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사랑하는 아버지가 뿌린 불행의 씨앗
[역사소설 소현세자 10]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 홍이포. 조선군을 떨게 했던 홍이포는 현대전의 미사일처럼 당대의 최신무기였다. 심양고궁에 전시되어있다. ⓒ 이정근
황제로부터 철군을 명받은 도르곤은 치밀한 철수작전을 수립했다. 조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홍이포와 10여만이 넘는 대군을 철수 시키는 일은 공격 못지않게 중요한 작전이었다. 운송수단은 강화도를 공략할 때 사용했던 병선 40여척. 절대부족이었다. 뗏목을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포로들을 혹사하여 뗏목 만들기에 총력을 집중했다.
대륙의 늙은 호랑이 명나라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청군에게 홍이포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홍이포의 손실은 곧 전력약화다. 군졸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당대의 최신무기 홍이포를 명나라는 직접 제작하여 실전에 투입했다. 청나라는 기술력이 없다. 요양전투에서 명나라로부터 노획한 것이 전부였다.
명나라와 일합을 겨뤄야 하는 청나라, "홍이포를 생명처럼 다뤄라"
뗏목과 병선을 이용하여 삼전도에 있는 주력군의 도하작전이 시작되었다. 홍이포가 먼저 한강을 건넜다. 상대에겐 공포의 대상이지만 귀하신 몸이다. 강화도를 공략한 일부 병력을 빼내어 상암 들녘에 집결시켰다. 철수가 완료되면 숭례문 밖에 주둔하고 있는 도성 점령군에게 출발을 명령하여 벽제에서 합류한다는 수순이었다.
용산강에서 함선 건조에 여념이 없는 공유덕과 경중명에게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뗏목은 아무나 만들 수 있지만 병선은 기술자가 필요하다. 장인은 한정돼있다. 죽어나는 것은 포로들뿐이었다. 배가 만들어지면 강화도로 내려가 잔류하고 있던 군졸을 승선시켜 북상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졌다. 귀로에 오른 황제군과 철산반도에서 합류하여 가도를 공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삼전도를 출발한 뗏목이 한강을 메웠다. 망원정에 도착한 뗏목 중에서 쓸 만한 것은 병선에 매달아 상류로 끌어 올리고 부실한 것은 하류로 떠내려 보냈다. 연유를 모르는 강화도 사람들은 횡재를 만났다. 눈에 보이는 대로 끌어다 해안에 묶어두었다. 청군이 물러가면 집을 지어야 한다.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집이 불타고 무너진 강화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목재였다.
▲ 잠두산. 한강의 경승지였다. 현재는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어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 이정근
삼전도에서 철수를 완료한 청나라 군대의 환송식이 한강 기슭에서 열렸다.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잠두산 나아갔다.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하여 잠두(蠶頭)라는 이름을 얻은 잠두산은 한강 삼경중의 하나였다.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다. 훗날, 잠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절두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의 풍광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도르곤이 한강의 풍치에 탄성을 질렀다. 잠두봉에서 바라본 한강은 가히 절경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아래 강물이 철석이고 밤섬에서 날아오른 물새들이 평화롭게 날고 있었다. 멀리 관악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너섬(여의도)이 손에 잡힐 듯했다. 개성팔경 중 하나인 벽란도에 벽란정이 있다면 한강 양화진에 잠두봉이 있었다.
“삼천리금수강산에 때 아닌 붉은돼지가 출몰하여 걱정입니다.”
“……?”
탄식처럼 내뱉은 인조의 말을 역관 정명수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의미는 더더욱 몰랐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고 황제를 한(汗)이라 부르듯이 붉은 돼지란 홍태시(紅泰豕)로서 홍타이지를 폄하하는 궁중 은어였다. 어전회의에서 청나라를 성토할 때 곧잘 등장하는 말이다. 정명수가 제대로 알아듣고 의미를 추궁한다면 위험한 발언이었다. 위기일발의 시간이 지나갔다.
“강화도의 군사들이 도착 하면 떠날 것이오. 아마 내일 모레가 될 것 같소.”
“편안히 가시오.”
