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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발행인과 함께 '타살'된 3개월짜리 신문

21세기 언론을 향한 충고 <민족일보 연구>

등록|2008.02.13 09:52 수정|2008.02.13 09:52

▲ <민족일보 연구> 겉그림 ⓒ 나남출판

이 신문은 1961년 2월 13일 출생하고 1961년 5월 19일 사망함으로써 짧고도 짧은 3개월을 살다 ‘원치 않게’ 죽었다. 이른바 폐간조치.
그리고 발행인은 1930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하고 1961년 12월 21일 사망함으로써 7개월 먼저 ‘사망’한 신문에 이어 30년을 갓 넘겨 역시 ‘원치 않게’ 죽었다. 이른바 사형.

그리고 신문과 발행인은 1960년 4월 19일 터진 4·19혁명이라는 긴박한 희망과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5·16 군사정변이라는 어이없는 반전 사이를 지나가다 ‘시대적 사명’을 다한다는 목표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기도 전에 박정희 군사정부 아래서 ‘원치 않게’ 죽었다.

신문도 발행인도 역사 속으로 스러진 뒤 그렇게 4∼50년이 지난 21세기 초. 또 한 사람이 그 오랜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도 뜨거운 그 열정을 파헤쳤다.

<민족일보>, 이 신문 이름이다. 조용수, 발행인 이름이다. 진보언론, 대안언론을 자처하던 신문과 그 발행인은 꽃 한번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역사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간간이 메아리치던 소리를 최대한 모으고 모아 김민환은 <민족일보>와 발행인 조용수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이제 역사 위에 좀 더 깊이 새기려고 한다. 

민족일보 발자취에 비춰 본 21세기 한국 언론

신문은 사실상 태어나자마자 죽고 발행인 역시 꽃 피울 나이에 죽은 사건. 우리 가운데 귀동냥으로나마 이 사건을 아는 이들이 지금 얼마나 될까. 세계 신문 역사를 통틀어보아도 한 해에 신문과 발행인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민족일보>와 발행인 조용수를 대신해 그렇게 상처 깊은 한숨을 내쉰다.

<민족일보>가 태어난 시기는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꽤 의미 있는 시기였다. 분단 한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통일 한국이라는 열정이 새롭게 해석되려는 시기에 태어났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한과 북한은 ‘타다 남은 재와 꺼지지 않은 불씨’ 같았다. 남북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지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당시 남북 관계는 차가울 때로 차가운 때였다. 그 때 4·19혁명이 일어났고 그야말로 세상은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만들려는 의욕으로 넘실댔다. 그런 의욕은 자연스레 통일 한국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당시 남한 사회는 분단 한국이라는 내부 상처와 냉전이라는 외부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통일한국 논의는커녕 사회적 공감대 조성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냉전보수 의식이 가득하던 50∼60년대에는 말이다. 그리고 민족일보는 그 사회적 공감대 조성 역할을 의미있는 역할을 하려는 큰 꿈을 '중립화 통일론'에 담아 세상에 태어났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냉전보수 의식으로 똘똘 뭉친 보수신문들이 그득하던 50∼60년대에 말이다.

<민족일보 연구> 전에도 <민족일보> 사건에 관한 연구는 있었다. 그러나 간간이 보도되던 언론 기사나 역시 간간이 시도된 몇몇 연구물로는 <민족일보>가 꿈꾼 ‘시대적 사명’의 의미와 그 시대 상황을 다 담아낼 수 없었다. 물론 지은이가 그동안 보도된 기사나 연구물들을 무시하거나 그 무거운 역할을 홀로 다 해보겠다는 건 아니다.

지은이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울렁이는 정치상황 때문에 민족일보 사건을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이제는 그 일을 제대로 시도할 때가 되었다 여겨 이 연구를 시도했다는 뜻을 내비쳤다.

앞서 말했듯이 <민족일보>는 참 흥미로운 시기에 태어나 어이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민족일보>가 그 짧은 생존기 내내 부르짖은 중립화 통일론은 사실 지금은 충분히 사회적 논의 주제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각으로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논조를 띠었던 민족일보가 시대적 불운이라는 '죄 아닌 죄'를 안고 갑자기 스러졌던 게다.

