고 제1외국어를 영어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거쳐 온 동부 아프리카 르완다와 비슷하다.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의 영향으로 1962년 독립 이후 르완다어(키니아르완다)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르완다는 지난 1994년 영어를 공용어로 추가했다. 르완다를 ‘아프리카의 두바이’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는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의 세계화 의지와도 관련 있지만, 1994년 르완다 인종학살을 자행했던 다수족인 후투족 정권을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데 대한 반프랑스 정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타나 시내 푸조 승용차 뒤 트렁크에 올라가 연주하고 있는 아이들 ⓒ 김성호
대중 버스인지 화물차인지 모르는 택시-브루스
내가 타고 갈 봉고버스인 택시-브루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봉고버스 지붕 위에는 큰 가마니의 짐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차 높이와 지붕 위의 짐 높이가 비슷하다. 짐들의 무게 때문에 봉고버스 지붕이 내려앉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버스인지, 짐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인지 분간이 안 된다. 출발시간도 역시 ‘아프리카식’이다. 오후 2시 30분 출발한다던 버스는 오후 4시나 되어야 터미널을 떠났다. 15인승 봉고버스에 승객이 꽉 찰 때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보츠와나와 남아공, 나미비아에서 맛보았던 유럽식 대형버스의 안락함은 먼 옛날이 되고,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에티오피아와 우간다, 탄자니아 등 동부 아프리카의 닭장차로 어느새 되돌아가 있었다. 지나가 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아프리카 닭장차의 고통이 내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타나에서 모론다바까지 최악의 고통스런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아프리카 배낭여행은 여행의 막바지까지도 끝내 나의 엉덩이를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
운전석에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앉는다. 젊은 운전사에게 나의 생명을 맡기는, 피할 수 없는 아프리카 버스 여행길이다. 나는 이슬람 신자도 아니어서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외칠 수도 없고, 기독교 신자도 아니니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도 없고, 불교신자도 아니니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수도 없다. 마음속으로 “커다란 사고만 없게 해 달라”고 비는 수밖에.
운전사가 시동을 거는데 “찌지직~찌지직~”하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 키를 꽂고 몇 번을 세게 돌려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뿐이다. 시동이 걸리는 “붕~붕~”하는 소리가 아니다.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결국 승객 중 남자 4~5명이 내려 차 뒤에서 밀자 그제야 “철컥”하는 기어 걸리는 소리가 나면서 차가 움직인다. 버스 스스로 출발하지 못하고 승객의 힘을 빌려야 갈 수 있는 차량이다. 탄자니아 아루샤의 세렝게티 사파리 차량이 떠올랐다. 이런 버스로 19시간을 제대로 달릴 수 있을지 걱정이다. 혹시 차가 중간에 서지 않을까. 아프리카에서 버스 고장을 걱정하는 것은 운전사가 아니라 승객이다.
정류장에서 간신히 출발한 버스는 100m 정도 가자마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 엔진 시동을 껐는데, 다시 출발하려고 하니 역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주유소 직원 3명이 달라붙어 차를 밀자 시동이 걸린다. 마다가스카르 주유소 직원들은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차량 시동을 걸어주는 서비스도 해준다.
▲ 마다가스카르 화전민촌의 아이들 ⓒ 김민구<아프리카클럽 바오밥>
면허증에 돈 끼워주고 경찰의 검문 통과하는 운전사
버스가 20분 채 달렸을까, 타나 교외로 빠져 나갈 즈음 경찰이 검문을 한다. 총을 어깨에 메고 검문을 하는 경찰에게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지붕위의 짐을 보더니 운전사로부터 자동차등록증을 뺏어간다. 짐을 너무 많이 실어 과적으로 교통법규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차량 등록증에 이어 운전면허증까지 달라고 한다. 출발할 때부터 너무 많은 짐을 싣는다고 생각했다. 화물차량인지 버스인지 모를 정도였으니.
