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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이런 걸 메고 가도 되나?

[어느 사십대의 배낭여행기 5] 카오산 도착

등록|2008.02.15 08:44 수정|2008.02.15 08:44
카오산을 가기 위해 버스 승강장을 찾아 밖으로 나오자 남국의 습한 열기가 훅하고 숨을 가로막는다. 계절은 한여름으로 다시 역행한 것 같다. 배낭은 벌써 어깨에 묵직한 중력을 보내고 있다.

승강장에 대기하고 있는 카오산 행 공항버스가 보인다. 얼마냐고 물으니 150바트란다. 곱하기 30을 하면 사천오백원? 어라? 우리나라 공항버스하고 얼마 차이 안 나네. 태국이라고 물가가 그리 싼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돈이 모자란 건 아닐까. 올 적에 김해공항에서 태국통화로 만 바트를 환전했다. 우리 돈 삼십삼만 원이다. 충분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던 것이다. 거기다 비상금으로 미화 백오십 달러를 준비했다.

카오산 행 공항버스에 올라타니 이미 푸른 눈의 배낭객 몇이 앉아 있다. 성별은 남녀가 섞였으나 나이는 대부분 젊은층 일색이다. 이 나이에 이런 걸 메고 가도 되나? 하는 쑥스러운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이번 여행에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자의식이 있었으니 바로 나이와 배낭과의 관계이다. 여기에 대한 타인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배낭에 무슨 나이가 있느냐 내지는 그 나이에도 배낭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호의를 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나이에도 배낭 메고 땀흘리냐, 형편이 안 되면 차라리 가지를 말지, 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같은 배낭객 내지는 주로 외국사람들의 반응이고 후자는 패키지 여행객이나 내 나이 또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러나 곧 무슨 상관이랴, 내가 젊어지면 그만이지 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고 그때까지 입고 있던 남방을 벗었다. 민소매 티셔츠 차림, 드디어 나도 남국의 배낭족 모드로 전환한 것이다.

▲ 차창 밖으로 본 방콕 교외의 풍경 ⓒ 황인규

 버스가 공항을 빠져나가 시내를 향하는 길, 창밖으로 본 방콕의 첫 풍경은 녹음이 우거진 초록도시이다. 시야에 산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너른 평야에 자리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도심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세계 어느 도시치고 시멘트로 도배하지 않은 곳은 없을 테니까. 교외의 녹색 풍경도 잠시, 이윽고 시내로 차가 진입하자 대도시의 혼잡이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

이국의 정취는 어느새 사라지고 텁텁한 시멘트 냄새와 잿빛 풍경이 마음을 건조시킨다. 요란한 간판과 무질서한 소음. 도시 삶이 요구하는 것은 세상 어딜 가나 비슷하다. 조금이라도 이국의 정취를 찾으려 했던 나는 이내 곧 무심해졌다. 간판의 글자만 다를 뿐 방콕의 시내는 우리네 지겨운 도시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버스가 멈춰 선다. 사람들이 일어나 배낭을 멘다. 이곳이 카오산이구나. 버스에서 내리니 다시 한번 열대의 열기가 후끈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갈 곳이 정해졌는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뿔뿔이 흩어진다. 어디로 가지? 또 망연해 진다.

때를 놓칠세라. 눈치 빠른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한 운송수단)기사가 나에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건넨다. 잘 알아듣질 못하겠는데 대충 의미를 새기니 근처 어디를 관광해주겠다는 것 같았다. 거절을 표하고 번화가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출발 전 인터넷카페에서 출력한 카오산 지도를 꺼냈다.

  카오산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현지 여행알선 업체가 두 군데 있다. 사원 뒤쪽의 람부티 거리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어 사방을 둘러보니 바로 길 건너에 사원이 보인다. 지도에 표시된 거리를 따라 들어가니 영어 일색의 간판에 조잡한 손글씨로 ‘동대문’이라고 쓴 간판이 보인다.

▲ 마침 지나가는 배낭 낭자들 ⓒ 황인규

 안에 들어가자 반백의 중년 남자가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데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영락없이 말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의 앉은 자세다.

동대문은 식당도 겸하고 있는데 복도 한쪽 열은 탁자와 의자를 놓은 전형적인 식당 배열이고, 다른 한쪽은 우리나라 식당처럼 좌식으로 앉은뱅이 탁자를 놓았다.

그 탁자 앞에 가부좌 자세로 앉은 사람이 한국사람이 아니면 어느 나라 사람이겠는가. “안녕하십니까” 하자 “어서오십시오.” 한다. 탁자에 앉자 옆 좌석에는 삼십 대 커리어 우먼으로 보이는 동양여성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다. 보나마나 한국인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이 먼저 말을 건넨다.

“지금 오는 길이세요?”
 
“네”하고 배낭을 의자에 내려놓자 “어머, 그걸 메고 다니시게요?”하고 묻는다.
 
“뭘요, 이만한 것 가지고. 밖을 보세요.”

 마침 밖엔 자기 등을 가릴 만큼 육중한 배낭을 멘 서양여자 둘이 지나가자 ‘하긴’하는 표정으로 그녀들이 수긍한다. 이곳은 한국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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