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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자취생 가족 품서 '끙끙'

설 연휴 마음 놓고 앓았던 새해 '취업 고시생'

등록|2008.02.10 13:04 수정|2008.02.10 14:35
"어이 자취생, 너는 얼굴색이 너무 허얘서 안 되겠다. 어여 집에 가라!"

설날, 차례와 세배를 모두 마친 오후였습니다. 오랜만에 '젊은 피'들끼리 뭉쳐볼까 하는데 '대장' 사촌오빠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제게는 특별 '귀가(歸家)권'을 줍니다. 행여 대장님 마음 바뀔세라 그 특권 냉큼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문 꼭 닫고, 커튼 치고, 이불 속으로, 이어지는 꿈나라로 뭉글뭉글 기어들어갑니다……. 설 연휴를 맞아 집으로 돌아온 전날 밤부터 목이 조금씩 아프더니, 급기야 설날 아침에는 열까지 나기 시작했거든요.

능력 없는 대학생, 어설픈 독립

저는 지난 1월 말 손수 밥을 지어 먹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 자취 초년생입니다.

제가 부모님께 내세웠던 무기는 한 가지였습니다. 당신들의 딸이 결국, 1분 1초라도 아껴 써야 하는 '대학교 4학년' 즉,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통학 왕복 2시간 30분에서 오는 시간 낭비와 체력 소모가 끼치는 폐해에 대한 이야기에 수긍하신 것인지, 텔레비전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청년 실업자'들에 대한 뉴스에 흔들리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는,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 생활과 함께 예정보다 조금 일찍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취를 위해 부모님께 내세운 명분은 '공부'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명분에 살짝 기댄 대학 졸업반의 '쓸데없는 자존심'도 가슴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학 입시생도 아닌 만큼, 부모님이 많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부모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취업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고자 하는 '이기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었다면 훨씬 당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의 끝자락에서, ‘명분’과 ‘각오’를 핑계 삼았습니다. 그리고 눈 질끈 감고 부모님을 향해 마지막 손을 벌린 것입니다.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 머리 커버린, 아직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을 탓하면서 말입니다.

지방에서 유학 와 혼자 사는 친구들은 저를 말렸습니다. “그래도 엄마가 해주는 밥 먹는 게 최고”라며 말입니다. 그리고 “독하게 자기관리 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지는 것이 바로 자취”라고 겁을 주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끝까지 저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집에 내려가서 한 일주일만 있으면 조금 답답해지기는 해”라며 꼬리를 살짝 내린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웬만하면 집에서 다녀라”고 말하는 서울 출신 자취생들조차도 벌써 2년째 자취를 하는, 설득력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네 집에선 일하고, 내 집에선 아플 거니?"

1월 27일,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저를 믿어주시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 생각에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감이 함께했지요. 힘들 때마다 부모님을 생각해야겠다는, 그런 동기 부여와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집 떠나 정확히 열흘이었습니다. 연휴를 맞아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처음으로 내 집 꾸려가는 재미에 들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육 후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었지만 피곤함도 잊었습니다. 통근 시간이 왕복 3시간에서 40분으로 줄어들었음에도 수면 시간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설거지, 빨래, 화장실 청소… 바쁜 시간 쪼개서라도 꼬박꼬박 하고 다녔습니다. 세 발자국 걸어갈 수 있는 좁은 방이지만 청소기로 구석구석 먼지도 다 치웠습니다.

오히려 취재 기획과 기사 쓰는 재미에 집에 있을 때보다 수면시간이 줄어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해진 잠은 커피와 박카스, 그리고 성취감에서 오는 두근거림으로 채워나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휴를 맞은 수요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연휴 기간 써야 할 기사가 주어져 있었지만, 앞으로 4일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가벼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들뜬 기분에 그날 저녁 따끔따끔 아프기 시작한 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잠들어 버린 것이 실수였나 봅니다. 설날 아침 오르기 시작한 열은 연일 밤낮으로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토요일, 병원에서 주사 한 대를 맞고 처방받아 온 약을 복용한 이후에야, 열도 내리고 목의 통증도 줄어들었습니다.

아픈 딸내미 걱정에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시는 분이 바로 어머니이셨습니다. 하지만, 혼자 살겠다고 나갔다가 집에 와서 앓는 딸이 얄미웠는지 안쓰러웠는지, 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십니다.

“넌 다음 주에도 주중에는 일 잘 하고, 주말에 와서는 또 아플 거냐?”

대학 4학년, 무거운 설렘

제 몸이 따라가기 버거웠던 것일까요? 성급하게 ‘부모님’이라는 날개를 떼어버리고 어설프게 독립해 꿈을 이뤄보고자 했던 제 바람을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집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부터 삐걱거렸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3일 내내 ‘너는 아직 부모님의 아기’라는 사실을 매섭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죽과 반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태워 주신 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그 이후에야 겨우 책상 앞에 온전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 반찬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래기 반찬입니다. ⓒ 김명은

제가 보아도 세 살 먹은 ‘아기’가 따로 없습니다. 결국 저는 고3 때처럼 부모님의 뒷바라지 없이는 공부도 하지 못할 약한 존재였던 것일까요? 속 편한 친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집에 와 아파서 참 다행이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요? 제 몸이 가했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몸 관리도 자기 관리’라는 맹랑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다시 부모님의 따뜻한 품 안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네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제 몸도 설득당하겠죠. 저도 어쩔 수 없는 ‘독립된 개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집이 제일 좋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독립하고 싶어하는, 모순된 생각을 계속 할 만큼 많이 자라버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교육’만을 위해서 20년 이상을 뒷바라지해 주시는 우리 부모님들, 이분들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효도는 무엇일까요. 결국 번듯하진 않아도, 내 몸 하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런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 보여드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이런 모습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 아닐까요.

취업 고시생이 되는 무자(戊子)년 새해 첫날은 그렇게, 제 마음을 ‘무게 있게’ 설레게 하는 ‘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자취 신고식’ 한번 혹독하게 치렀네요. 올해에 있을 모든 나쁜 일들을 액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앓느라 계속 잊고 있었던, 화요일에 받은 인턴 첫 월급으로 장만했던 부모님 커플 핸드폰 줄을, 오늘 밤에는 잊지 말고 꼭 챙겨 드려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명은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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