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는 대부분 실패... 핵심은 양보"
28-29일 강원도 원주서 차 없는 거리 전국 포럼 열려
▲ 28-29일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에서 '차 없는 거리 전국포럼'이 열리고 있다. ⓒ 김대홍
"부평시장 문화의 거리에 문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문화라는 것을 공연이나 미술 등 예술문화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 시장엔 70년 동안 장사한 할아버지가 계세요. 그분이 가끔씩 아이들 20∼30명을 데리고 시장을 다니면서 시장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세요. 아이들이 감탄하죠. 우리는 이것도 문화라고 생각해요."
2월 28일 전국지속가능발전협의회·청정강원21실천협의회·원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에서 개최한 '2008 차 없는 거리 전국포럼'에서 부평자전거도시만들기 운동본부 인태연 운영위원장이 한 말이다. 인 위원장은 부평시장 상인으로 10여 년 전 부평시장에 차 없는 거리를 만든 장본인이다.
인 위원장은 10여 년 동안 겪은 경험담을 솔직하게 털어놔 이날 포럼을 찾은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1990년대 중반 부평시장 상인들이 차 없는 거리를 시작한 것은 재래시장 위기가 배경이었다. 다가올 90년대 후반 대형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등장, 부평역 지하상가의 대형화로 쇼핑 공간 다변화가 예견된 상황. 게다가 1999년 인천지하철이 개통하면 상권이 빠르게 움직일 것이 예상되면서 상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시장 상인들이 시장 활성화를 위해 만든 차 없는 거리는 90년대 후반 공공거리로 성격이 달라졌다. 시민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에 시민들이 즐겁게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상인들 스스로 6000만원을 거두어 분수대를 만들고 가로수 품종까지 고민했다. 1998년 상인들 스스로 '문화의 거리 발전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07년엔 갈등관계에 있던 노점상까지 가입시켰다. 노점상들은 공간 일부를 양보했고, 그 공간을 한평공원으로 만들었다. 한평공원은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소개됐다.
"걷기 힘든 청계천길, 모범사례는 말도 안 돼"
이날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부평 차 없는 거리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냈지만 지금껏 이뤄진 숱한 차 없는 거리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들면 홍보 효과 때문에 1, 2년 반짝인기를 끈다. 하지만 3년 뒤부턴 시들해진다. 소비자들도 질리게 마련이다." (한국색채문화진흥재단 도시환경팀장 이석현)
"차 없는 거리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문화다. 그런데 '문화'라고 하면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다. 인사동 차 없는 거리를 만들었는데, 하루는 떡 축제를 하고, 어떤 날은 한복 축제를 하더라. 인사동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걷고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 사무국장 김은희)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다. 10년 30년 가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런데 구청에서 1년 단위로 담당자가 바뀐다. 그때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번 책임을 맡은 부서는 끝까지 가야 하고, 책임 맡은 시민단체도 한 번 찔끔거릴 정도면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부평자전거도시만들기 운동본부 인태연 운영위원장)
차 없는 거리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 서울 인사동길·청계천길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이석현 팀장은 "흰 석재가 보기엔 좋지만 통행엔 걸림돌"이라고 인사동길을 비판했고, "만들면서 문화재가 많이 사라졌고 하천 주변 붕어빵식 간판도 문제"라면서 청계천길을 꼬집었다.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 지역문화팀 오민근 전문위원은 국내·외 사례를 통해 차 없는 길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내놓았다.
▲ 일본 도시 오타루. 물길과 오래된 창고를 보존한 상태로 보행로를 만들었다.(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 지역문화팀 오민근 전문위원의 슬라이드 사진) ⓒ 김대홍
독일의 한 도시는 걷기 편한 길을 만들기 위해 천막 높이를 제한하고 상품 품목을 스스로 관리했다. 일본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평가받는 마나즈루는 해안가에 아파트가 단 한 채도 없다. 그 결과 도시 어디서나 탁 트인 바닷가를 볼 수 있다.
일본 요코하마의 한 대형 상가는 간판이 아예 없다. 각 상가가 경쟁적으로 간판을 세우는 대신 100년이 넘은 상가 건물 자체가 간판이 되도록 만들었다.
길과 어울리기 위해 손해를 받아들인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 바샤미치 마차미지역의 한 가게는 간판을 절반 정도로 줄였고, 모토마치상가 거리에 있는 가게들은 보행로 확보를 위해 1층 20m 정도를 길에 내놓았다.
이들 사례를 통해 나타난 공통점은 공공을 위한 개인의 양보다. 걷기 좋은 길로 인정받는 유럽이나 일본의 길엔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
차 없는 거리 만들면 상권이 산다는 것은 환상
▲ 제조업 붕괴라는 위기를 기회로 뒤바꾼 영국 도시 게이트스헤드(Gateshead). 한 때 융성했던 조선업 기술을 이용한 예술품. 처음엔 주민 80%가 설치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긍지를 갖고 있다.(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 지역문화팀 오민근 전문위원의 슬라이드 사진) ⓒ 김대홍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차 없는 거리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경계했다. 차 없는 거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과 차 없는 거리만 만들면 지역경제가 금세 활성화할 것이라는 성급함을 비판한 것.
"마산에선 차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가 사람이 찾지 않아 오히려 더 황량해졌다." (녹색경남21취진협의회 사무처장 이종훈)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는 대부분 실패했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들더라도 장사가 잘 되진 않는다는 게 이미 증명됐다. 가장 중요한 '왜'와 '어떻게'가 빠졌기 때문이다."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사무국장 김은희)
"차 없는 거리를 만든다니까 서울 사람들이 땅을 매입하고, 신축건물을 올리곤 한다. 땅값이 올라가면 지역 상인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원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제현수)
나도 이 날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미 차 없는 거리인 우리나라 전통골목은 없애면서 정부가 예산을 들여 차 없는 거리를 만드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꼭 외국이나 대도시에서만 사례를 찾지 말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자고 주문했다.
이 날 차 없는 거리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차 없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한 이는 없었다. 참석자들은 "관 주도가 아니라 민 주도일 것", "단지 상가 활성화라는 관점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한다는 차원에서 시행할 것", "단기간에 성과를 낼 게 아니라 30년 정도 멀리 보고 갈 것", "큰 도로만 보지 말고 골목과 연계할 것" 등을 주문했다.
한편 '차 없는 거리 전국포럼'은 28일 '바람직한 차 없는 문화의 거리 조성과 운영'이라는 주제로 1부 행사를 열었고, 29일 2부 행사가 열린다. 29일엔 '차 없는 날'이 주제다.
발제는 '서울시 차 없는 날 추진 사례'(녹색교통운동 교통환경팀장 송상석), '대구시 차 없는 문화의 거리 행사 추진사례'(맑고푸른대구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 정현수), '강원지역 차 없는 거리 행사 추진과 내용'(제일강산강릉21실천협의회 사무국장 강남일)이며 토론자로 차재근(문화소통단체 숨 대표), 이창흠(국무총리실 기후변화기획단 환경정책팀장), 홍길순(푸른울산21환경위원회 사무처장), 장화선(푸른광주21협의회 사무처장), 홍석분(횡성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조송자(춘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운영위원장)씨가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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