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바라보며 세속의 번뇌를 끊어내는 곳
[지리산 삼정 능선의 암자③]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을 얻었던 암자 상무주암
▲ 길가에 둘러쳐진 싸리 울타리. ⓒ 안병기
▲ 상무주암 법당. ⓒ 안병기
상무주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둘러보니, 전각이라곤 살림을 겸하고 있는 인법당과 법당 왼쪽 바위에 앉힌 작은 산신각뿐이다. 법당 처마에는 '상무주'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경봉 스님의 친필이다.
▲ 경봉 스님(1892~1982)의 친필 '상무주' 현판. ⓒ 안병기
경봉 스님은 화장실을 가리키는 해우소라는 말을 처음 쓴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무주(無住)란 머무름이 없다는 뜻이다. 어딘가에 쓰인 글에서 위 상(上)자를 가리켜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라고 풀어쓴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을 거창하게 해석하려는 버릇은 진실을 왜곡한다. 나는 이것을 그저 저 아래 어딘가에 있었을 하무주암의 존재와 연관지어 해석할 뿐이다.
▲ 송광사보조국사비(2006.4 찍음) ⓒ 안병기
승안(承安) 2년 무오년(戊午年) 봄에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삼의(三衣) 일발(一鉢)만 갖고 지리산을 찾아가 상무주암에 은거하였으니,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제일이며 참으로 선객(禪客)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외연(外緣)을 물리치고 오로지 내관(內觀)에만 전념하였다. -송광사 보조국사비에서 (출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1997).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198년 상무주암에 머물게 된 지눌은 <대혜보각국사어록>을 읽다가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 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禪不在靜處 亦不在閙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라는 구절을 보고 나서 홀연히 깨닫는다.
그때의 상태를 보조국사비문은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상무주암에서의 깨달음 이후 보조국사는 더욱 적극적인 보살행을 지향한다.
끊기지 않고 이어내려오는 선맥(禪脈)
지눌 외에도 상무주암에서 수행한 고승대덕들은 많다. <선문염송>을 지은 보조국사의 제자인 혜심의 뒤를 이어 혜심의 제자인 각운스님도 상무주암에 머물면서 <선문염송설화>(30권)를 펴냈다. 지눌이 창건한 수선사(당시의 송광사) 제6세 사주가 되어 7년간 주석하다 입적한 원감국사(1226~1292)도 이곳에서 수행했다. 원감국사 비문은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홀로 선정에 들매, 그 모습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발자국이 무릎에 찍힐 정도였다"라고 원감국사의 행장을 전한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했던 백용성 스님도 한때 이곳에서 동안거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으며, 제10대 혜암( 종정(1920~2001)과 전남 곡성 태안사 조실이셨던 청화 스님(1924~2003), 엄격한 수행 자세 때문에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성철 스님에 빗대어 '가지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비구니 인홍스님(1908-1997)도 이곳에서 수행했다.
이렇듯 상주암은 수행의 맥이 면면히 이어진 암자이다. 선맥으로만 보면 우리나라 어느 절보다 화려한 곳이다. 현재는 1970년대 선방수좌들 사이에서 '도인'으로 불리던 현기 스님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한다.
저술활동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필단사리탑
▲ 필단 사리탑. ⓒ 안병기
각운스님은 이곳에서 스승인 혜심 진각이 지은 <선문염송>에 주해를 붙인 <선문염송설화〉30권을 저술했다.
저술을 끝마치자, 붓통 속에서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그 사리를 봉안한 탑이 바로 이 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필단사리탑’이다.
필단사리탑은 저술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붓 통 속에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라는 건 과장이다. 이것은 어쩌면 저술을 끝마친 각운 스님이 그 힘듦 때문에 병을 얻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필단사리탑의 전설은 민중의 공동창작물이다.
암자를 나와 길가 약수터에서 석간수 한 모금을 마신다. 싸늘한 기운이 내려가자 가슴이 화들짝 놀란다.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통도사 극락암 법당 오른편 옛 약수터 표지석에 새겨진 경봉스님의 '물법문' 한 구절이 생각난다.
▲ 길 아래 텃밭. ⓒ 안병기
▲ 상무주암 앞에서 바라본 지리산 연봉들. ⓒ 안병기
꽉 막혔는데 가슴이 트이는 듯한 느낌
눈을 들어 지리산 줄기를 바라본다. 봉우리들이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해발 1100m 높이에 자리 잡은 상무주암은 이렇게 지리산을 자신을 위한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다. '머무름이 없다'는 암자 이름마따나 하늘엔 구름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청명한 겨울날이다.
잔설에 덮인 지리산 연봉들이 하나 둘 가슴 속으로 들어와 수십 수백 개의 느낌표를 만든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좋은 산이 있고 직접 올라 산등성이를 걸어보는 것이 좋은 산이 있다. 지리산은 이 두 가지를 다 아우르고 있다. 금강산처럼 비범하게 생기진 않지만 철따라 다르게 보여주는 경치와 1915m라는 높이에 비해선 별로 험하지 않은 지세. 그래서 지리산은 바라볼 땐 장쾌하고 걸어보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상한 것은 앞이 저렇게 막혀 있으면 답답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가슴이 툭,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저 산을 바라보는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저 웅대한 산줄기를 앞을 가로막는 장애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것은 바라보는 자의 마음 속에 깃든 사랑이다. 장애는커녕 바라볼수록 커져가는 사랑이다.
상무주암을 떠나 영원사로 향한다.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늘 꺼림직하던" 보조국사 지눌은 마침내 상무주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원수와 멀리 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라고 토로한다.
나 역시 마음이 편안하다. 아니, 후련하다. 2년 전부터 상무주암에 올 계획을 세웠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그 뜻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비록 암자 곳곳을 다 구경하진 못했지만 옛 선사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자체가 나를 흡족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2월 17일 다녀왔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