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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바람 불어도 마을 인심은 끄덕 없어요"

서울 달동네, '성북2동'을 찾아서

등록|2008.02.11 10:01 수정|2008.02.11 10:01
성북2동

ⓒ 김정미


올 설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연휴가 주말에 걸쳐 있어 5일을 쉬게 된 것이다. 설연휴를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보낸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다. 친인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설을 보내야 하다니. 나는 문득, 사람이 그리웠다. 마을이 그리웠다. 고향사람처럼 따뜻하고 인심 넘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서울 성북구 성북2동이다. ‘인심이 남아 있는 마을’이라고 친한 선배를 통해 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찾아가봐야지” 생각은 했지만 선뜻 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보기도 전에 없어지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9일, 긴 설연휴를 보낼 겸 성북2동으로 향했다.  

시대가 바뀐 듯한 마을 풍경

북악산 서울성곽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한참을 오르고 또 올라 성북2동에 도착했다. ‘진짜 부자’들만 산다는 성북동의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거쳐 오르막길을 오르니 ‘시대’가 바뀐 듯, 건물의 형태도 순식간에 달라졌다.

높은 담장이 얕아지고, 규칙적으로 들어섰던 집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위치해 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집 앞에는 한 무더기의 연탄이 버려져 있다. 경비까지 앞세워 단단히 잠겨있던 단단한 대문은 나무판자를 덧댄 힘없는 대문으로 바뀌어 있다.

‘여기가 정말 서울이 맞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껏 느껴왔던 서울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성북2동"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 ⓒ 김정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롯데건설 임직원 올림'

얼마나 올랐을까, 성북2동 마을로 들어서니 전봇대를 사이에 두고 길가에 큼지막하게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어두침침한 주변 건물 색들과는 달리 알록달록한 현수막이 대번에 눈에 띤다.

“롯데건설에서 설만 되면 해마다 저렇게 현수막 걸고 그래요.”

간판 없는 동네 상점에 들어서니 주인 할머니가 현수막의 정체를 설명을 한다. 설연휴가 되면 걸린다던 현수막은 아마도 최근 불고 있는 ‘재개발 바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57년 마을 토박이 하수남 할머니를 만나다

성북2동23살 때 마을로 건너와 60년이 넘도록 살고 있다는 하수남(79) 할머니.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 없이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 김정미


설 연휴가 주말까지 이어져서 그런가,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그러던 중 골목 어귀에서 걸어 나오는 하수남(79)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멈춰 선 골목 끄트머리에는 쓰고 난 연탄 한 무더기가 놓여 있고, 내 키만한 낮은 지붕 위에는 바싹 마른 채소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는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을버스 운전기사 아저씨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거동이 편치 않은 듯, 한참을 쉬엄쉬엄 걸으며 길가로 나온 할머니는 길가에 세워진 트럭에 등을 대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학생, 이 동네서 살고 있는겨?”

내가 다가서자 할머니는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반가워 대답을 했더니 할머니는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다시 말해달라는 뜻으로 한쪽 귀를 쓱 들이 민다.

“내 귀가 잘 안들려. 몸이 성한 곳이 없어. 좀 더 크게 말해줘.”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귀까지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하할머니는 “23살 때 성북2동으로 건너와 60년이 넘도록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 4남매를 낳은 할머니는 본인의 말에 따르면 “박복한 사람”이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막내아들을 뺀 나머지 자식들이 다들 저 세상으로 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같이 살던 51세 난 아들은 술병으로 고생하다 보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내가 박복해. 뭔 죄가 그리 많은지.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정말 착하게 살아왔는데 복이 없는 걸 보니 전생에 죄가 많았나봐.”

60년 넘는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설명하랴. 지금까지의 삶을 생각하니 목이 메는 듯, 할머니는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또 다시 자그만 목소리로 말을 잇고 또 이어갔다.

성북2동성북2동에서 60년이 넘도록 살고 있는 하수남(79) 할머니. 길에서 잠깐 만나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헤어짐을 아쉬워 했다. ⓒ 김정미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 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던 할머니는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걸음걸이가 편치 않은 할머니를 부축해 집 골목길까지 동행했다. 골목 앞에 내다 놓은 연탄재를 가리키며 할머니는 “구청에서 연탄을 공짜로 나누어 준다”며 “혼자 살아서 힘들지만 나라에서 도와줘 그나마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85세 왕언니부터 60세 막내까지 '할머니 경로당'

할머니 경로당성북2동 '할머니 경로당'은 마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랑방'의 역할을 한다. ⓒ 김정미


하 할머니를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골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할머니 경로당’. 성북2동은 특이하게도 할아버지 경로당과 할머니 경로당이 따로 분리돼 있다. 이유인 즉, “경로당 규모가 너무 작아서 할머니 경로당을 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반 가정집이 있던 자리를 허물고 그 공터에 집을 지어 ‘할머니 경로당’을 만들었고 남녀 구분 없이 드나들던 이전의 ‘성북2동 경로당’은 그 후부터 할아버지들만의 장소가 됐다. 마을 정류장 근처에 위치한 까닭에 쉽게 찾을 수 있는 할아버지 경로당과는 달리, 할머니 경로당은 집 사이사이에 위치해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할머니 경로당’이라는 문패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헤맸을 것이다.
   
