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사 승방 마루의 고양이. ⓒ 안병기
▲ 난간에 앉은 고양이. ⓒ 안병기
"아, 이거요? 별거 아녀요. 옆 방 스님에게 얻은 거랍니다. 이 계룡산은 골이 깊어서 이런 종류의 그늘은 아주 흔해 빠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답니다."
"그렇다면, 그 그늘을 내게 팔려무나. 얼마나 주면 되겠니?"
"까짓 거 아주 싸게 드리지요, 뭐. 그런데 아저씨, 그늘은 어떻게 팔아야지요? 필로 파나요, 마로 파나요? 그늘이란 걸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어서리."
"글쎄다.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럼 우리 ㎡로 사고팔면 어떨까?"
녀석은 절집 고양이라서 그런지 꽤나 대범한 구석이 있더군. 내가 10㎡를 샀는데도 우수로 2㎡나 끼워줄 정도였으니까 말야.
"괜찮아요. 전 스님들한테 또 얻으면 되거든요. 우리 스님들은 그늘이 있으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자꾸 내다버리라고 하시거든요."
"너네 스님들은 굉장한 분들이구나. 너도 들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세간에선 남의 그늘을 훔쳐가는 도둑이 아주 많단다. 한 여름철엔 그늘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서 일시적으로 투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
그때였어. 그토록 순하고 붙임성 좋던 고양이가 버럭, 화를 내더군. 녀석이 "아저씨, 이제 그늘도 구입했으니 그만 가 보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손사래까지 치더라니까. 아니, 저 녀석이 왜 갑자기 화를 낼까? 표변해버린 고양이의 태도에 한동안 어리둥절하더군. 그러나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보다는 맘먹고 구입한 그늘을 어떻게 집까지 안전하게 가지고 가느냐가 더 걱정이었거든.
집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나서 막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어. 어디선가 "아저씨, 아저씨!"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군. 뒤돌아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내가 헛들었나. 그래서 다시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또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를 부르는 건 사람이 아니라 길 건너 2층집 고양이였어.
"얘, 지금 네가 날 부른 거니?"
"맞아요. 그런데 아저씨. 왼쪽 손에 들고 있는 그 그늘, 어디서 샀어요?"
"이거 말이냐? 계룡산 동학사 승방 고양이에게서 샀단다. 귀한 거라면서 팔지 않으려는 걸 거의 뺏다시피 해서 사 왔단다." 난 일말의 과장까지 섞어가면서 제가 사온 그늘을 자랑했지. 그런데, 갑자기 건넛집 고양이가 킬킬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아저씨, 그거 제가 보니 장물이 분명하거든요. 얼마 전 제가 고양이경찰서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온 일이 있답니다. 근데 거기서 그늘을 훔친 고양이에 대한 현상 사진과 도둑맞았다는 그늘 사진을 보았거든요. 세상이 어수선하니 참 희한한 도둑이 다 있다 싶어 유심히 봐뒀지요. 아저씨가 가진 그늘의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 그 고양이가 잃어버린 그늘이 틀림없어요. 듣자하니 그늘을 잃어버린 고양이는 정부 3청사 고양이라고 하더군요. 청사 수위 아저씨를 따라 동학사에 놀러 갔는데,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누군가 그 그늘을 훔쳐갔다고 하더군요." "그래? 네 말이 참말이라면 참 난감하구나. 네 말대로 이 그늘이 장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몹시 난감해서 통사정이라도 하듯 건넛집 고양이를 쳐다보았지. 그랬더니 건넛집 고양이가 선심을 쓰듯 이렇게 말하더군.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직접 고양이경찰서에다 갖다주고 범인을 알려줘 체포하도록 할게요.""그렇게 헤주면 나로선 너무나 고맙지.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구나. 내가 언제 둔산동 사료가게로 초대해서 근사하게 저녁 한 끼 사마." "아저씨, 저녁 같은 것은 사지 않으셔도 좋고요. 다시는 실수로 이런 장물이나 사지 마세요. 사람들은 우리 고양이를 쥐나 잡아먹으며 사는 하등동물로 알지만 우린 사실 지능지수가 아주 높은 동물이랍니다. 이건 일급비밀인데요, 아저씨만 알고 계세요. 우리 고양이들은 지금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 꾸준히 자금을 모으고 있답니다. 돈이 없어 기본적인 사료마저 살 수 없다면 독립이란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얼마 후 고양이경찰서에 불려가서 장물 획득 경위에 대한 경위서를 쓰고 온긴 했지만, 고양이에게 속아서 훔친 그늘을 샀던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가 됐다네. 하지만, 하찮은 미물인 고양이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그 수치심 만큼은 영영 씻기 어려울 것 같네. 맹세코 그 그늘이 고양이가 훔쳐온 장물인 줄 알았다면, 그 그늘이 제아무리 멋있었다고 해도 절대 사지 않았을 거야. 자넨 내 말 믿지? 그러나 어쨌든 난 고양이에게 그늘을 샀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장물아비가 돼버린 거지.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이 하나 둘이던가?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도 언젠가 본의 아니게 장물아비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거든. 만약 그걸 부인한다면 자네는 삶이 가진 관계성을 부인하는 자가당착을 저지르는 셈이 되겠지.
이제 난 아무리 멋진 그늘을 보더라도 덜컥 사지 않는다네. 아니, 그늘뿐 아니라 생수 한 병을 사더라도 그렇네. 상대방이 그 물건을 누구로부터 매입했는지 매매계약서를 반드시 확인하고 나서 사게 되지. 누가 알겠나. 언젠가 내 인생에도 쨍, 하고 해뜰 날이 돌아와서 느닷없이 고위 공직에 부름이라도 받게 될는지. 그걸 상상할수록 그때 아무 생각없이 그늘을 샀던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네. 설마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발목이 잡혀 공직 취임을 위한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일은 없겠지? 안 그런거? 아따메, 어디 말 쪼가 해보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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