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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 이제 강물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

등록|2008.02.19 09:43 수정|2008.02.19 09:43

▲ 경부운하 저지 국민행동(부산본부)은 지난해 11월 낙동강 하구 염막지구를 찾아 경운기를 몰고 시위를 벌였다. 이곳은 지난 6월 22일 이명박 후보가 방문해 삽으로 뻘을 뜨면서 운하가 건설되면 수질도 좋아질 것이라고 했던 장소다. ⓒ 윤성효

대저
우리나라 강물들께서는
청산백운과 다투지 않고서도
서로 의좋게 살아갈 수 있어서
역사 몇백년 운운 그것 대수 아니었다
한반도 백두대간 품 안에서
유장한 강물소리는 한오백년 구성진 노래였고
청풍명월 따위 시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몇줄 시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연치
아스라한 몇천년 오천년이라 하셨던가
그런데 강물께서 대운하건설 소문을 들어
어디 몸이 아프신 건지
요즈음 묵묵부답 일체 말씀이 없으시다

강물의 푸른 영혼 속에
굽이치는 역사 아프게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어머니 강물이 시작되는 곳
그곳에 시방 막 태어난 신생의 착한 말씀 있었고
이 땅 강물이 끝나는 곳에
새로이 태어나야 할 선지식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
그이들 많이 있었기에
이 나라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강이 맨 처음 어디서 발원하여 어디로 돌아가는지
아무도 묻지 않아도
강은 길을 모시고
길은 강을 공경하며
비산비야 비옥한 땅이거나 성근 땅이거나
농업이 계실만한 곳이 보이면 가던 길 멈추어
여기 강마을 도리마을도 그렇게 태어나셨을 것이다

궁벽진 땅 논과 밭 보듬어
오곡백화와 동기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 나라에 꽃들 피어났을 것이다
벼꽃이었다 보리였다 고구마 감자 고추 참깨 밀이었다
사과꽃이었다 천도복숭아였다 배였다 살구였다
늙은 소나무 실한 솔방울 하나 지상에 살그머니 내려놓았다
막 새잎을 틔우기 시작한 신갈나무는 연두빛을 발하며
강을 천천히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어제밤 어느집 외양간에선 눈매가 참한 암송아지가 태어나셨다
또 어느 집에선 먹성이 좋은 돼지새끼 열두마리 어렵게 눈을 떴다
숲 속에선 고라니가 새끼를 순산했다고 아비고라니 발놀림이 분주했을 것이다
강가 갈대밭에서는 붉은머리오목눈이새들 짝짓기가 한창이고
강 끄트머리에서는
큰고니 한쌍이 강의 중심을 찾고 있고
혼인색으로 더 아름다워진 쏘가리 피라미들 숨소리가 여울 속에서
점점 빨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도리 마을에서 살아있는 것은 다 꽃이었다
그 꽃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사는 사람들
그이들 첫마음이 뿌리내린 마을
그이들 깨끗한 소망이 생명을 보듬어 안는 시간
무자년 정초 신새벽
몸살을 앓고 있는 정선 아라리 동강을 거쳐
충주 목계나루 서둘러 지나와서
여주땅 점동면 도리 두물머리 여강에서
잠시 숨고르기 하는 강물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무슨 할말이 더 남아 있음인가
강께서 보시기에도
오늘 이 세월이 참으로 불쌍했던 것이다

혹독한 시간이야말로
캄캄한 어둠이야말로
가장 크게 빛나는 꽃이었던 시절
한때 시를 써서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초로의 한 사내가
여강 갈대밭에 무릎 꿇어 두시간 좋이 앉아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부대운하 건설 논의로 상심이 큰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강마을 입구 바람에 펄럭이는
'경부대운하 반대하는자 과연 여주 군민 맞는가'라는
참담한 현수막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그는 강에게 빌었을 것이다
올 한해 벼농사 콩농사 고추농사 감자농사 고구마농사 들깨 참깨 농사 복숭아 농사
잘 짓게 해달라고
자식들 무병무탈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그리고 또 빌었을 것이다
올해에도 여강 갈대숲 모래톱에
고라니 오소리 수달 큰고니 왜가리 검은댕기해오라기 종다리 물총새 개똥지바퀴 두루미
누치 피라미 치리 쏘가리 버들치 동자개 각시붕어 모래무지들
그이들 맘놓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여강에 돌아와
우리와 함께 세세년년 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그때 아주 낮은 목소리
강의 말씀 들려왔을 것이다
경부대운하 건설은
그저 재앙이 아니오 흉측한 범죄요 대범죄란 말이요
아아 우리 어머니의 죽음이란 말이요
그러나 이순을 바라보는 그는
강물께서 흐느끼며 조용히 들려주는
강의 말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큰고니 두 마리 푸드득
여강 너머 서쪽 하늘을 향해 고단한 날개를 펴고 있었을 것이다
노을은 또 슬프도록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루가 또 그렇게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 '도리'는 홍일선 시인이 사는 여주 점동면 마을 지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홍일선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농토의 역사> <한알의 종자가 조국을 바꾸리라> <聖 시화호(근간)>등
현재, 시의 거울 시의 경계 <시경><한국평화문학> 편집주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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