운전사가 면허증을 경찰에게 건네는데 면허증 사이에 지폐가 몇 장 들어 있다. 경찰이 등록증과 면허증을 갖고 검문소 사무실로 가자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뒤따라간다. 1분도 안되어 바로 등록증과 면허증을 되찾아온다. 운전사는 일상사처럼 태연한 표정이다. 면허증 사이에 끼워 준 돈이 작용했음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돈이 되니 운전사는 과적을 하고, 걸리면 푼돈으로 경찰의 단속을 넘어간다.
다시 20분 정도 더 달리자 경찰이 또 검문을 한다. 이번에도 등록증을 달라고 한 뒤 짐을 문제 삼는다. 경찰이 면허증을 달라고 하고 운전사는 면허증 사이에 지폐 몇 장을 넣어 건넨다. 경찰은 면허증을 몸 뒤로 돌려 지폐만 빼고 등록증과 면허증을 그 자리에서 운전사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한 시간 정도 달리면서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타나에서 남쪽 시 외곽으로 들어서자 강물이 흐르고,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이 도로 주변에 있다. 타나 시내를 관통하는 이코파 강의 상류이다. 한 아주머니가 길가에서 팔고 있는 노점상으로부터 과일을 사겠다고 하자 버스가 멈춘다. 승객이 물건을 산다고 버스가 멈추는 것도 아프리카 국가에서 처음 본다.
▲ 타나 시내 공원 나무 아래에서 레거머리를 해주는 아가씨들 ⓒ 김성호
마다가스카르의 붉은 색 풍경은 결코 낭만이 아니다
높은 언덕을 넘어가는데, 강을 따라 논들이 많고 계곡에도 계단식 논농사를 짓고 있다. 강물이 풍부하다보니 계곡 높은 데까지 논으로 개간했다. 언덕 정상의 오른쪽에 교회가 있는데, 십자가를 두 개나 세웠다. 언덕을 넘자 완연한 시골풍경이다. 흙 색깔이 붉은색인데, 집들도 그 흙으로 지어 붉은색 마을뿐이다. 좁고 높은 몸채에 가파른 삼각형의 지붕은 전형적인 마다가스카르 건축양식이다.
마다가스카르의 농촌은 온통 붉은 색이다. 나비미아의 소수스플라이 사막의 색깔과 비슷하다. 강물의 색깔도 붉은색을 띠고 흐른다. 철길도 지나간다. 흙집은 흙과 색깔이 붉은 색으로 똑같아 집인지 언덕인지 구분이 안 된다. 지붕은 볏짚으로 이었다. 방목시키는 소들도 보인다. 도로를 따라 논이 끝없이 이어지고, 물이 가득 고인 논도 많다. 작은 흙집은 창문이 4개이고, 조금 큰집은 창문이 6개나 된다. 지붕위에는 창문과 별도로 햇볕을 들게 하는 삼각형 창이 2개씩 설치되어 있다.
계곡을 따라 산허리에 집들이 넷 채에서 열 채씩 크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농사의 편리를 위해 논 가까이에 마을을 이루다 보니 큰 마을 단위로 모여 있지 않고, 계단식 논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온통 붉은 황토에 붉은 강물이 흐르는 언덕 위에 지어진 붉은 색 집들을 보니, 반 고흐의 그림 액자 속에 있는 그림 풍경이다. 강렬한 색채로 거칠게 그려나간 고흐의 그림과 마다가스카르 시골의 투박한 붉은 색 집들이 어울린다.
마다가스카르의 황톳길과 붉은 집들은 풍경으로는 멋있지만, 환경생태학적으로는 심각한 고민거리이다.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불을 질러 화전으로 밭을 일구면서 산이 황폐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어 흙이 부식되면서 생긴 붉은 흙은 강물을 붉게 만들고, 바다로 그대로 쓸려 내려가며 인도양 해안마저 붉게 만들어 물고기를 멸종시키고 있다. 서쪽 인도양의 모론다바 바다가 푸르지 못하고 흐린 것은 바로 흙의 부식의 결과이다. 마다가스카르는 ‘아름다운 붉은 섬’이 아니라 ‘건강한 푸른 섬’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후 6시가 되어 해가 산위로 넘어가면서 어둑해질 무렵 세 번째로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자동차 등록증을 보고 짐을 살피던 경찰이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그냥 보내준다. 어두워서 과적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1시간 정도 더 달리자 작은 도시가 나왔다. 암바톨람피라는 작은 도시이다. 타나에서 68km 떨어진 거리인데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달려오니 2시간 이상 걸렸다. 기찻길도 보이는데, 타나에서 안치라베까지 가는 철길이다.
