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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다

김제 금산면 청도리 일대 증산교 교주 강증산 유적

등록|2008.02.16 16:03 수정|2008.02.16 20:21

▲ 강증산의 자취가 서린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일대. 멀리 금평저수지가 보인다. ⓒ 안병기


미륵신앙에 뿌리를 둔 증산교의 성지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이래 민중의 가슴에 소리없이 자리 잡은 뿌리깊은 신앙이었다. 현재까지도 미륵신앙에 뿌리를 둔 종교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증산도 역시 그 뿌리를 미륵신앙에 두고 있다.

증산교 교조 강일순은 모악산 자락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금산사에서 멀지 않은 구릿골에서 천하광구의 뜻을 펼쳤으며 죽기 전에는 "나를 보려면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므로 금산사에서 구릿골에 이르는 공간은 증산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성스러운 땅이다.

증산 강일순은 1871년 9월 19일 전라북도 고부군 서산리,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증산이라는 그의 호는 집 뒤에 있는 시루봉(甑山)에서 따온 것이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남의집살이와 나무꾼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7년에는 처남 정남기의 집에 글방을 차려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유·불·도교에 관한 서적과 전래의 비결서 등을 두루 읽었다. 그러나 서당은 이웃 고을에서 발생한 동학혁명으로 말미암아 1년여 만에 문을 닫는다.

동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후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해 홀연히 천하유력의 길을 떠났다. 동학혁명의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고 '광구천하'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샛말로 한다면 민족모순에 눈떴다고나 할까.

마침내 천지공사를 위한 터를 잡다

금산사 경내를 걸어 나오다 보면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문과 애국지사 김형렬(1862 ~ 1932) 선생비가 서 있다.

1903년, 강증산은 모악산 아래 구릿골에 '모든 병든 중생을 치유하겠다'라는 광제국이란 이름의 약방을 열고 천지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제자 차경석의 이종누나인 고판례를 맞아 재혼하여 수부로 삼았다. 수부란 ‘뭇 여성의 머리’라는 의미다.

▲ 견훤성문. ⓒ 안병기

증산은 그녀를 후천 남녀동등의 세계를 열어 가는 존재로 내세웠다. "이 여인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며, 이 여인이 먹으면 천하 사람들이 다 먹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김형렬은 구릿골에서 성장했지만 환평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금구 내주평에서 살 적에 갑오동학혁명에 참가했다. 청주전투에서 죽게 된 것을 강증산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귀향한 뒤로는 동학과 인연을 끊고 가업에만 종사했다.

점차 가운이 기울고 살림이 곤궁해지자 잠시 용화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 뒤 가세가 더욱 기울자 하운동 제비창골에 있는 선산 재실인 영사재로 이사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던 김형렬이 강증산과 다시 만난 것은 1901년 7월이었다. 금산사 돌무지개문 위에 앉은 증산이 "김형렬을 부르고 계시더라"라고 증산도 도전은 서술하고있다.

일제 강점기 종교들이 가진 항일의 성격

▲ \김형렬 등 28인애국지사충혼비. ⓒ 안병기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강증산이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중통인의(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봄)'의 깨달음을 얻고 구릿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었다.

김형렬은 1909년 강증산이 죽은 뒤 강일순의 부인 고판례가 교단을 창립할 때 거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차경석의 전횡에 반발해 교단을 탈퇴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직접 교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서울로 가서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곧이어 교단 명칭을 미륵불교로 바꾸었다.

김제 금산사에 본부를 두고 교세를 확장해나가다 그의 죽음과 함께 교단이 해산되었다.

