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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선 아주 작은 소리나 말도 메아리가 된다

[지리산 삼정 능선의 암자②] 혜암 스님이 지은 암자 문수암

등록|2008.02.24 14:21 수정|2008.02.24 16:29

▲ 문수암 가는 길. ⓒ 안병기


너무 빨리 닿아버리는 목적지는 싫다

문수암으로 가는 길은 편안한 길이다. 눈이 쌓이긴 했지만 미끄럽지는 않다. 산모퉁이 하나를 돌면 그때마다 지리산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다. 숲 안쪽엔 하얀 껍질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거제수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다.

어제 네 놀던 연꽃 대좌엔
아침에 산까치가 와서 울더니
저녁엔 솔방울이 앉아 있구나.
흐르고 흘러서 어찌 산이 산이겠느냐.
어린 사미의 손목을 잡고
돌다리 건너 암자 가는 길,
흰 구름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
- 오세영 시 '흐르는 것이 어찌 여울뿐이랴' 일부

눈 쌓인 겨울산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씩 나그네의 마음을 씻어준다. 금강문이나 천왕문, 불이문으로 들어갈 때마다 속세에서 묻혀온 마음의 티끌이 저절로 씻겨지듯이. 또한 고개나 재는 한 채의 누각이 된다. 고갯마루에 올라설 때마다 마치 큰 절의 2층 누각에라도 올라선 듯 멈춰서서 먼 곳을 조망한다.

이따금 이정표가 나타나서는 문수암까지 가는 길이 아주 짧다는 걸 상기시킨다. "천천히 걸어도 빠르게 닿아버리는 목적지는 싫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어느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진리이다.

산길이란 아이가 사탕을 빨듯 음미하면서 걸어야만 제 맛이 난다. 그러나 삼불사를 나선 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문수암에 도착하고 만다. 길이 가진 단맛을 채 맛보기도 전에 닿아버리는 길이란 얼마나 싱거운가.

▲ 문수암 전경. ⓒ 안병기


▲ 바위와 화학적으로 결합한 문수암 법당. ⓒ 안병기


문수암은 1965년 혜암 스님이 창건한 암자다. 조계종 10대 종정이셨던 혜암 스님(1920~2001)은 문수암 바로 위에 있는 상무주암에서 용맹정진하신 적이 있다. 문수암은 그 당시에 지은 암자로 알려져 있다.

혜암 스님께선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월산 등 20여 명의 스님과 함께 4년간 결사 안거를 시작한 이래 해인사 선원, 송광사, 통도사, 범어사, 지리산 상무주암, 칠불암 등 여러 선원을 거치면서 용맹정진하신 것으로 알려졌다. 해인사 원당암 앞 돌에 새겨진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스님의 말씀은 유명하다. '생사를 초월한 듯 죽음을 무릅쓰고 화두를 참구하라'는 사자후다.

문수암 전각은 조촐하기 이를 데 없다. 법당과 살림을 겸한 인법당과 요사 그리고 해우소가 전부이다. 그러나 좀 전에 거쳐온 삼불사와는 달리 활기가 넘친다. 저쪽 반대편 영원사 쪽에서 넘어온 등산객들 서너 명이 볕이 잘 드는 요사 벽에 기대 요기 중이다.

법당 마당에는 한 스님이 서 있다. 스님은 암자의 고요를 깨트리는 등산객들의 존재가 싫지 않은 표정이다. 합장으로 인사하는 나그네를 보더니 얼른 법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오미자 한 잔을 가져다주신다.

25년 암자를 지킨 혜암 스님의 상좌

▲ 마당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풍경. ⓒ 안병기


▲ 마당 가에서 바라본 지리산 풍경. ⓒ 안병기


오미자차를마시면서 마당가에 스님과 나란히 서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저 아래 금대산(847m)이 보이고 안국사와 금대암으로 가는 길도 보인다. 이번엔 우측으로 눈을 돌려서 지리산 줄기를 바라본다. 아쉽게도 지리산은 중봉만 보일 뿐 최고봉인 천왕봉은 보이지 않는다. 앞산 줄기가 가린 것이다.

