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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까? 산 속 이 작은 별들을...

산자고, 노루귀 소리없이 피어나 봄을 알리는 꽃들

등록|2008.03.03 08:22 수정|2008.03.03 09:23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홍매화 ⓒ 서종규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계절감을 상실한 것 같다. 아직도 겨울인가 보다하고 살아가고 있다. 계절의 변화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계절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삶은 쳇바퀴 돌아가듯 똑같이 그냥 그렇게 지나버릴 나날들 아닌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 아닌가?

지난 주 2월 말에도 눈이 내렸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겨울에 사로잡혀 있는 줄 알았다. 지난 가을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하다. 지금도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바람이 차갑다. 나무들도 죽은 세상과 같이 벌거벗은 몸으로 추위에 떨고 있다.

3월이 시작되는 첫날 오전 8시, 산을 좋아하는 ‘풀꽃산행’팀 36명은 진도에 있는 접도를 찾아 광주를 출발하였다. 도시를 탈출하여 시원한 바람이 부는 섬 산행을 떠난 것이다. 멀리 보이는 섬들이며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족 소풍을 다녀오고 싶었다. 갇혀버린 겨울 속에서 숨이라도 한 번 쉬어 보고 싶은 바람이었다.

10시, 우리의 차는 진도대교 휴게실에 멈추었다. 으레 화장실로 향하던 발걸음이 굳어졌다.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붉은 꽃이 가득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급하게 발길을 돌렸다. 차에 올라가 사진기를 들고 뛰어 갔다.

그 붉은 꽃은 바로 홍매화였다. 진도대교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붉은 홍매화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진도까지 오면서 산과 들을 보며 느껴지던 봄기운이 붉은 홍매화 송이 송이에 드러나고 있다.

홍매화를 보자 모두 입이 벌어졌다. 분명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눈을 맞아가며 피어낸다는 매화라서 아직도 겨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뿜어내는 생기는 분명 겨울을 이겨낸 봄의 화신이다.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서종규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홍매화 ⓒ 서종규


봄은 어느덧 남도의 섬 진도 접도에 가득하였다. 접도 수품항에서 출발한 접도 등산은 봄을 찾아 떠난 산행이 되었다. 산행에서 느낄 수 있는 봄의 의미는 봄꽃들이다. 봄꽃은 매화와 같이 나무에 주렁주렁 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의 눈길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땅에 딱 붙어서 피어나는 꽃도 많다.

특히 봄소식을 알려주는 복수초, 산자고, 노루귀, 변산바람꽃, 개불알풀꽃 등은 땅에 딱 붙어 있어서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꽃들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 찍은 꽃이 된 지도 오래다.

접도 남망산 정상(164m)에서 쉬고 있는데 따뜻한 양지 바위 근처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며 무더기로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다. ‘산자고(山慈姑)’다. 이른 봄이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 꽃을 찾으려 온 산을 뒤지고 다니다가 한두 송이 발견하면 그 기쁨에 땅에 엎드려 별처럼 밝게 빛나는 이 꽃 한 송이를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는다.

꼭 별처럼 생겼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우리의 관념 속에 들어 있는 오각형의 별처럼 생겼다. 아니다. 오각형이 아니라 육각형의 별이다. 땅에서 약 10cm 정도 올라온 꽃대 끝에 섯 개의 하얀 꽃잎이 하늘을 향하여 손을 벌린다. 꽃잎 안쪽에는 노랗게 또 작은 별을 그리고 있고, 그 위에 여섯 개의 수술이 노란 방망이처럼 뭉쳐 있다. 백 원짜리 동전보다도 작을 것 같은 앙증맞은 꽃이다.

잎은 땅에서 솟아나와 땅을 파랗게 가로지르고 있다. 약간 도톰하고 좁은 보리잎처럼 생겼는데 그 길이가 한 뼘 정도 길쭉하게 자라 있다. 땅은 아직 작년 가을에 말라버린 각종 풀과 나뭇잎으로 가득한데, 그것을 뚫고 올라와 하얀 별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산자고’를 흔히 ‘까치무릇’ 또는 ‘까추리’, ‘물구’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산자고'라는 한자이름보다는 ‘까치무릇’이라는 우리 이름이 더 정감이 있다. 이른 봄 우리나라의 남쪽 섬 산에 소리 없이 피어나서 아무도 받아보지 못할 것 같은 봄 편지를 쓰고 있는 꽃이 너무 사랑스럽다.

