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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양지보다 음지를 더 기억하거라

[편지] 산촌에 있는 애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에게

등록|2008.02.14 18:41 수정|2008.02.14 18:41

아들.이젠 제법 어른티가 난다. ⓒ 강기희

아들아, 연일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구나.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나야 할 바람에 비하면 이 정도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끊임없이 밟거나 밟혀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게 이 세상이란다. 상처를 입거나 상처를 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 요즘의 세상 꼴이란다.

컴퓨터 게임은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삶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루에만 해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어긋난 정보와 툭툭 던져주는 어설픈 가설들이 진실을 덮고 있기에 다음날 아침의 삶조차 예측하기 쉽지 않구나.

그러나 아들아, 진실은 언제나 우리의 손바닥 아래에 숨어 있단다. 진실을 서둘러 덮으려는 손의 뒷면에 우리가 알고 싶은 진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비가 있는 곳은 오늘(14일)도 어제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고 있단다. 오늘은 돌아가던 세탁기마저 멈출 정도로 춥구나. 뜨거운 물을 붓고서야 얼었던 곳이 녹으며 세탁기가 돌아가더구나.

세상이 그렇단다. 동맥경화에 걸리듯 피돌기가 멈출 땐 뜨거운 뭔가를 급수해주어야 돌아가더구나.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아들아, 어제 졸업식은 잘 치렀니.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 동안이나 규칙적으로 살아야 했던 아들이었는데 잘 견뎌내 주어 고맙구나. 하지만 그 세월은 인생에서 작은 터널 하나를 통과한 것에 불과하단다.

컴퓨터 게임이야 도중에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생은 한 번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낭패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더구나. 그러니 곧 이어갈 대학생활도 그러하고, 남자라면 한 번쯤 가야 할 군 생활도 삶을 이어갈 중요한 징검다리임을 잊지 마라. 설령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고 해도 가던 길을 포기하지 말아라.

후일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직장생활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를 잃게 되면 삶이 힘들어진다는 거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많은 이들이 아들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갔지만 더러는 반드시 통과 해야 할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해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끝내 삶을 포기하는 일까지 생기는 것을 아비는 많이 보아왔단다.

도끼질 하는 아들.설 명절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이 도끼질을 하고 있다. 아직은 어설프기만 하고. ⓒ 강기희

자유는 무한하지 않지만 그 책임은 '무한대'

어제 졸업식, 몹시 추웠던 날이라 몸은 괜찮은지 염려되는구나. 아비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아 서운했겠구나. 하지만 아비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련다. 어제 아비는 아들에게 '자유와 방종'에 대해 말했구나. 닫힌 교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주어지는 '자유'는 아들의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쳤을 땐 '방종'이 된다는 말까지 했단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무한한 것이 아니란다. 사회통념상 지켜야 할 것이 많기에 무한할 수 없는 자유란다. 그러나 자유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라 그 책임을 아들이 잘 받아들여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될 수 있을지 걱정스럽구나.

요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구나. 책임회피는 삶에 있어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며 살도록 하거라.

아비의 주문이 부쩍 늘어가는구나. 아비의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고목과 같이 넉넉한 것이어야 하는데, 작은 염려로 아들의 졸업 기분을 망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들아, 세상을 품기 위해선 자신의 가슴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꼭 말해주고 싶구나. 너른 가슴으로 자잘한 일상을 자양분 삼아 아들이 꿈꾸는 세상을 가득 품었으면 하는 것이 아비의 바람이구나. 그것이 자연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생활이든 원하는 것을 품어 아들이 양지보다는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의 어둔 얼굴을 환하게 펴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아, 지난 설 명절 때 2년 만에 만난 아들을 아비는 따듯하게 품어주지도 못했다. 아비보다 훌쩍 큰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비는 허허, 웃기만 했구나. 지난 세월의 피곤함을 달래주기 위해 잠이라도 푹 재워야 했지만 아비는 아들을 데리고 눈 덮인 산을 올랐구나.

하고픈 말을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라 했던가. 아비는 명절날 아침 공연히 서성거리며 아들 주변을 왔다갔다만 했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비에게 보였던 모습을 이젠 아비가 아들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몰래 멋쩍게 웃기도 했단다. 자식에 대한 아비의 사랑이라는 게 그런가 보구나.

손자를 위한 할머니 사랑.손자 오면 먹이겠다고 명절 닷새 전에 삼겹살을 사다 놓은 어머니. 겨울 추위를 잊으며 야외에서 삽겹살을 굽다. ⓒ 강기희

삶에서 고뇌해야 할 순간이 생길 땐 아비를 찾아오거라

이제 품 안을 벗어나 훨훨 날고 싶어하는 아들을 보며 아비가 할 일은 아들의 날개깃을 다듬어 주는 역할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그러나 이카루스처럼 추락하지 않게 태양빛도 녹여 내지 못하는 튼실한 날개를 만드는 일은 아들의 몫임을 기억해라.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비의 서재에서 골라놓은 책들은 이틀 전 소포로 보냈구나. 생각해 보니 아비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책밖에는 없구나. 어쩌면 아비로서의 입에 발린 근엄함보다, 아비의 사상이나 철학을 논하기보다는 선지자들의 사상이 담긴 책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들에게 이 시점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더냐. 그저 책에서 세상을 읽고, 길 떠남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아비의 삶을 이해해주어 고맙구나. 산촌에 있는 아비의 집과 주변이 마음에 든다는 말 또한 고맙구나. 조용함이 좋아 산촌으로 숨어든 아비에게 벗이 있다면 골짜기를 가르는 바람이고, 하늘을 날으는 새들일 텐데 그 또한 품어 주어서 고맙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구나. 살아가면서 고뇌해야 할 일이 생길 땐 아비를 찾아오너라. 산자락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자연과 벗하다 보면 삶에서 생긴 고뇌쯤은 풀어지지 않겠니. 아비는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아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큰 응원을 보내련다. '힘내, 아들아!' 하고 말이다.

아들아, 졸업 축하하고 더불어 대학 입학도 축하한다. 멋진 대학생활 보내길 바라며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오너라. 천렵도 하고 아비가 갈아놓은 밭에서 땀이나 흠뻑 흘려보자꾸나.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길 기원 하마.

산촌에 사는 아비가.

아들과 할머니.손바닥만 하던 아들이 할머니보다 크다. 이젠 할머니 업고 뛸 정도는 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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