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역사팩션 21] <철가면>이 <무쇠탈>로 둔갑

<제국과 인간> 1부 상해의 영혼들

등록|2008.02.18 09:30 수정|2008.02.18 09:30
"지난번 최 대감 둘째 딸을 만나 잘 해줘서 고맙다. 그 아이도 네가 싫지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더라. 처음 혼인 말이 있었던 큰딸 영애는 일본으로 유학가기로 했다더구나. 그러니 이제 혼인을 서두르기로 하자."
"아버님 족보는 삼천 원을 요구합니다."
"속히 추진해라. 족보도 네가 혼인을 해야 소용이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아들을 보았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유학을 가지도 않고 독립운동 같은 것으로 속을 썩이지도 않는 아들이 노인은 대견하게 느껴졌다.

“혼인을 하면 재산의 삼분지 일을, 아들을 낳으면 또 삼분지 일을 네 앞으로 돌려놓으마.”
“최도애를 한 번 더 만나려 합니다.”
“그래라. 그리고 이번에 내가 자동차를 살까 한다. 너희 둘이 자동차를 함께 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자동차는 아버님이 타시면 됩니다.”

노인은 단정하게 인사까지 하고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다시 보았다.

김태수에게는 제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지녀온 꿈이기도 했다. 그는 유랑 기질이 있는 한량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역마살이라고 불렀다. 형만 제대로 집을 지켰더라면 그는 벌써 조선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가야 했을 사람이었다. 물론 돈이 있어야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걸렸다. 최소한의 자식 도리는 해야 될 성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혼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김태수는 최도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는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김태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여자의 초롱거리는 눈보다는 촉촉한 눈을 좋아했다. 깊이도 있으면서 기운 있어 보이는 눈이면 그것은 최상이었다. 그것은 오윤정의 눈이기도 했다. 최도애는 눈빛을 포함한 모든 외모가 오윤정과 격단의 차이가 있었다.

압구정은 세조 때 득세하여 성종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던 한명회가 지은 호화스러운 정자였다. 압구정 주변은 절경이었다. 한강이 탁 트여 흐르고 있는데다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가 눈앞에 있었다. 김태수가 최도애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경치 때문이었다. 그는 울적하고 답답한 심사를 풀고 싶었다. 사실 압구정은 시인 가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 가객의 기질이나 김태수의 그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도애 양은 독립 운동하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필 왜 그런 말을 물었는지 김태수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최도애는 먼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의외로 심각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의 아내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겠군요?”

최도애는 갑자기 불안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그런 분은 저 같은 여자를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님은 요새 바쁘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언니는 일본에 가셨나요?”
“네.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김태수는 한강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압구(狎鷗)는 한명회의 아호였다. 송나라의 정승 한기가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서재에다 붙인 이름을 한명회가 따서 쓴 것이었다.

“도애란 이름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건널 도, 사랑 애입니다.”
“사랑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군요. 참 좋은 이름입니다. 어감도 아름답고요.”

최도애는 표정이 밝아졌다.

“틀림없이 사랑으로 구원을 얻을 겁니다. 도애 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그걸 보여주고 있어요.”

최도애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김태수는 또 오윤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도애가 김태수의 팔에 가볍게 몸을 기댔다. 그녀는 김태수의 얼굴을 올려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이 더 매력 있어요.”

그녀는 일부러 실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빛이 더 초롱거리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김태수는 최도애의 팔을 뿌리칠 뻔했다.

“다음에는 신극 구경을 한 번 갑시다.”

최도애는 고분고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자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룻배를 타고 광나루로 건너왔다.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소설 <장한몽>은 한양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김태수는 그 소설이 일본의 베스트셀러를 번안한 아류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나온 원작 소설을 주문해 놓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 단성사에서 신극으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태수는 최도애와 함께 인력거에서 내렸다. 그는 극장의 공연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임성구가 제작한 연극이었다. 최근 들어 이인직보다 임성구의 연극 제작이 훨씬 활발했다. 들리는 말로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완용은 친일의 총수답지 않게 일본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 러시아 편이었는데 일본의 강세를 누구보다 먼저 읽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친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했다.

임성구의 극단 '혁신단'은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육혈포 강도>가 만만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이번의 <장한몽> 공연은 진즉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도애는 마음이 조금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한몽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연애담이었다. 최도애는 심순애가 자살하는 장면부터 눈물을 보이다가 구출되는 장면이 나오자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뻐했다.

김태수는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뻔하고 단순하며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에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최도애만 하더라도 장안 명문이라고 하는 한성여고보를 다니고 있는 엘리트 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신교육을 받았어도 그 정도인데, 만약 그녀가 집이 가난하여 교육마저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녀는 본질적으로 시골에서 물 긷는 아낙네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교육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울러 조선인들은 제 것이 귀중한 줄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태수가 보기에 조선의 <춘향전>이나 <옥루몽>이나 <장끼전> 등은 <장한몽>에 비하면 훨씬 고급 수준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조선인들은 좋은 제 것을 보지 않고 나쁜 외국의 것에만 눈을 돌리는지? 그는 약간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는 장한몽의 원작 소설인 <금색야차>를 읽어 보기로 했다. 황금빛 마귀라는 제목은 그래도 배금 풍조를 염두에 둔 제목 같아 보여 괜찮아 보였다. <금색야차>는 일본 작가 오자키 고요의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이미 엄청난 선풍을 일으킨 소설이라고 했다. 원작 <금색야차>는 그래도 돈이냐, 사랑이냐의 갈등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제목에서도 황금만능의 세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중환의 <장한몽>은 노골적으로 눈물을 짜내겠다는 최루성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김태수는 이인직의 <은세계>를 보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은세계>는 그래도 창작 공연물이었다. 그러나 <장한몽>은 번안물이었다. 김태수는 번안소설이 잘 읽히는 조선의 독서 수준에 기분이 나쁠 때가 많았다. <몽테크리스트 백작>이 <암굴왕>으로 바뀐다든지, <레미제라블>이 <애사>로, <철가면>이 <무쇠탈>로 둔갑해야 읽히는 조선의 현실이 그는 못마땅한 것이었다.

차라리 조선의 고전을 지금의 분위기에 맞춰 새로 내 놓는 소설이 백번 낫다고 생각 들었다. <춘향전>이 <옥중화>, <심청전>이 <강상연>, <흥부전>이 <연의각>, <별주부전>이 <토의 간> 등으로 제명이 바뀌어 출간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