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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두 눈 부릅뜨고 말하더라!

숭례문 유정(有情)

등록|2008.02.17 16:06 수정|2008.02.17 16:09
“산 효자는 없고 죽은 효자는 있다”라는 말이 있다. 숭례문이 죽어서야 우리의 가슴에 귀중한 존재의 가치를 일깨우는구나. 만백성의 가슴속으로 다시 처연히 부활하고 있구나. 부모 잃은 망자의 슬픔처럼 망건을 두르고 하루 종일 엎드려 장탄식의 곡을 하는구나. 겨울 하늘에 검은 천이 휘날리고 흰 소국이 故 숭례문 영전에 소복이 쌓이고 있구나.

600년 근엄한 자태를 노숙자들이 관리하는 나라


괜찮은 줄 알았다. 부모처럼 늘 거기 있었기에 무량무량 강건하게 잘 사는 줄 알았다. 세찬 비가 내리고, 천둥이 몰아쳐도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다. 수문장들이 철수하고 그 자리에 일군의 불경스런 무리들이 밤마다 진을 쳐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지켜야할 종손들은 어디가고 600년 근엄한 자태를 노숙자들이 관리하는 나라. 밤마다 방뇨와 식음의 찌꺼기들이 어지러이 쌓이고, 라이터 불이 여기저기서 번뜩일 때도 우리는 정녕 몰랐구나. 그냥 무덤덤하게 당신을 지나쳤구나. 언제든지 일어날 재앙이었음을 진작 몰랐구나.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내 무관심도 당신을 죽이는데 일조했구나.

  낙산사, 운정전, 수원화성을 통해 당신은 화마의 위험을 수없이 경고했지만 후손들은 이렇게 대책 없이 차일피일 세월만 탕진했구나. 먼 선대부터 함께해온 당신 종친들이 하나 둘 화마에 쓰러져 갈 때, 당신 역시 얼마나 다급하고 비통했을까.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 앞에서 사진만 찍었구나. 당신을 배경으로 내 치적을 알리는 데만 열중했구나. 정말이지 한 번도 당신의 바싹 마른 숨결을 응시하지 못했구나. 정녕 당신의 이름처럼 예를 다하여 모시지 못한, 우리는 불경스런 후손이었구나.

백가지 회한과 천 가지 죄만 남는구나!

이렇게 한 순간 당신을 보내고 나니 백가지 회한과 천 가지 죄만 남는구나. 살아생전에 모르던 죄가 죽어서야 뼛골에 사무치는구나. 부모처럼 “아프다” 는 말 한마디 자식에게 내 뱉지 못하고 이렇게 망연히 숨을 거두었구나. 불경한 백성의 불장난에 한 순간에 낡은 삭신이 바스러졌구나. 선조 이래 600년 한수 이남을 아우르던 기풍은 온데간데없구나. 울음이 그친 자리에는 윙윙 겨울바람만 차구나.

사당을 짓고 내 유골을 보존하라!


앙상한 뼈만 남은 숯덩이, 숭례문이 유언을 하는구나.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죄를 묻는구나. 이 나라 종손들이 직무를 방기한 죄, 책임을 회피한 죄, 노숙자들에게 야간 경비를 맡긴 죄, 내 유골을 다시 들판에 함부로 방기한 죄… 죄를 준엄하게 묻는구나.

 다시 두 눈 부릅뜨고 이 나라 대종손에게 호통을 치는구나. 사당을 짓고 내 유골을 보존하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망각이다. 내 기일을 문화재 보호의 날로 선포하라. 기일에 제를 올리고 문화재의 소중한 의미를 만백성에게 되새기게 하라.

그리고 이 날을 삼천리 방방골골에 산재해 있는 내 종친들의 안위를 점검하는 날로 삼으라. 내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거기서 찾으라. 그것이 내 화려한 부활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명심하라.


더 이상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나는 이제 너희 백성의 가슴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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