▲ 칭기마을에서 망고를 파는 여인들 ⓒ 김성호
죽어서 더 대접받는 안치라베의 파마디하나 풍습
암바톨람피에서 1시간 30분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안치라베. 주유소에서 다시 기름을 꽉 채운다. 노점상들이 달려와서 물건을 파는 데 빵도 팔지만 감자와 마늘, 당근 등 채소를 주로 판다. 선조들이 동남아시아인이다 보니 먹는 음식과 채소가 우리와 거의 같았다. 해발고도가 1500m로 고원지대여서 고랭지 채소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도시 분위기를 풍긴다. 타나에서 안치라베까지 운행하는 철도의 종착역이기도 한데, 이 열차는 화물만 운송한다. 고원지대로 서늘한 날씨 때문에 19세기 노르웨이 선교사들이 만든 휴양도시로 온천이 유명하다.
메리나족이 많이 사는 안치라베는 독특한 장례문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묘지에 안치한 시신을 보통 7년마다 다시 꺼내었다가 안치하는 ‘파마디하나(Famadihana)’라는 풍습이 있다. 묘지를 아예 옮기는 우리나라의 이장과는 달리, 묘지에서 시신의 뼈만 꺼내 깨끗한 새 람바(비단 수의)로 다시 싼 뒤 묘지에 안치하는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의 가족묘는 시신을 땅 밑에 묻지 않고, 반지하에 돌이나 시멘트로 참호처럼 만들어 가족의 시신을 내부에 나란히 안치해 놓는다. 장례식 때 입힌 비단 수의가 시간이 오래 지나 낡고 썩으면, 조상의 시신이 추위를 타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옷을 다시 입혀줘야 한다는 조상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현재 소수부족에서 이 같은 풍습이 이뤄지고 있어, 마다가스카르인들의 조상이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술을 마실 때, 조상에 따르는 의미로 땅에 먼저 첫잔의 술을 붓는데 우리네 풍습과 비슷하다.
죽은 뒤에도 시신이 추위를 탈까봐 새로 비단옷을 입혀주는 가족들이 있으니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살아서는 집에서 살고, 죽어서는 가족묘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에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한 한순간의 헤어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에게는 근심이 없다. 아프리카 대륙의 고달픈 표정이 아니라, 순박하고 해맑은 표정이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알 것만 같다.
‘죽어서 더 대접 받는’ 안치라베를 떠나 작은 산을 넘고 또 넘으면서 버스는 달린다. 50m 이상 쭉 뻗은 직선길이 없을 정도로 구불구불한 길이다. 언덕 너머 또 언덕이다. 어둠이 산에 찾아오면 더욱 암흑이다. 산길을 따라 20~30여 채의 작은 마을들이 잊힐만 하면 다시 나타난다. 전기불이 하나도 없다. 가끔 촛불을 켰는지 한 마을에 한 두 가구만이 희미한 불빛을 낼 뿐이다. 대부분의 마을은 버스의 전조등에 의해 마을의 잔영만 보일 뿐이다. 사람은 사는데, 전기불이 없는 산악지대의 마을을 지나가면 마치 유령의 마을을 지나는 느낌이다.
▲ 모론다바 바닷가에 있는 통나무배인 피로그 ⓒ 김성호
달리는 시간과 고치는 시간이 엇비슷한 택시-브루스
밤 9시께 마텔로나(Matelona)라는 마을에서 차가 선다. 다른 차들도 많이 서 있다. 택시-브루스뿐 아니라 화물차량도 있다. 자동차 휴게소인 셈이다. 저녁 식사를 위해 오랫동안 정차했다. “호텔리(Hotely)”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에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 ‘호텔리’는 호텔이 아니라 쌀밥과 쇠고기, 닭고기, 생선 등을 파는 길거리의 작은 음식점을 말한다.