<민족일보 연구>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일단 구성부터 논문 형식인 데다가 전체 분량 중 3분의 1은 민족일보 사건 재판기록이다. 철저히 자료 분석에 기초한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민족일보>는 지식인을 주 독자층으로 삼았으며 각종 사안에서 '선택과 집중'식 편집전략을 세웠다. 또한, 주관성 짙은 머리기사를 많이 사용하며 타 (보수) 신문과 차별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신문 발행 목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미 관계나 남북문제에 관한 인식과 보도 방식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존 신문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아도 그 의미가 생생한,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1면 상단 좌측에 떡 하니 자리했던 4가지 신문 발행 목표는 다음과 같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

한국 현대사를 어렴풋이 아는 이에게도 이 신문 발행 목표는 대안언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국제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는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사회에서 이 책은 그래서 단순히 역사기록물이나 논문으로만 평가받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21세기 대안언론을 향한 따끔한 질책과 현실적인 조언을 민족일보 사건에서 찾길 바라는 지은이 의도를 더 많이 곱씹어보아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언론구조는 이런 이상적인 모형과는 거리가 멀다. 주류신문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기보다 반(反) 진보의 기수가 되어 있다. 기간방송은 정권이 바뀌면 언제나 때맞춰 바뀔 개연성 위에 존재한다. 주류언론에 대한 불만 덕분에 급성장한 인터넷매체는 객관성, 균형성, 공정성이라는 전통적인 언론규범조차 무시하며 좌우의 특정정파를 편들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요인이 작동해 우리사회의 공론장은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화한 투기장(鬪技場)이 되고 말았다. (중략)

이제라도 사회는 사상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하며, 좌우의 대안언론은 활기차게 제 주장을 펴되 스스로 품격을 지켜야 하고, 그 무엇보다 주류언론은 통합의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여러 종류의 언론이 함께 사는 길이며, 우리 사회가 품격을 갖추어 숙의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전제조건이다. 우리가 불러야 할 <민족일보>를 위한 진혼곡의 내용은 다 정해진 셈이다.” (이 책, 237쪽)

한국형 대안언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흐름을 이끌어갈 수 있는 새로운 목소리를 지녔으면서도 지나치리만치 공격적인 표현방식을 제때 조절하지 못하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급기야 ‘원치 않게’ 스러지는 아쉬운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는 <민족일보>.

지은이 김민환은 <민족일보>를 보는 진한 사랑에 한줄기 아쉬움을 그렇게 담아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다매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대안) 언론들과 통일한국을 꿈꾸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지은이가 선뜻 불편한 표현도 마다하지 않고 쓰린 조언을 남기게 된 이유이다.

20세기 어느 짧은 때에 점보다 더 작은 발자취를 남기고 진한 아쉬움만 남긴 채 스러진 <민족일보>. 만일, <민족일보>가 그렇게 멀어져가는 '역사'로만 남았다면 그 아쉬움은 진짜 한(恨)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21세기 첫 십 년이 다 가기 전, '20세기 역사'는 다시 '21세기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2008년 1월 16일. <민족일보>와 발행인 조용수는 드디어 21세기 법정에서 20세기 내내 이고 살았던 그 질기고 질긴 '죄 아닌 죄'를 벗어던졌다. '민족일보 사건'을 덧씌우고 있던 그 '죄 아닌 죄'를 진짜 훌훌 털어버린 게다. <민족일보> 발행 47주년을 맞이한 2월 13일에 보는 <민족일보 연구>는 그래서 더 새롭다.
덧붙이는 글 <민족일보 연구> 김민환 지음. 나남, 2006.

[참고]
1. <오마이뉴스>(2008. 1. 16.) "그들의 판결은 진실을 잠재울 수 없었다" -‘민족일보 사건’ 47년 만에 무죄선고, 그 의미는
2. <연합뉴스>(2008. 1. 16)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47년 만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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