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정후겸이 더 두려웠더냐?"
[사극으로 역사읽기] 심상운의 상소, 부메랑이 되다
▲ 승기를 잡은 세손 이산. 약간 오만하기까지 한 표정이다. <이산> 제42회 예고편에서. ⓒ MBC
서기 1776년 1월 30일에 개시된 이산의 대리청정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정후겸은 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고자 하였다. 심상운을 내세운 맞불 상소가 바로 그 시도였다. 서명선의 전격 상소로 홍인한이 무너지고 대리청정이 관철된 데에 대한 발악이었다.
정후겸의 사주로 1776년 2월에 이루어진 심상운의 상소는 1차적으로 홍국영을 ‘찍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홍국영 같은 ‘요물’을 두고서는 세손의 등극을 저지할 수 없다. 홍국영을 제거하자면 주상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하자면 ‘홍국영은 세손에게 백해무익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주상 전하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불한당 같은 측근을 옆에 둔 세손의 위상도 흔들릴 것이고, 잘만 되면 대리청정이 철회될 수도 있다. 정후겸의 계산은 그러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상소문을 네 이름으로 주상 전하께 올리도록 해라!”
정후겸의 지시였다. 역적의 후손이란 굴레 때문에 출세의 제약을 받아온 심상운은 ‘세손이냐 정후겸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미련 없이 정후겸에게 베팅했다.
심상운, 정후겸을 선택하다
과감히 ‘정 라인’에 선 심상운. 그는 ‘직접적으로는 홍국영을, 간접적으로는 세손’을 표적으로 삼고 상소문을 써내려갔다. 그는 먼저 붕당 정치의 폐해를 언급했다. 그런 다음에 외척의 폐해를 지적했다. 외척이 반드시 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가 그런 당연한 말을 한 것은, 외척 홍씨의 일원인 홍국영 쪽으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비판의 대상이 붕당 정치에서 외척 정치로 축소되는가 싶더니, 그는 잠시 ‘독자’의 긴장을 완화시켜준다. 세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세손은 천부적이고 날로 새로워지는 분.”
“우리 세손은 독실하게 끊임없이 공부하시는 분.”
이렇게 잠시 세손을 칭찬하다가 심상운은 다시 문제의 본령으로 은근히 다가선다. “저하께서 이렇게 부지런히 학문을 하고 계시지만”이라며 세손을 띄운 다음에, 그는 “하지만 학문을 하시려면 좋은 사부와 좋은 빈료(세자시강원 관리)를 둬야 합니다”라며 비판의 대상을 세손의 빈료인 홍국영 쪽으로 사실상 압축했다. 이제 심상운은 노골적으로 홍국영을 비판한다.
“저하의 빈료는 과연 정직하고 충성스럽습니까?”
“저하의 빈료는 과연 입이 무겁습니까?”
이는 궁 안에서 들은 이야기를 밖에서 누설하고 다니는 홍국영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그런 인물을 곁에 두고서 어찌 세손이 군왕의 도리를 익힐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었다. 이렇게 심상운의 상소는 문맥상 홍국영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한마디 때문에 심상운의 상소는 ‘직접적으로 세손을 음해하는 상소’라는 오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혹시 저하의 빈료는 밖에 나가서 온실수(온실의 나무)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온실수’란 한나라 성제(재위 BC 32~BC 7년) 때의 명신인 공광(孔光)의 고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궁궐 안의 온실전(溫室殿, 조정의 회의장)에는 어떤 나무가 심어져 있습니까?”라고 묻자, 평소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공광은 그 질문에 대해서도 묵묵부답했다고 한다. 이후 ‘온실수를 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직무상 기밀을 잘 준수하는, 입이 무거운 관료를 칭송하는 표현이 되었다.
심상운의 상소문에서 홍국영은 공광과 정반대의 인물에, 세손은 온실수에 비유되었다.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극렬히 방해하고 있을 때에 홍국영이 밖에서 “위(세손)에서 홍인한을 불편하게 여기고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심상운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홍국영은 세손의 발언을 밖에서 누설할 정도로 입이 가벼운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옆에 두고 세손이 어떻게 정도를 걸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상소문의 핵심이었다.
상소문은 정조가 아니라 홍국영을 겨냥했는데...
정후겸과 심상운이 의도한 바는 궁극적으로 대리청정의 철회였다. 하지만, 상소문의 문맥은 어디까지나 홍국영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심상운의 글에서는 결과적으로 ‘온실수’라는 표현이 강조되고 말았다. 심상운은 ‘홍국영은 공광과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었으나, 세손을 비유하는 온실수라는 표현이 결과적으로 강조되고 말았다.
심상운의 상소문에서, 홍국영은 ‘빈료’라는 일반적 표현으로 지칭된 데에 비해 세손은 ‘온실수’라는 아주 인상적인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온실수라는 표현이 가장 강하게 기억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 상소문은 세손측이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세손을 직접적으로 음해하는 글이 될 수도 있었다.
세손측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심상운의 상소는 세손을 음해하는 상소”라고 몰아붙였다. 세손측이 약간 억지를 부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손측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 투옥되는 세손 반대파들. <이산> 제42회 예고편에서. ⓒ MBC
세손은 영의정 이하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세손측은 대신들이 아직 그 상소문을 읽지 않은 점을 활용했다. “그 상소문에는 세손을 가리키는 온실수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고 세손측은 대신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런 선입견을 갖고 상소문을 읽은 대신들은 당연히 온실수라는 표현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세손측의 말이 좀 억지 같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분위기 속에서는 ‘심상운의 상소는 세손을 음해하는 상소’라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이 일을 바로잡지 않으면 난 대리청정에서 물러나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됐는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세손의 대리청정이 이미 결정된 마당에 세손을 음해하는 상소를 올린 심상운은 당연히 역적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심상운의 상소는 홍국영을 ‘찍어내기는’커녕 도리어 정후겸 쪽에 타격을 입히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세손의 지위는 더욱 더 견고해졌다.
심상운을 내세운 정후겸 쪽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세손 이산은 1776년 4월 하순에 즉위했다. 이로부터 5개월 후인 9월 4일에 왕궁 안의 내병조(궁궐에 파견된 병조의 부속관아)에서는 죄인 심상운에 대한 국왕 정조의 친국이 이루어졌다.
이산, 왕위에 오르다
심상운의 상소가 올라온 7개월 전만 해도 세손이 대리청정 중이라 그 문제를 신속히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확실한 승자가 된 정조는 다소 오만한 태도로 심상운에게 이렇게 국문했다.
“대리청정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었느냐? 그런데 그때 너는 정후겸을 위하느라고 나라에 죄 얻기를 달갑게 여겼구나. 그러니 필시 너에게 무슨 큰 이익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대리청정 중인 나를 음해하고 정후겸 쪽에 섰느냐며 심상운을 나무란 것이다. “나보다 정후겸이가 더 두려웠더냐?”는 식의, 약간 빈정대는 말투였다. 승자의 여유, 승자의 오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날의 친국에서 정조는 심상운의 죄목이 다섯 개라고 선포했다. 그중 두 번째는 이러했다. “차라리 세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정후겸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한 것,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세손보다 정후겸을 더 두려워하여 ‘이 라인’보다는 ‘정 라인’에서 새 하늘을 꿈꾼 심상운은 그렇게 해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의 등극을 방해한 심익창의 자손 심상운은 영조의 손자 정조의 등극을 방해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대물림’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