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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좀 쳐야 남들이 무시하지 않아!

자동차와 골프가 '신분증'으로 기능하는 사회

등록|2008.02.23 10:04 수정|2008.02.23 12:26
골프채, 골프장, 골프뉴스… '지금은 골프 시대'

“PGA에서는 드라이버 티샷이 적어도 290야드는 넘겨야 해요.”
“여자가 파온하기에는 매우 어렵겠군요.”
“천하의 박세리도, 미셀 위도 컷오프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렇죠.”
“….”

얼마 전 가까운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옮겨놓은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그들 이야기를 곁에서 멍하니 듣기만 한 겁니다. 대화중에 박세리와 미셀 위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골프에 관한 얘기인 것만은 분명한데, 대체 무슨 내용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을뿐더러, 게임 규칙은커녕 간단한 용어조차 전혀 모르는, 이른바 ‘골프맹(Golf盲)’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에 나가면 곳곳에 골프 용품점이 화려한 조명을 뽐내며 성업 중이고, 시 외곽 한갓진 곳은 촘촘한 대형 그물을 두른 골프 연습장 차지입니다. 또, 케이블 채널은 물론 이따금씩 공중파 채널에서조차도 골프 방송을 내보내며, 휴가철과 연휴 때에는 골프 여행을 다녀오라며 광고하는 홍보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립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갈라치면 경기도 땅 전체가 머리에 난 상처 자국마냥 산이 파인 채 어지럽게 골프장이 들어서 있는 것이 내려다보이고, 언제부턴가는 광역시는 물론 지방의 웬만한 중소 도시조차도 ‘CC’ 간판에 포위돼 가고 있습니다(사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CC’가 뭐 하는 곳인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일간 신문마다 스포츠면의 절반 가까이가 골프 기사이고, 방송의 스포츠 뉴스 시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것이 골프 관련 소식인 걸 보면, (지인들 말마따나) 저는 이 시대의 ‘기인(奇人)’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골프는 우리나라에서 외려 국기(國技)라는 태권도보다도, 월드컵 4강 신화에 빛나는 축구보다도 훨씬 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누군가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골프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스포츠는 없다고 잘라 말할 만큼 이미 중년들의 대중화된 ‘놀이’가 된 듯합니다.

골프를 치는 '특별한' 이유

몸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흥건하게 땀을 내는 등의 과격한 운동이 아니라는 뜻일 테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의 골프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마다 골프를 처음 시작하게 되는 이유가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얼마 전 동갑내기 지인으로부터 비교적 저렴한 골프 용품점을 소개받으며, 배울 것을 권유 받았습니다. 관심도, 흥미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축구 등 땀 흘리는 운동에 푹 빠져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골프장 건설에 따른 환경 파괴도 마뜩찮을뿐더러 경제적으로도 사치스러운 스포츠라는 편견(?)이 여전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노라니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가 처음 골프를 배운 까닭은 ‘폭 넓은 대인 관계’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밤이라면 술을 마시겠지만, 벌건 대낮에 사람들과 만나서 (골프 아니면)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따져보면 그가 ‘대인 관계’라는 말로 포장하며 만나려는 사람은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경우이기 쉽습니다. 결국 아래에서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고 보면, 상대방의 기호나 취미를 익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예법’이 됩니다. 거칠게 표현해서, 그렇다면 골프는 스포츠임과 동시에, ‘접대’를 위한 도구인 셈입니다.

▲ 한국사회에서 골프는 일종의 '신분증' 기능을 한다. 사진은 골프장 전경 ⓒ 최용호

운동이든 뭐든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골프로 접대를 한다고 해서 나무랄 일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윗분’들로부터 시작된 골프가 생태계의 먹이사슬처럼 보편화되는 과정은 분명 여느 것과는 달리 비정상적입니다.

예로부터 재력과 권력을 함께 지닌 ‘높으신’ 분들이 즐겨 했으니, 골프는 불과 ‘대한민국 몇 %’를 위한 귀족 스포츠로 대우 받았고, ‘삐까번쩍’한 골프채는 대형 외제자동차와 함께 자신의 품위를 높이는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골프를 치는 행위가 상류층의 ‘신분증’으로 기능하면서, 골프는 빠른 속도로 유행처럼 번져 갔습니다. 상류 사회 사람들의 삶의 행태를 따라서 닮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며, (조금 과장하자면) 체면에 죽고 사는 천박한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은지, ‘자동차도 좀 큰 걸로 타고, 트렁크에 골프 가방이 실려 있어야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다’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땅에 살아오면서 겪고 느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체면에 죽고 사는 천박한 우리 사회의 단면

그나저나 얼마 전 발표한 새 정부의 장관 후보자들 역시 우리나라 최고 상류층답게 대부분이 골프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총리 후보자의 아들은 엄연히 군복무 중이라 할 방위산업체 근무 중에 공무를 위한 출장 때에도 골프채를 챙겨 다닐 만큼, 골프는 여전히 상류 사회의 공통된 ‘코드’인 모양입니다.

그분들이 골프를 좋아하건 말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골프를 매개로 한 ‘끼리끼리’의 만남이 혹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그들의 정치 행위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입니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그분들이 골프장 출입을 두고 비난 받을 뉴스거리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눈인사라도 한 번 나눌 요량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삶을 본받아(?) 골프를 배우려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전국의 산하가 골프장으로 변하지는 않을지 괜한 걱정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골프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저와 같은 ‘골프맹(Golf盲)’이 적응하며 살아가기란 무척 힘이 듭니다. 골프장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높으신 분들 보는 것도 꼴사납고, 골프장 만든다며 울창한 삼림을 헐어내는 것도 속상하지만, 무엇보다도 골프 못 친다는 이유로 지인들과의 만남이 소원해지지 않을지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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