도르곤은 푸짐한 식사를 준비했다. 굶주린 신하들의 눈빛이 빛났다.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다. 사흘만 굶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목마르고 굶주린 신하들이 게걸스럽게 먹었다. 음식을 입에 넣지 않고 이들을 경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신익성과 이지항이었다. 오랑캐의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환송식에 소현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자기 자식만은 심양에 보내지 않으려는 정승과 판서들
▲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이다. ⓒ 이정근
창경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들이 심양으로 떠날 날이 가까워오는데 세자를 시종할 신하들이 부실하다고 생각되었다. 도승지 이경석을 불렀다.
“세자를 시종할 신하들을 보강하도록 하라.”
인선작업에 들어갔으나 하나같이 꽁무니를 뺐다. 삼공육경(三公六卿)들이 자기 자식은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들마저 북으로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갔다. 잔류 관원들은 병이 위독하다 핑계대고 무사들에게 대신 하게 했다. 무사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시대가 태평하면 자기네들이 좋은 벼슬을 하고 난(亂)에 임해서는 우리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니 분하지 아니한가?”-<연려실기술>
조선 사람들에게 대륙은 동경의 땅이었다. 세계의 중심 명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꿈이었다. 황제가 있는 나라 대륙에 들어가는 것은 인생일대의 광영이었다. 사신에라도 뽑히면 가문의 영광이었다. 며칠씩 잔치를 벌이고 떠나는 날에는 돈의문 밖 반송정에 나가 성대한 환송식을 열었다. 서장관이라도 발탁되지 않으면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기를 원했던 곳이 대륙이다.
▲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이다.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졌던 자리가 비어있다. 크게만 보이던 품계석이 작아졌다. 신하들이 관직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 이정근
이제는 서로 가지 않으려 한다.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자취를 감췄다. 땅은 똑같은 땅인데 왜 이럴까? 명나라는 세세손손 숭배해야 하는 나라였고 청나라는 배척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륙은 이제 환상의 땅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다. 한 번 가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긴장된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돌발변수가 발생하면 모조리 처형될 수 도 있다. 대륙은 두려움의 땅이었다.
난항 끝에 호종 인원이 확정되었다. 가함대신(假銜大臣)에 남이웅, 대빈객 박황, 부빈객 박노, 무재(武宰) 박종일·이기축, 보덕 황일호, 겸보덕 채유후, 필선 조문수, 겸필선 이명웅, 문학 민응협, 겸문학 이시해, 사서 서상리, 겸사서 정뇌경, 설서 유계, 겸설서 이회, 익위에 서택리·양응함, 사어(司禦) 허억·김한일, 부솔(副率) 이간·정지호, 시직(侍直) 이헌국·성원, 세마(洗馬) 강문명, 사복시 주부 정이중, 선전관 위산보·변유·구오, 부장(部將) 민연, 의관에 정남수·유달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중에서 자청한 사람은 정뇌경과 강빈의 동생 강문명이었다.
이것이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이야 그 누구도 몰랐다. 세자의 품위 유지를 위하여 상당한 인원이 배치되었다. 관직을 명받은 관리들을 받쳐줄 하인들까지 합하면 193명에 이른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정(父情)이 골골이 스며있다.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행의 씨앗
명분을 앞세운 인조의 인적구성을 청나라는 조선의 작은 조정으로 인식했다. 청나라의 정치문화는 조선과 다르다. 철군명령과 함께 도르곤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고 황제가 돌아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는 왕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세자에게 많은 결정을 요구했다.
세자는 고독했다. 심양에 도착한 소현은 국내 정치 여건상 재량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청나라 권부와 조선 조정의 역학관계에서 힘들어 했다. 사사건건 본국에 의탁하는 세자를 불신한 청나라의 압박 강도는 더해갔다. 조금이라도 재량권을 보이면 인조는 왕위를 위협하는 아들로 의심했다. 볼모와 세자. 그의 심양생활은 정신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상암 들녘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국으로 철수다. 그들과 함께 소현세자도 움직였다. 도르곤이 앞서고 소현세자가 뒤따랐다. 그 뒤를 이어 강빈과 봉림대군이 따랐다.
도르곤을 따르는 수레에는 약탈한 금은보화가 가득 실려 있었으며 연실이가 타고 있었다. 용골대를 따르는 수레에도 짐 보따리가 실려 있었다. 조선인 여자도 함께 타고 있었다. 행렬의 후미를 따라가는 역관 정명수의 수레는 4대였다. 누가 채워주었는지 모르지만 귀중한 물건들이 그득그득했다. 조선인 여자 4명도 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수레에 올라앉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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