케냐와 탄자니아 등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도 똑같은 식당을 “호텔리(Hoteli)”라고 한다. 로마자 표기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발음에 같은 의미로 봐서 스와힐리어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식당에는 승객들이 늦은 저녁을 먹느라고 북적거린다. 뜨거운 국물과 닭고기, 밥이 나온다. 옆 매점의 문도 열려 있다. 밤새 달리는 차량들을 상대로 한 밤 장사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마다가스카르 섬 전체를 뒤덮는 별들이 쫙 깔려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밤하늘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다른 별나라를 보여준다. 손에 닿을 정도로 낮게 떠 있다. 은하수가 서쪽으로 기울어 별들 사이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나미비아 사막에서 보았던 은하수가 밤새 나를 따라 왔나 보다.
잘 달리나 싶던 봉고버스가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새벽 0시쯤 갑자기 멈추더니 꼼짝도 안한다. 출발할 때부터 사람이 밀어야 시동이 걸리던 봉고버스는 애초부터 미덥지 못했다. 봉고버스는 언덕길에서 끙끙 걸리면서 힘에 부쳐하더니 급기야는 엔진이 꺼진 것이다. 남자 승객들이 차에서 내려 밀어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젊은 운전사는 보닛을 열어 오일 호스를 입으로 빨아 석유를 뱉어낸 뒤 엔진 곳곳을 망치로 두드리며 점검한다.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고 엔진오일 등을 갈지 않아 엔진에 무리가 가고 기름호스가 막힌 것 같았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다. 네다섯 번 시동을 걸어도 걸리지 않는다. 남자승객들이 내려 플래시를 비추고 운전사는 차량 밑으로 기어들어가 차축의 틈새를 조정한다. 차가 고장 나면 남자승객도 모두 같이 고치고, 시동 걸 때는 내려서 차를 밀어야하지만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차가 고장 나 멈추면, 승객만 고생이기 때문에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차량을 고치는데 도움을 준다. 차 밑에서 망치로 차축(Chassis)을 두드리니 그 소리와 진동에 승객들이 차안에서 기다릴 수가 없다. 어두운 밤인데도 모두 차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기다린다.
나는 혼자서 밤하늘을 본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 별을 골고루 뿌려 놓은 것처럼 온 밤하늘의 천장에 별이 깔려 있다. 몽골의 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다면, 마다가스카르의 별은 평온하게 떠 있다 조용히 땅위로 하나씩 내려온다. 이곳저곳을 만진 뒤 버스를 밀자 그 때서야 시동이 걸린다.
차는 새벽 1시가 되어서 미안드리바조(Miandrivazo)에 정차한다. 작은 삼거리에 대여섯 개의 식당과 가게가 불을 밝히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여인숙도 있다.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리자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동남아시아의 인력거와 비슷한 수레이다. 사람이 끄는 수레인 인력거를 여기서는 “푸스-푸스(Pousse-Pousse)”라고 부른다.
언덕을 오를 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푸시 푸시(Push-Push)”하며 밀어달라고 부탁한 소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푸스(Pousse)”는 영어로 “푸시(Push)”와 같은 뜻이다. 영어로는 릭쇼(Rickshaw)라고 한다. 푸스-푸스에도 꼬리등이 달려 있어 어둠 속에서 불빛이 난다. 자세히 보니 인력거 뒤에 페트병 안에 촛불을 달아 전등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푸스-푸스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치리비히나 강변에 만들어진 작은 도시인 미안드리바조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인 ‘피로그(Pirogue)’를 타고 치리비히나 강을 따라 서쪽 인도양까지 탐험하는 출발장소이기도 하다. 현지인들이 ‘라카나’라고도 부르는 피로그는 마상이로 삿대와 노를 저어 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보츠와나 오카방고 델타의 모코로와 같다고 보면 된다. 보츠와나의 모코로 여행이 갈대를 헤치며 하마와 새들을 구경한다면, 피로그는 붉은 색 강물을 따라 맹그로브 나무를 보면서 악어와 여우원숭이 등을 보는 사파리이다.