"저런, 천왕봉이 살짝 비켜갔군요"라고 했더니 스님 역시 내 아쉬움에 동감을 표시한다. "여기서 스님 혼자 지내세요?" 스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이곳에서 25년 동안이나 혼자 지내셨다고 한다. 이런 산중에서 홀로 25년 동안이나 사셨다니 스님은 정말 강자다. 어떻게 해발 1000m 가량 되는 산중에서 혼자 살 수 있단 말인가. 1, 2년도 아니고 25년 동안이나 말이다.

고독은 약이면서 독이다. 이기지 못하면 병이 되고 이기면 정신의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된다. 고독을 병이 아닌 약으로 만들면서 스님을 단련시킨 건 저 강인한 산줄기들일 것이다. 산 줄기는 인생의 시련을 상징한다.  인생에서의 시련은 산 줄기 하나를 넘는 일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도봉 스님은 혜암 스님(1920~2001)의 상좌였다고 한다. 이곳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게 한 건 그 인연의 끈일 것이다.

좋은 조망지는 자신을 숨긴 채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

▲ 전란 때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피난와 숨었다는 천인굴. ⓒ 안병기


▲ 아담하고 정갈하게 느껴지는 해우소. ⓒ 안병기


법당 입구엔 천인굴이란 굴이 있다. 깊지는 않지만 수십 명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넓이다.전란이 일어나면 인근 마을 주민들이 피난와서 이곳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굴 입구 천장에는 아주 커다란 고드름이 거꾸로 달려 있다. "추호라도 정신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며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 같다.

굴 안쪽에는 나무 다발이 쌓여 있다. "스님께서 직접 하신 겁니까?" 물었더니 "내가 직접한 건 아니고, 일꾼들이 한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신다. 법당 축대 아래 건물을 가리키며 "해우소냐?"라고 물었더니 "해우소가 법당과 이렇게 가까운 절 봤어요?"라고 하시면서 저 아래 아주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그곳이 바로 해우소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해우소에서 앉아 바라보는 경치가 얼마나 좋은지 한 번 가보라고 권유한다.

스님의 권유를 따라 해우소로 내려가서 풍경을 바라보기로 한다. 광창처럼 뚫린 환기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 그럴 듯하다. 확 트인 풍경과 액자 같은 창에 들어앉은 풍경은 어떻게 다를까. 제이 애플턴은 <경관의 경험>이란 책에서 "자신을 숨기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가장 좋은 조망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해우소야말로 그 말에 딱 들어맞는 곳이다. 암자 어느 곳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해우소에서 금대산, 백운산, 삼봉산이 훨씬 잘 보인다.

산에선 아주 작은 소리나 말도 메아리가 된다

▲ 요사 옆에서 등산객과 담소를 나누는 스님. ⓒ 안병기


해우소에 다녀오는 동안 스님께선 김해에서 왔다는 등산객들과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가보지 못한 세계는 동경과 그리움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산중에서 오래 살게 되면 사람이 그립기도 할 것이다. 속세 사람들은 산중을 그리워 하고 산중 사람들은 속세를 궁금해 하는 게 인지상정일 터. 그만 떠나야겠다고 인사를 드리자 "저 약수 한 모금 드시고 가세요" 하시면서 언덕 위를 가리킨다.

스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개집보다 작은 수각(水閣)이 있다. 수각의 문을 여니, 10cm 두께는 돼보이는 얼음 구멍이 있다. 구멍 속으로 바가지를 밀어넣어 물을 떴다. 물이 어찌나 찬지 이가 시려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바가지를 내려놓는다.

▲ 차가워서 가슴까지 얼얼한 약수. ⓒ 안병기

산성을 답사하거나 암자를 순례할 때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약수터다.

사람이 삶의 터를 잡기 전에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물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아무리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처음엔 물이 나와서 터를 잡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물이 끊기는 수도 없지 않다. 그렇게 되면 산성은 기능을 잃고 버려지게 되고 암자는 폐사가 되고 만다.

해발 1000m 가량의 높이에 있는 문수암이 수십 년째 암자로서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이렇게 마르지 않는 약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 위에 잠시 멈춰 서서 스님에게 손을 흔든다. 스님도 손을 마주 흔든다. 산에선 아주 작은 소리나 말도 메아리가 된다. 사람에게나 심지어 사물에게까지도 마음을 활짝 열어 두기 때문이다. "꽃 피는 봄에 한 번 다시 오세요!"라고 소리치는 스님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상무주암 가는 길 내내 뒤따라온다. 산이란 그렇게 유정(有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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