근처 상점에서 음료수 한 박스를 사들고 무작정 할머니 경로당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얼른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머니 여섯 분이 자리해 있다. 모두들 성북 2동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베테랑 주민들이다. 설 연휴를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보낼 만도 하건만 할머니들은 아침 일찍부터 경로당에 하나, 둘 모였다.

“저기 저 집에 살던 김씨 있잖아. 이번에 수술했대.”
“그런 일이 있었구만. 그나저나 아들은 잘 다녀갔어?”
“아침에 다 정리하고 집으로 갔어. 설은 잘 쉬었는감?”

85세 ‘왕 언니’부터, 60세 ‘막내’까지, 삼삼오오 모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는 경로당은 마을 아낙들의 ‘사랑방’이다. 이들은 집에서 직접 만든 떡을 나눠먹기도 하고, 점당 10원짜리 고스톱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다 졸리면 휴지든, 음료수 페트병이든 아무 것이나 머리에 대고는 한숨 자기도 한다.

성북2동'할머니 경로당'에서 마을 할머니들은 수다도 떨고 낮잠도 잔다. 베개대신 패트병, 두루마리 휴지 등을 머리에 대고 잠을 자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김윤섭


고향 떠나 성북2동으로... 저마다 사연을 가진 마을 사람들

“37세에 이곳으로 와서 여태껏 살고 있다”는 김상림(79)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에 비해 유난히도 말재주가 뛰어났다.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6·25 전쟁 이야기까지 처음 만난 이의 정신을 쏙 뺄 정도의 능숙한 이야기는 삼십 분 가량 이어졌다.

“노인네, 장성이 고향이여?”

김 할머니 이야기에 정신을 놓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전라남도 장성이 고향”이라는 김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는 강 할머니가 처음 알았다는 듯 되묻는다.

서로 얼굴을 마주본 지 40년이 넘는 이웃이지만 정작 서로의 ‘고향’은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하긴 태어난 고향 같은 것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꾸려진 마을이기 때문이다.

꽃 같던 열일곱에 스물 넷 남자를 만나 결혼한 김 할머니는 노동일(막노동) 하던 남편을 따라 성북2동으로 왔다. 그 전에는 강원도 어느 마을에서 산을 깎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성북2동으로 거처를 옮겨서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12년 전 먼저 세상을 뜬 할아버지가 막노동으로 ‘하루벌이’를 했지만 그마저도 공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물건을 이것저것 떼다 용산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지금은 여기까지 마을버스가 올라오지만 예전에는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내려가야 했어.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이만한 보따리를 지고 버스에 올라타면 버스 안내양이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그래도 일할 수 있어서 참 좋았지.”

자그마한 체구에 큰 보따리를 이었을 할머니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 중간 중간 손짓 설명을 하는 할머니의 굵은 손마디를 보니 그 억척스러웠던 세월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성북2동37세에 성북2동으로 건너왔다던 김상림(79) 할머니. "내 마을, 내 집에서 살다 갔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한다. ⓒ 김정미


김 할머니의 자녀는 2남 3녀. “큰 딸 나이가 몇 살인지도 가물가물하다”는 할머니는 “50살 난 노총각 큰 아들과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걱정이 많이 되는 아들이지만 예전에는 ‘컴퓨터 사업’을 하던 반듯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덩달아 혼기까지 놓쳐 지금껏 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7년째 청량리에 있는 둘째 딸네 가게서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 일을 한다. 여성 옷을 만드는 가게로 “종업원이 몇 안 되는 작은 가게”라고 한다. 팔십이 다 된 나이에도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생활비’ 때문이다.

주변의 여느 노인들이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돼 정부보조금을 받는 것과는 달리, 아들이 있는 김 할머니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힘들만도 하건만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은데 일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정든 내 마을, 내 집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으면..."

성북2동김상림 (79)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 ⓒ 김윤섭


성북2동40계단을 꼬박 올라 맨 꼭대기에 있는 집이 김상림(79) 할머니의 댁이다. ⓒ 김정미


“집에 오르는 길이 하도 높아서 계단을 세어봤더니 40개나 되는 거야. 요즘은 다리가 아파 오르기도 쉽지 않다니까.”