다른 택시-브루스도 타이어가 펑크 났는지 운전사가 차량 밑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며 바퀴 교체작업을 하고 있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성한 차량이 거의 없다. 마다가스카르의 택시-브루스는 수시로 고장이 나면 고치고 밤을 헤치며 밤새 달린다. 성질 급한 별 세 개는 이미 1m 땅 위로 내려앉았고, 은하수도 차량을 따라오다 지쳤는지 뒤쪽 하늘에 쳐져있다.
▲ 타나 시내 아노지 호수 근처의 '거리의 이발사' ⓒ 김성호
드디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야간 행군하는 버스 승객들
아, 비포장도로이다. 차가 덜컹덜컹 거리고, 삐걱삐걱 거리고, 차체가 하늘로 튀어 올라갔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다. 우간다의 키소로 가는 길과 탄자니아의 아루샤로 가는 길이 다시 나타났다. 어두운 밤의 산길에서는 차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커다란 웅덩이가 도로 중간 곳곳에 패여 있다. 졸다 깨다를 수십 번 하다 보니 피곤이 몰려와 새벽녘에는 차가 아무리 흔들려도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대로 곯아 떨어져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잠에 빠졌다.
꽤 깊은 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운전사이다. 잠결에 귀찮은 표정을 짓자 손으로 앞쪽을 가리킨다. 모든 승객들이 내려서 걸어가고 있다. 차안에는 아무도 없다. 새벽 4시쯤. 산속의 깊은 계곡을 내려가는 길이 너무 험해 승객들을 모두 내려서 걸어가게 하고 버스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간다.
길이 장마에 쓸려 내려간 듯 중간 중간에 움푹 패고, 어느 곳은 아예 길 한쪽이 통째로 없어져 버렸다. 버스 혼자 내려오기도 힘든 길이다. 승객을 태우고는 차축이 땅에 닿아 도저히 내려올 수 없는 길이다. 우리 차 앞의 4대의 차량도 승객들이 모두 내려서 걸어간다. 앞은 캄캄하고 옆으로는 산과 계곡으로 막혀 있어 음산한 느낌이 스친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초저녁에 보이지 않던 그믐달이 바로 산 정상에 걸려 있다. 서쪽 하늘에 떠 있는 눈썹 모양의 그믐달을 보니 새벽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 별들도 마을 위 산자락에 걸쳐 있다. 별들이 워낙 낮게 떠 있다 보니 손에 잡힐 듯하다. 마다가스카르의 별은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지는 티베트의 별똥별이 아니라, 밤하늘에 어둠이 깔리면 하나둘씩 나타나 새벽녘까지 마을을 지키는 수호성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38만40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가까이 느껴진다고 해도, 별은 왜 이리도 남반구의 하늘에서는 낮게 가까이 떠 있는 것일까. 은하계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별조차도 달보다 400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보다도 27만배 더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남반구 아프리카를 여행하다보면 북반구의 밤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천문현상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희미한 그믐달과 여기저기 떠 있는 별들을 등대로 여기며 어두운 계곡을 걸어간다. 마치 군대 야간행군을 하는 느낌이다. 북파공작원들이 초승달이 뜬 어두운 밤에 담력을 기르기 위해 공동묘지 근처에서 야간훈련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날은 마치 북파공작원의 야간훈련을 하는 느낌이다.
아프리카의 길이 아무리 험해도 승객을 내리게 해 걸어가게 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캄캄한 계곡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이다. 한 여자 승객은 광부들이 쓰는 머리에 두르는 야간 플래시, 이른바 헤드 랜턴을 쓰고 걸어가고, 다른 남자 승객은 작은 플래시를 들고 있다. 승객들은 모두 이들의 뒤를 쫓아간다. 어두운 밤에는 빛나는 물체가 등대이며 나침반이고 지도자이다.
