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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저 강과 북녘 땅을 무엇으로 녹일까?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24] 파주, 연천, 감악산

등록|2008.02.21 16:57 수정|2008.02.21 16:57

▲ 감악산 정상의 비와 kbs 송신용 철탑, 그리고 철조망 ⓒ 이승철


“오늘은 임꺽정 형님도 한 번 만나 뵙고, 설인귀 하고도 수인사를 해야 되겠지.”
감악산 초입에 들어서면서 누군가 객쩍은 농담을 던진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리고 정상에 올라 북쪽으로 따뜻한 입김을 후후 불어서 얼어붙은 임진강도 녹이고 북녘 땅에 봄바람도 불러줘야지.”

극성스럽게 심술부리던 동장군의 기세가 드디어 한풀 꺾인 것일까? 날씨가 많이 풀렸다, 산림청이 선정한 전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인 파주와 동두천 경계지역에 있는 감악산으로 가는 길은 따뜻한 햇살이 밝고 포근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난 19일 산행을 위해 일행들을 만나기로 한 장소는 전철 의정부역이었다. 그런데 의정부역 대합실에 겨우 10분의 시간차를 두고 다섯 명이 모두 모였다. 이만하면 약속시간 맞추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사는 곳이 서울 강서와 강북, 동대문, 그리고 분당과 수지 등 모두 각각 다른 방향에 거리도 만만치 않게 떨어져 있어서 시간을 맞춰 모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년 이상 매주 한 번씩 만나는 등산 동행이 일행들의 거주지 간격을 많이 단축시킨 모양이었다. 감악산으로 가는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었다. 버스는 15분 간격이어서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 시간여를 달려 감악산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잠깐 걸어 올라가자 등산로 초입이다.

범륜사 입구까지는 포장도로였다. 가파른 콘크리트 포장길을 걸어 올라가노라니 금방 이마에 땀이 흐른다. 왼편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리던 운계폭포가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얼음기둥처럼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의 전설이 깃든 임꺽정봉 ⓒ 이승철


▲ 정상 부근의 전망대와 육각정 ⓒ 이승철


한 굽이를 더 돌아 올라서니 저 앞에 법륜사가 보인다. 옛날에는 이 산에 4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1970년에 중건했다는 이 절이 유일하다. 범륜사는 경내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고 스피커를 울리는 독경소리만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잠깐 들렀다 나와야 될 것 아냐?”
산에 오를 때면 항상 법당을 찾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행에게 다른 일행이 권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날따라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그는 법당을 찾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아니 여긴 왜 이렇게 지저분한거야?”
조금 더 올라가자 작은 쉼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주변이 온통 쓰레기 천지다. 산에 올랐다가 내려갈 때는 항상 쓰레기를 줍는 일행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쉼터와 주변은 정말 요즘 다른 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내려올 때 쓰레기봉투 한 개로는 안 되겠는걸. 쓰레기가 너무 많아.”
작은 쉼터를 지나 오르는 산길과 다른 쉼터도 쓰레기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쓰레기도 많았지만 산의 모습도 몇 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이 등산로 곳곳에 설치해놓은 계단들이었다.

“이 산도 웬 계단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 놨어? 이런 길은 그냥 놔둬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말이야.”
등산로의 불필요한 계단설치도 관할 지방자치단체들의 선심행정이랄까. 정말 별로 위험하거나 너무 가파른 길도 아닌 곳에까지 설치해놓은 계단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주 들녘과 임진강 ⓒ 이승철


▲ 등산로에 설치한 나무계단 ⓒ 이승철


“꺽정이 형님에게 인사들 드려, 이 부근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의 전설이 깃든 임꺽정봉과 장군봉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 정상의 모습도 몇 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겉면의 마모상태가 너무 심해 글자를 판독할 수 없기 때문에 정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감악산비(일명 설인귀비)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비 뒤편에 높직하게 우뚝 솟아 있는 철탑이 전혀 낯선 모습이었다.