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비탈진 계단 40개를 올라야 닿을 수 있는 끄트머리 집이다. 건강한 사람도 숨이 찰 법한 비탈진 계단을 매일 오르내리는 김 할머니는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 양반은 건강해서 일할 수 있으니 다행이여. 요즘은 나이 들었다고 우리한테 ‘새마을 일’도 안줘.”

한숨 자는가 싶더니 언제 일어났는지 정 할머니가 김 할머니의 말을 거든다. ‘새마을 일’이란 마을 거리와 공공화장실 등을 청소하는 일로 이 일마저도 “65세 이하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밀려 일거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경로당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루 일과인 할머니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라”는 인사는 그리 즐거운 말이 아니다. 김 할머니는 “정든 내 마을, 내 집에서 편안히 살다가 하루빨리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최근 성북2동에 불고 있는 ‘재개발 바람’에 대해서도 이들은 큰 관심이 없다. 이곳에 직접 땅을 가지고 있는 이는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개발이든 뭐든 내 마을 떠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이나 ‘돈’이 아닌 ‘하루를 먹고 사는 것’과 동네 이웃들과의 ‘정’이기 때문이다.

"저쪽 마을이나 이쪽마을이나 공기 좋은 건 똑같은데..."

성북2동55년동안 성북동에서 살았다는 하두호(81) 할아버지. 2001년부터 '성북2동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 김정미


할머니 경로당을 나와 할아버지들만 있다던 ‘성북2동 경로당’으로 향했다. 역시나 간판이 없는 상점에 들러 음료수를 산 후 경로당에 들어섰다. 큰 방 두 칸으로 이뤄진 경로당에는 할아버지들이 제법 많았다. 동네에 있는 모든 할아버지들이 모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아버지들은 대여섯씩 조를 이뤄 장기와 바둑을 두기에 바빴다.

2001년부터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하두호(81) 할아버지는 “55년 동안 성북동에서 살아온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50년 넘도록 성북2동을 지키고 있는 유지답게 그는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드믈 정도로 인심 좋고 공동체 의식이 강한 곳”이라고 마을을 소개했다. 또한 “매년 5월에 어른들을 위한 잔치가 열린다”며 “어른들을 향한 공경심이 깊은 곳”이라 덧붙였다.

마을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던 하 할아버지는 마을 재개발과 관련된 질문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듯 했다.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단계도 아니고 찬반이 엇갈리는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참 망설이던 할아버지는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입을 뗐다.

그리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건 매한가지인데 저쪽과 이쪽의 빈부격차가 심하다”며 “공원예정지로 묶이며 개발을 금했기 때문에 마을이 낙후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재개발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 공동체

조정인(가명, 61) : “마을 주민 중에 집 주인은 몇 없어. 그나마 있던 집도 다 팔아버렸어. 한 몇 년 전부터 ‘개발개발’ 하더니만. 있는 놈은 살고 없는 놈은 죽는 거지.”
김정순(가명, 69) : “개발 하긴 해야지! 이렇게 못 사는 동네가 요즘 어딨어?”

성북2동은 지난 2004년 9월 재개발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승인이 난 이후 현재까지 ‘성북 2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최근 재개발 이야기가 또 다시 불거져 나오면서 땅 값이 평당 평균 700~800만원이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부동산 업계에서는 투자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에서 ‘성북2동’을 투자지역으로 점찍은 것과는 상관없이 인생의 반 이상을 성북2동에서 살며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마을 주민들은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마을 분위기는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성북2동 노인회장 하두호 할아버지는 “재개발이 되더라도 건물 하나에 남, 여 노인회를 하나로 합해서 이웃들과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울 성곽, 절,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 등 볼 거리도 많고 풍경도 좋은 성북2동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성북2동성북2동 야경. 가로등과 서울성벽 외각을 밝히는 불빛이 인상깊다. ⓒ 김정미


노인회를 나서니 마을에는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둠만큼이나 고요해진 마을을 밝히는 것은 가로등과 서울성곽을 돋보이게 하는 불빛들뿐이다. 표지판 하나 없이 의자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진 ‘버스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마을 아래를 내다보니 고요한 이곳과는 달리 건물 불빛들이 휘황찬란하다.

깜깜한 거리, 라이트를 환하게 비추며 마을버스가 들어선다. 집으로 가기 위해 올라탄 마을  버스 차장 밖으로 불 꺼진 ‘할머니 경로당’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40계단을 올라야 갈 수 있다던 김 할머니의 집도 스쳐간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한 마을에서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아온 이들과 함께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며 어느 동요의 가사처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운 나의 집’, ‘따뜻한 내 마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김정미 기자는 <오마이 뉴스> 7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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