10분간 계곡을 따라 내려와 여러 개의 작은 계곡 다리를 건넌 뒤에야 다시 차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계곡을 벗어나 30분 정도 달려 달빛에 희미하게 한두 채의 집이 보이는 데 차가 선다. 머리에 광부용 플래시를 한 여자승객이 플래시를 밝힌 뒤 버스에서 내린다. 미안드리바조를 출발해 어둠속에서 안코트로포츠키를 지나 마니아 강을 건너 수많은 크고 작은 강과 계곡을 건너오자 밤이 사라지고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 모론바다 항구의 모습 ⓒ 김성호
아프리카 버스에게는 도로가 날개이다
오전 7시 마남피소아를 지나 암바톨라히 지역에 이르러 해가 뜨자 비로소 아프리카의 본래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니, 마다가스카르의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어디 가나 강에 물이 많이 흐르고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마다가스카르는 1년 내내 물이 많고 날씨가 좋아 한해에 세 번 벼농사를 짓는 3모작을 한다. 그런데 시골집은 다 쓰러져가는 흙집이나 나무판자, 갈대와 볏짚으로 바람만 가린 집들이 많다. 사람들은 에티오피아처럼 신발을 거의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닌다.
다시 버스가 고장 났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운전사는 30분간 버스 밑으로 들어가 차축을 점검한 뒤 승객들이 민다. 차가 간신히 시동이 걸린다. 오전 10시 쯤 모론바다로 가는 갈림길인 말라임반디에 도착했다. 길거리의 허름한 가게에서 바나나를 사서 아침으로 먹는다. 팻말에 “왼쪽 말라임반디 2.5km”가 있다. 버스는 오른쪽으로 빠져 모론다바로 간다. 버스가 갑자기 씽 씽 달린다. 아스팔트길이다. 새로 포장된 도로인데, 포장상태로 보아 1년도 안된 것 같다. 이제 비포장도로의 죽음의 코스를 벗어났다.
얼마가지 않아 영원히 멈춰버릴 것 같았던 봉고버스도 도로가 좋으니 덩달아 흥이 났는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달린다. 비포장도로의 비실대던 그 고물 차량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옷이 날개이듯이, 아프리카 버스에게는 도로가 날개이다. 정말 차량도 도로를 잘 만나야 고생하지 않는다.
햇살이 쨍쨍 내리 쬐고 날씨가 후텁지근하다. 야자수들이 곳곳에 보인다. 흙들은 여기도 붉은색이다. 벼가 파랗게 잘 자라고 있는 곳도 있고, 어떤 논에는 모내기를 하다 말았는지 띄엄띄엄 모가 심어져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행복은 잠깐.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비포장도로이다. 길이 곳곳에 움푹 팬 버려진 도로다. 정말 항아리처럼 구덩이가 도로 중간에 여기저기 패여 있다. 아프리카 여행 중 나의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다. 행복은 왜 이리 짧고, 고통은 끝이 없는가. 우즈베키스탄의 한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몇 년 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여행할 때 만돌린 같은 전통악기인 탄부르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70대 할아버지는 “인생에서 즐거움은 30%이고, 슬픔이 70%다”라며 “인생의 짧은 즐거움을 연장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말했다.
오히려 애초부터 비포장 흙길이었다면 그래도 나을 것이다. 먼지는 날리더라도 움푹 패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도 30여 년 전에 한 번 아스팔트를 깔았는데 보수 관리를 하지 않아 길 곳곳에 웅덩이가 파인 듯하다. 아스팔트 중간에 웅덩이가 파이니 더욱 위험하다. 남아 있는 아스팔트에 타이어가 펑크가 나고 구덩이에 빠지면 차가 뒤집힐 우려가 크다. 자갈이나 모래 도로보다도 항아리처럼 팬 도로에서는 결코 속도를 낼 수 없다.
