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줄기도 달려가고 마음도 거침없이 달려가고
[여행] 충남 금산군 대둔산 태고사를 찾아서
▲ 대둔산 가는 길. ⓒ 안병기
대둔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태고사를 찾아간다. 금산군 진산면 소재지를 향해 복수면 신대리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접어든다. 이윽고 대둔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산줄기들이 교회당 첨탑에 걸려 있다. 그냥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오브제를 거쳐서 바라볼 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른가. 첨탑이라는 존재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짝 건드려 감흥을 일게 하는 것이다. 술술 거침없이 읽히는 책보다는 한 줄 읽고 나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 더 좋듯이.
▲ 석문 ⓒ 안병기
석문을 통과하고 나서 위를 올려다보니, 저 만치 태고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석문이 일주문 노릇을 하는 셈이다. 문 밖은 세간이요, 문 안은 출세간이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수많은 돌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불전들이 늘어선 절 마당에 올라선다.
태고사는 대둔산 낙조대 아래에 있는 절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태고화상이 중창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가 재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거쳐간 셈이다. 이것은 태고사 터가 좋다는 뜻인가. 그 세 분 스님이 그만큼 오지랖이 넓다는 뜻인가.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운 도천 스님
▲ 태고사 전경. 좌로부터 대웅전(충남 문화재자료 제27호)·극락전· 관음전 순이다. ⓒ 안병기
이렇게 높은 곳까지 수많은 돌계단을 쌓아올렸다는 점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현재의 가람 모습에서 폐허가 돼버린 태고사의 모습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겠는가. 대웅전을 둘러보고 나와서 잠시 마당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선방의 문이 쓰윽 열리면서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이분이 바로 도천 스님이신가 보다. 1910년생이니 세상 나이로 헤아리면 아흔 아홉이다. 그런데도 눈빛이 아주 형형하다니!
▲ 태고사를 일으키신 도천 스님. ⓒ 안병기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신 스님은 중이 되고자 수월 스님을 찾아서 금강산 마하연으로 갔다고 한다. 수월 스님은 근대 선맥을 일으킨 경허 스님의 제자다. 그러나 수월 스님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수월 스님의 상좌인 묵언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했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 신계사 묘향산 유점사 법왕사 등에서 20여 년 간 수행을 계속하던 스님은 6·25가 일어나자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여러 선방을 거친 끝에 스님은 금강산의 형세를 닮은 대둔산 태고사로 들어왔다.
태고사까지 빨치산이 들어왔지만 요행히 살아남았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부처님 덕택이라고 여긴 스님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선 태고사를 버젓하게 다시 짓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불타버린 태고사 터에 움막을 짓고 중흥 불사를 계속해왔다. 40년 간이나 두문불출하면서, 할아버지인 수월 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백장청규의 정신을 철저하게 구현한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는 백장청규란 스님에겐 차라리 사치스런 것이었을 것이다. 나물죽 끓여 먹기도 어려울 때가 있었다니 말이다.
▲ 범종각. ⓒ 안병기
"스님, 우리나라 절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크다는 온돌방은 어디 있는지요?"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뭐하러 놔둬. 벌써 헐었지."
너무나 실망스럽고 맥 빠지는 대답이다. 사실 오늘 내가 태고사까지 걸음 한 것은 5년 전쯤이었던가. <불광>이라는 불교 잡지에서 읽었던 내용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절집에서 가장 크고 긴 구들이 이곳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혹 스님께서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으신 건 아닐는지. 스님은 총총 걸음으로 범종각을 향해서 가신다. 허리가 꼿꼿하다. 백세를 바라보는 연세인데도 저렇듯 정정하시니 진정 도인임이 틀림없구나.
▲ 범종각에서 바라본 대둔산 줄기. ⓒ 안병기
세간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대둔산 자락을 힘들게 거슬러 올라와 태고사를 찾아온다. 마음의 상쾌함을 얻으려는 건지, 제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하기야 여기에 서면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기 와서 그저 마음의 티끌 훌훌 불어 허공에 날리고 나서 내려가면 될 것을….
산줄기도 달리고, 마음도 거침없이 달려간다. 문득 '나는 오늘 이곳에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할! 나는 즉각 내 마음을 죽비로 몇 차례 내려친다. 헛생각하지 마라. 넌 결코 헛걸음 한 것이 아니다. 여행의 절정이 뒤바뀌었을 뿐이다. 절정의 순간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구들 없는 태고사가 오늘 여행의 절정이 아니라면 언제 절정의 순간을 지나쳐 왔는가.
어쩌면 오늘 내 여행의 절정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집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진산면 지방리나 두지리 근방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다. 여행이야말로 그 말에 가장 부합되는 말이 아닐까.
도착해봤자 별 나을 것도 없는 삶이지만
▲ 낙조대(830m)에서 바라본 대둔산 줄기. ⓒ 안병기
▲ 닉조대에서 바라본 대둔산 마천대( 878m). ⓒ 안병기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