김형렬은 일본 배척운동을 하던 중 1919년 치안을 위협한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태동했던 종교들은 그렇게 은연중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다 - "민중이 곧 한울님"

▲ 증산교 본부. ⓒ 안병기


▲ 금평저수지. 저수지를 돌아가면 제비산 아래 구릿골이 있다. 하얀 건물은 예전 구릿골 약방 터에 살던 이가 운영하는 종이학 레스토랑. ⓒ 안병기


▲ 예전에 있던 스레트 지붕 건물을 헐고 '복원'한 구릿골 약방. ⓒ 안병기


금산사 주차장에서 원평 쪽으로 오다 보면 용화동이 나오는데 그 마을엔 증산교 본부가 있다. 이상호·이정립 형제가 세운 것이다. 모악산 자락만 이런 증산교 교파가 5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거기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관희교 못 미쳐 금평저수지가 시작되기 직전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 저수지가를 펼쳐진 길을 따라 서쪽으로 900여 m가량 들어가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나온다. 이곳엔 강증산이 광제국이라는 약방을 열었던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김준상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엔 강증산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대나무밭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8년 동안 머무르면서 강증산은 방 한 칸을 수리해서 조그마한 약방을 차렸다. 구릿골약방에서 사람들을 고치기도 하고 농악 장단에 맞춰 ""민중이 곧 한울님"이라고 천명하며 천지굿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는 하나로 통일돼 있으며, 만물 사이의 원한을 푸는 해원을 통해 생명의 뿌리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증산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약방에 불러모으고 나서 "천지공사를 끝마쳤다"라고 선언했다. 한 달여 동안 곡기를 끊은 그는 마침내 수제자였던 김형렬의 집에서 40여 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1909년 6월 24일의 일이었다.

오늘날, 구릿골약방 터는 오늘날 민족종교의 원류를 찾는 많은 사람의 참배 대상이 되고 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강증산의 유해

▲ 증산 법종교 본부. ⓒ 안병기


구릿골을 나와 관희교를 건너 원평 쪽으로 가다 보면 저수지의 초입에 닿기 전 좌측 언덕에 절 비슷한 건축물이 밀집된 곳이 나온다. 강증산의 딸 강순임과 사위가 창시한 증산법종교가 있는 곳이다.

이곳 영대에는 강증산 내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서로 차지하려고 추종자들이 법정싸움까지 벌였던 강증산의 유해는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팔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법종교 경내엔 미륵불을 모신 삼청전, 단군을 모신 태평전, 각 성씨의 시조를 모신 승도묘 등이 있다.

소멸 시효가 없는 '해원상생'이라는 개념

증산이 살았던 시기(1871~1909년)는 조선의 국운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의 침입에 따른 민족모순과 봉건 질서라는 계급모순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강증산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반상의 차별, 적서의 차별, 노비에 대한 차별, 직업의 귀천 등 조선의 봉건적 굴레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천시대는 양의 시대였으나 후천시대는 음의 세계가 올 것을 예견했다.

나중에 강증산은 자신의 법통을 그의 제자였던 차경석의 이종 누이 고판례라는 여자에게로 넘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랄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차경석은 나중에 보천교를 세웠다. 해방되고 나서 보천교가 망하자 보천교 건축 중 일부는 뜯겨져 서울 조계사와 전주 경기전 건축에 쓰이게 된다.

강증산은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다. 조선사회가 안으로부터 붕괴해 가고, 밖으로는 승냥이 같은 외세가 몰려들던 19세기 후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해법으로 증산교를 세웠다. 한 세기가 지나가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모했지만 그의 사상은 아직도 용도폐기될 줄 모른다.

증산의 사상은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지하 시인이 쓴 <남조선 뱃노래>라는 책만 해도 "이 길은 남조선의 배질이라"라는 증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증산도 진리의 핵심개념인 '해원상생'은 이 극심한 갈등의 시대에 전보다 훨씬 유효한 슬로건이 돼 있다. 문제는 '해원'의 주체가 원한을 맺게 한 사회적 강자여야 한다는 점일 테지만.

금평저수지를 스쳐 지나간다. 물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소금이 부패를 막듯이 차가움 역시 부패를 막는다. 소금과 차가움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아이콘이다. 종교여, 자꾸만 세상의 온기를 느끼려 파고들지 마라. 금평저수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수지 서쪽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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