모론다바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오른쪽 도로 옆의 빈터에는 주인에게 끌려온 수백 마리의 소떼들이 보인다. 토요일 우시장이다. 소들을 걸어 보게 하기고 하고 머리를 쳐들어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면서, 소를 사려는 사람들과 팔려고 나온 주인들이 뒤섞여 복잡하다. 근처의 소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것처럼 소들이 많다. 일찍 팔린 몇몇 소들은 새로운 주인에게 고삐를 잡힌 채 시장을 나온다.
길거리 소시장을 벗어나자 푸른 논들이 펼쳐진다. 벼들이 파랗게 자란 넓은 논에 내가 찾던 바오밥 나무가 한 두 그루씩 서 있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 옆에는 모내기 하는 모습도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벼를 벤 뒤 타작하는 모습도 보인다. 3모작의 현장을 모론다바의 들판에서 한눈에 본다.
▲ 마다가스카르 주식인 쌀밥과 닭고기 국 ⓒ 김성호
마다가스카르에 신화와 전설, 금기가 많은 까닭
어른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논에서 모를 심고 있다. 허리를 굽히고 하나씩 모를 심고, 다른 논에는 젊은 부부와 어린 딸이 논에서 피를 뽑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보기 힘들고, 벼농사를 짓는 동남아시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우리네 시골의 논농사와도 비슷하다. 모내기 뿐 아니라 논에서 피 뽑는 것까지도. 장례문화 뿐 아니라 벼농사에서도 마다가스카르인의 선조가 동남아시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 5000아리아리의 지폐에도 벼농사를 짓는 계단식 논이 배경그림으로 나온다. 지폐는 그 사회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음식도 쌀밥은 듬뿍 주는데, 야채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쌀보다 채소가 더 귀하다. 반찬과 국은 닭도리탕 같은 닭고기나 쇠고기 국물이다.
쌀은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주식 뿐 아니라 생명이고 뿌리이며 가족이고 전통이다. 쌀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 이를 말해준다. 지오프레이 파린더가 쓴 <아프리카 신화>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죽은 아이의 무덤에서 벼이삭이 달린 나무가 자라자 어머니가 그 아이의 이름을 따서 “바리(Vary·쌀)”라고 불렀다. 쌀은 바로 소중한 자식 그 자체이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쌀과 동물들에 대한 전설이 특히 많다. 인간이 너무 욕심을 부려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죽음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죽음에 대한 구제방법을 황소가 먹어 버려 그 대가로 병이 나면 황소를 희생양으로 바치게 되었다는 신화, 신이 애초 바닷물로 육지거북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육지에서 사는 동물들만 먹도록 한 신의 계시에 따라 민물거북은 먹지 않는다는 금기가 생겼다는 설화, 강물의 덫에 걸린 악어가 한 남자와 결혼해 두 명의 아들을 낳아준 뒤 다시 강으로 돌아가 악어가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인 악어를 절대 먹지 않는다는 신화….
마다가스카르에는 이처럼 농경문화에 따른 많은 전설과 신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 아프리카의 신화가 더해지고, 조상을 숭배하는 동양적 전통이 겹치면서 많은 금기를 가져왔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금기를 ‘파디(Fady)’라고 부른다. 장례식에는 모두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와야 하는 것이나, 신성한 나무 옆을 지나가서는 안 된다거나, 해변에서 휘파람을 불어서는 안 되고, 어떤 곳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모두 마다가스카르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파디이다.
길가에는 파란 바나나가 줄줄이 달린 바나나나무와 야자수 나무도 보인다. 바닷가에 다가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바오밥 나무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처음에는 주로 논에 서 있거나 밭에 자라고 있었으나, 산에도 길가에도 바오밥 나무가 버티고 있다. 바오밥 거리로 유명한 모론다바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바오밥이다. 자연은 인간처럼 말로 속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 대로 서 있는 것으로 자신의 실체를 보여준다. ‘행동하는 양심’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마하베에서부터 모론다바 강을 따라 달려간 버스가 모론다바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무려 22시간을 야간 행군하듯 달려왔다. 그렇게 많이 고장을 내던 택시-브루스가 모론다바에 도착한 것 자체가 기적이고 놀라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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