돌비의 겉면이 완전히 마모될 만큼의 기나긴 세월을 지켜온 감악산비, 그리고 주변의 군사 시설용 철조망과 어느 방송국의 방송용 송전철탑. 전혀 어울리지 않고 균형이 맞지 않는  세 개의 구조물이 어색한 공존을 하고 있는 풍경이 이채롭기 짝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풀린 날씨와 따사로운 햇살로 포근하던 느낌이 잠깐 사이에 추워진다. 정상은 해발 675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쏴아 몰려오는 북풍이 차가웠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평야지대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요충지였다. 그래서 감악산비의 정체에 대한 추정도 설인귀비라는 설과 함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설까지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매우 좋구먼.”
하산은 북쪽 능선길을 타기로 했다. 몇 걸음 내려오자 목재로 만들어 놓은 전망대와 함께 멋진 육각정이 나타났다. 전망대에서는 하얗게 얼어붙은 임진강과 함께 주변의 평야지대, 북녘 땅까지 보인다. 맑은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도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다.

▲ 북쪽 능선의 까치봉 ⓒ 이승철


▲ 눈덮인 북쪽 산자락과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 ⓒ 이승철


그래서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있을 때는 민간인들이 이처럼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냉전시대가 가고 남북의 평화무드 덕분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산이 된 것이다. 통제구역이었던 산 정상에 멋진 육각정과 함께 전망대가 세워진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산이 옛날부터 전략요충지였던 이유를 알 것 같구먼.”
하얀 선처럼 얼어붙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펼쳐진 평야지대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제 곧 저 임진강도 풀리고 봄이 다가오는데 남북문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군.”
임진강과 북녘 땅이 바라보여서인지 새삼스럽게 남북한 문제에 관심이 쏠리는 모양이었다.

“요즘은 북한도 많이 변하고, 또 달라지고 있다는데 그게 다 햇볕정책이랑 남한에서 조금씩 양보하고 많이 도와준 때문 아니겠어?”
“효과도 없이 퍼주기만 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 같아. 그만한 희생이나 노력 없이 어떻게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남북문제에 대한 일부의 편견과 시각에 대한 비판이었다.

“다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아,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핵무기나 대포의 힘이 아니라 훈훈한 입김과 협력이 절대적인데 말이야.”
일행들은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열망과 함께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소나무가 많은 능선길 ⓒ 이승철


▲ 훈련용으로 설치 해놓고 방치한 간이화장실 ⓒ 이승철


“물론 국방은 튼튼히 해야지. 저들을 100% 신뢰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민족공동체로서의 신뢰감 구축과 함께 경제협력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
등산로 주변에는 콘크리트 벙커와 함께 참호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일행 한 명은 여느 산에서처럼 뒤쪽에서 따라오며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흉물스럽게.”
앞서 걷던 일행이 손가락을 가리킨다. 일부는 쓰러지고 소변용 변기가 가림막으로 세워져 있었다. 바로 등산로 옆에 세워져 있던 임시 화장실이었다. 군부대에서 훈련용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임시화장실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 쓰러지고 퇴락하여 보기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인데 등산로 옆에 이런 걸 그대로 방치하는 무신경이 안타깝구먼.”
일행 한사람이 끌끌 혀를 찬다. 임시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했던 군부대를 탓하는 것인지 산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를 탓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능선 길에는 곳곳에 멋진 바윗길과 함께 상당히 크고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소나무들 사이에 누군가가 작은 돌탑을 쌓아 놓은 모습도 보인다.

“저 산자락 좀 봐. 등산로는 바짝 말라서 보송보송 하지만 북쪽 산자락은 하얗게 덮인 눈이 아직도 한겨울이잖아.”
정말 그랬다. 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포근한 날의 산 속 풍경은 봄과 겨울 두 계절이 능선을 중심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었다.

▲ 메기와 빠가사리, 새우와 참게를 재료로 끓인 매운탕 ⓒ 이승철


하산한 후에는 근처에 있는 면 소재지인 적성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일행 한사람이 민물매운탕을 먹자고 한다. 그는 우리일행들 중에서 민물매운탕을 최고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적성에는 민물매운탕 집이 딱 한 곳 밖에 없었다.

버스터미널 맞은편 길 끝 골목에 있는 이 매운탕 집에서는 메기와 빠가사리. 그리고 새우와 참게를 넣고 끓인 매운탕이 일행들의 입맛을 돋워줬다. 맛있는 매운탕 때문에 평소보다 소주 한 병을 더 마시는 무리를 했지만 일행들의 산행 뒤풀이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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