산자고를 발견하자 모두 즐거운 비명을 올린다. 산에 온 즐거움이다. 동전보다 더 작은 꽃 한 송이에 느끼는 생명력이랄까. 그 아름다움이랄까. 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증표라고나 할까. 유난히 땅이 붙어서 피어나는 작은 꽃들에게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풀꽃산행’이 되었나?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산자고 ⓒ 서종규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산자고 ⓒ 서종규


산길을 가다가 또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꽃이 바로 ‘노루귀’다. 노루귀를 발견한 눈동자들은 대단히 들떠 있다. ‘분홍색노루귀’와 ‘하얀색노루귀’가 옹기종기 피어 있는 것이다. 노루귀는 다양한 색으로 꽃을 피운다. 색의 종류에 따라 청색노루귀, 분홍색노루귀, 자주색노루귀, 하얀색노루귀, 보라색노루귀 등이 있는데, 모두 노루귀라고 부른다.

하얀색노루귀, 땅에서 약 5cm 정도의 꽃대가 올라와 그 끝에 하얗게 매달려 있다. 꽃의 크기는 1원짜리 동전크기만 하다. 꽃잎은 8개인데 모두 하얗다. 꽃잎 안에 들어 있는 수술이 수십 개가 되는데 모두 하얗다. 너무 앙증맞고 순수하다.

꽃대에는 많은 털들이 붙어 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은 그 털에 튀는 빛까지 잡으려고 땅에 엎드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꽃이 되었다. 활짝 핀 꽃도 가냘픈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땅에서 솟구치는 꽃대 끝에 매달린 꽃망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꽃망울엔 많은 털이 붙어 있어서 꼭 '노루의 귀'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노루귀'다.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노루귀 ⓒ 서종규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노루귀 꽃망울 ⓒ 서종규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노루귀 ⓒ 서종규


남쪽의 산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 겨울에서 그 푸름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풀이 바로 춘란이다. 하얀 눈을 뚫고 솟아 있는 그 푸른 난잎을 보면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 춘란이 봄에는 꽃을 피워낸다. 남쪽 산에 오르면 춘란의 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떤 사람들은 춘란이 피는 계절엔 그 꽃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바로 난 채취꾼들인데 꽃의 색깔이나 모양에 따라서 소심이니 황화니 등등 희귀종으로 구분하여 채취한다. 또 난잎의 모양에 따라 중투니 호피니 등등 보통 잎의 모양과는 다른 희귀성을 중요하게 취급하여 채취한다. 요즈음은 대부분의 산에서 난을 채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춘란꽃은 처음에 꽃대가 솟구쳐 오른다. 약 10cm 정도 솟구쳐 오른 꽃대는 이내 파란 잎처럼 생긴 꽃잎이 세 개가 벌어지고, 그 안에 짐승의 혀를 연상하듯 연한 꽃잎이 앞으로 내민다. 보통 춘란에는 그 꽃잎에 보라색 반점이 있다. 봄 산에서 춘란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지만, 피어나는 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기쁨이 더하다.

등산로의 터널을 이루며 푸름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그 동백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꽃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른 잎에 붉은 꽃, 그리고 그 붉은 꽃잎 안에 노랗게 솟구쳐 있는 꽃술들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롭다. 남도의 산에서 늘 푸른 동백 숲을 거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생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에 그 붉은 동백꽃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만든다.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춘란꽃 ⓒ 서종규


▲ 진도에서 보내는 꽃 편지 - 동백꽃 ⓒ 서종규


계절감을 상실한 우리의 마음은 어느덧 봄으로 가득 채워졌다. 말없이 대지를 뚫고, 겨울을 뚫고 피어난 조그마한 꽃 한 송이 한 송이, 자연 속에 있다. 그 꽃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계절을 찾아 따뜻한 꽃 편지를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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