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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 닿은 짚풀은 '예술'이 된다

[강화도에서 만난 사람] 짚을 꼬아 창조한 예술, 짚풀공예가 조원규옹

등록|2008.02.15 11:26 수정|2008.02.15 11:26

▲ 짚풀공예가 조원규씨 ⓒ 전태영

짚풀공예가. 낯설게 들리는 이 직업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짚신 두 짝이 전부였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입도 얼고 손도 얼었다.

초지리 대흥부락(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마을회관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는 한 할아버지에게 "이 마을에 짚풀공예가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고 말하니 기다리라고 말한다. 마침 회관에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선한 눈을 가진 할아버지가 창문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묻는다. 조원규(74)옹이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있으려니 "날이 춥다"며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한다. 작은 방 안에서는 한바탕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앉아서 가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인사를 하고 질문을 시작했다.

짚을 꼬아 예술을 창조한다, 짚풀공예가 조원규옹

"아이구, 죄송하긴 뭘 죄송혀. 취재할 땐 다 그런 거여. 묻고 싶은 거 다 물어봐."

"괜히 정신만 사납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에 조옹은 손을 내저었다. 그는 "짚으로 신도 맨들고, 망탱이(망태)도 맨들지"라고 말했다.

"예전에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 때 우리들 고무신이랑 다 뺐어갔어. 그래서 신을 신을 게 없었지. 아무 것도 없었어. 그래서 짚신을 이렇게 꼬아가지고 신발 맹글고…."

그는 50년 전부터 가계를 이어받아 3대째 짚공예 일을 해왔다. 짚신을 스무살 전에 '삼았다'라고 말한다. 짚을 '삼는다'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는 짚을 '삼는' 법을 배우며 가계를 이어가다가 지금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현재 교통사고로 5년째 식물인간 상태다.

"옛날에 건강할 때는 나 많이 도와줬지. 짚도 따주고, 새끼도 꽈주고..."

조옹은 월·수·금 이렇게 일주일에 세 번 짚으로 작품을 만드는데, 강화군청에서 지원금 20만원 정도를 받는다. 그나마 3일 중 하루라도 빠지면 15만원을 받기도 하고 13만원을 받기도 한다며 대중없이 받을 때가 많다고 한다.

20만원은 너무 적게 받는 것 아니냐는 물음엔 "정부가 어려우니까 할 수 없지, 지금 많이 어려우니까"라고 말하고는 허허 웃는다. 그래도 그 돈이 쌀 사고 담배 태우기엔 충분하지는 않다는 말을 뒤에 덧붙인다.

스무살 전부터 짚을 삼은 노인 "고무신도 뺏겨 짚신 꼬았지"

▲ 여러 종류의 공예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 전태영


조옹이 살고 있는 대흥부락은 2006년 군청으로부터 '짚풀공예 마을'로 지정됐다. 마을에 조옹처럼 짚풀공예를 하는 사람이 또 있냐고 물었더니 8명 정도의 짚풀공예가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 1시부터 5시까지 작업을 하며, 가끔씩 군청에서 직원들이 나와 작업 상태를 보고 간다고 한다.

짚을 '삼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요즘은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보통 한겨울(11~12월) 2달은 쉬는데, 이 때는 지원금도 나오지 않는다. 3~4월 정도 되어 어느 정도 날이 풀리면, 다시 짚풀 공예를 시작할 예정이다.

"겨울엔 돈이 없어. 작업을 해야 돈을 주는데 요즘은 작업을 안 하니까."

조옹은 이제 공예품 전시장에 가자고 하며 마을회관 정문으로 가더니 문의 동그란 손잡이를 비튼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다.

"어라? 문이 잠겨 있네? 지금 회장도 없는디…."

곤란한 듯 말하며 현관의 서랍을 열어보더니 열쇠가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꾸러미를 꺼내어 손잡이의 구멍에 하나하나 맞춰본다. 맞는 열쇠가 한 개도 없다.

"이거 클났고만…. 취재할라믄 이거 꼭 봐야 되는디…."

▲ 조원규씨가 해초로 만든 종두래끼(종두래기)를 들고있다 ⓒ 전태영

열리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괜찮다고 말하자 계속 열쇠를 맞추어 보기만 한다. 그래도 맞는 열쇠가 없자 조옹은 아쉬운듯 밖으로 나와 건물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민다.

잠금장치를 해놓지 않았는지 스윽 창문이 열리고, 전시장이 보인다. 전시장이라기보다는 훵한 느낌이 드는 방이다.

선반이 있고, 그 곳에 짚으로 만든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창문을 타넘어 선반 앞으로 가자, 그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하나씩 설명을 한다.
 "요건 해초말려서 만든 종두래끼(종두래기). 조개랑 소라 뭐 이런거 여따가 넣는겨, 요건. ……. 요건 옛날에 물 긷는 할멈들이 이렇게 머리다 얹구댕겨. 뙈리여 뙈리. 물독에 그냥 머리 받치면 머리 아프잖아. 긍께 요걸 머리다 이고 댕긴 거여. ……여기 있는 건 망태. 요렇게 구멍 큰 건 골망태. 허허허. 별 게 다 있지."

아쉽고 뿌듯한 그의 짚 삼기

옛날엔 농사 아니면 짚을 삼아서 공예품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잇는 일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생계를 위해 이어오고 있는 일이지만 조옹은 자신이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순히 영리목적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말했다.

좋아서 하지 않았으면 평생 하지도 못했을 거란 얘기다. 취미도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어떤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자신이 이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결국은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평생 짚을 삼게 한 원동력이자 자부심이었다.

"지금은 우리의 좋은 민족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상태잖어. 나라도 계속 이 일을 해서 나중에 후손들한테 '이런 게 있었다'라고 알려야지. 지금 다 사라지는 단계인데, 하나가 꾸준히 지속되지 못하고 없어지는 게 아쉬워. 근데 나는 그걸 남기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뿌듯허지."

짚을 삼아오면서 힘든 일은 없었냐는 물음엔  "힘들 게 뭐 있겄어, 평생 해오던 일인디"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 탓에, 일흔이 넘는 세월 동안 힘든 일이 있어도 그저 속으로 묵묵히 삭여왔던 그였으리라. 그의 우직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 구경을 마치자, 조옹은 갑자기 짚신 한 켤레를 내민다.
"이거 가져가. 취재혔다고 생색 좀 내야지. 허허."

짚으로 엮은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단단해 보이는 신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평생 하실 거냐"고 물었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평생 삼으야지"라고 말한다.

"짚풀공예, 평생 삼으야지..."

▲ 일일이 손으로 짚을 꼬아서 만든 공예품들 ⓒ 전태영

또 오라며 나오는 길까지 배웅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가방 안에 짚신을 조심히 넣었다.  

50년이 넘은 지금 그에게 '짚'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메마른 풀 따위가 아니다. 그의 손을 거치는 순간 마른 지푸라기에 혼이 불어넣어지고, 곧 예술로 승화된다. 5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짚을 비벼 새끼를 꼬았을까.

그가 찬 공기에 굳어버린 손을 비빌 때마다 났던 서걱거리는 소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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