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가의 생활터전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해자
[대한해협과 현해탄 건너뛰기: 큐슈 북부 답사 ⑥] 요시노가리 남내곽
이중 삼중으로 차단장치가 있는 야요이(彌生)인의 주거 공간
정문 매표소를 지나 아마노우키 다리를 건너면 역사유적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이 역사유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환호 입구 광장을 지나야 한다. 작은 규모의 광장을 지나면 바로 새가 세 마리 앉아 있는 도리이를 만나게 된다. 이 도리이의 좌우에는 외적이나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용 말뚝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끝이 뾰족한 기둥의 방어벽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안쪽으로 해자를 파 다시 한 번 외부와 내부를 경계 지었다.
이곳을 지나면 길이 오른쪽으로 약간 구부러지면서 왕가의 생활터전인 남내곽(南內郭: South inner palace)으로 이어진다. 남내곽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또 하나의 도리이를 만난다. 이번에는 도리이 위에 새가 두 마리 앉아 있다. 도리이를 지나면 기둥 방어벽이 나타나고 그 안에 남내곽의 생활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남내곽은 무라(村)의 차원에서 쿠니(國)의 차원으로 발전한 요시노가리의 대인들이 살면서 정치활동을 하던 공간이다. 이러한 대인들 중 최고의 실권을 가진 자가 왕으로 추대되고 그를 중심으로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 남내곽은 광장을 중심으로 왕과 대인들의 수혈 주거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에 조리실, 창고, 집회 장소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밖으로는 사방에 망루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올라가 보고 들어가 보고 만져도 보고
내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동쪽에 망루가 보인다. 병사가 올라가 주위를 감시하던 장치이다. 이 망루 건너편으로 남서쪽에도 또 하나의 망루가 있다. 이 망루는 계단을 만들어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계단을 보면 3층 형식임을 알 수 있다. 3층에는 나무판으로 바닥을 만들고 허리 정도 높이의 난간을 만들어 안전성과 방어성을 높였다. 망루는 서까래와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얹은 누각 형태이다. 이러한 망루는 감시기능과 방어기능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망루에서 사방을 조망하니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남내곽 내의 건물과, 북내곽 그리고 북분구묘의 유적들이 아주 조밀하게 보인다. 서쪽으로는 창고와 시장 구역이 보이고 그 너머 들판에 형성된 현대인의 집들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높게 만든 창고군(倉庫群)이 보이고, 그 뒤로는 넓은 마을지역이 펼쳐진다.
망루를 내려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펼쳐진 수혈식 주거공간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우리는 대인의 집을 살펴본다. 땅 위에 지붕을 얹었고, 문은 땅 위에 낸 형태이다. 문은 아래 위로 여닫도록 만들어졌고, 지붕 위에는 위엄을 상징하는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있고 그 안에 멍석이나 돗자리를 깔고 생활하도록 했다. 집 안에는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는데, 황톳물 들인 옷을 입고 머리는 길렀다.
이들을 지나면 왕의 집이 나오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새 두 마리가 앉은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 만나는 왕의 집은 대인의 집보다 좀 더 위엄이 있어 보인다. 땅바닥에 나무판과 짧은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을 뿐 아니라 지붕 위의 장식도 훨씬 크고 화려하다. 지붕 꼭대기에 칼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이곳이 왕의 집임을 표시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세련된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다. 대개 나무로 만든 그릇과 생활용품이 대부분이며 다다미 형태의 침구류도 보인다. 다른 한쪽에는 천을 짜는 직기도 있어 그들의 문화가 꽤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곳에는 토기도 있는데, 모양과 크기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쓰임새도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왕가 옆에는 취사 및 조리용 건물이 있는데 현재로 말하면 주방과 부엌이다. 취사용 화덕이 가운데 있고 그곳에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판에 야요이인들이 조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에 따르면 화덕 위에 토기를 놓고 그 아래 불을 피우고 있다. 이렇게 조리된 음식은 왕이나 대인들에게 제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시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공회당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 형태가 주거시설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다. 이곳에서는 왕과 대인들이 모여 통치, 행정, 생활과 관련된 일들을 토론하고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또한 일과 후 지도자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남내곽이 가지는 의미
남내곽은 요시노가리 환호취락 가운데 가장 커다란 주거 유적이다. 전체 면적이 1만㎡이며 해자, 방어벽, 4개의 망루, 10채의 수혈주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있는 정교일치의 주제전과 남쪽에 있는 80여 채 정도의 고상창고군(高床倉庫群)을 연결하는 생활공간이 바로 남내곽이다.
요시노가리 환호취락은 야요이 시대 큐슈 북부에 논농사가 시작되고 대륙의 선진문화가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는 남쪽 구릉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생활용품과 장신구, 무기 등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문화의 수준을 높여 갔다. 야요이 시대 초기인 이때에는 3㏊ 정도의 작은 취락이 만들어지는데, 이곳 요시노가리 남내곽이 이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러한 환호취락은 야요이 중기에 가면 20㏊ 규모로 커지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40㏊ 이상까지 확대된다. 이들 야요이인들은 취락 주변에 V자형의 해자를 만들어 마을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북내곽을 만들어 통치기반을 확고히 했다. 이때부터 땅 위로 건물이 나오고 대형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왜국은 고분(古墳)시대를 거쳐 4세기말 야마토(大和) 시대를 연다. 이때부터 일본에는 고대국가의 틀이 만들어진다.
1. 인력 또는 중기로 표토를 제거한다.
2. 유물이 묻혀 있는 경우 유물 검출 면까지 파낸다. 수혈식 주거의 경우도 유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면까지 파내려 간다.
3. 유물 검출 면을 꼼꼼하게 파내면서 흙의 색깔이 다른 부분을 찾아낸다. 옛날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부분은 색깔이 틀리기 때문에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4. 수혈주거의 유구를 이식 삽과 대나무 주걱 등으로 신중하게 파낸다.
5. 유구의 모습과 유물의 출토 현황을 도면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정리한다.
6. 출토된 유물을 물로 씻고 깨진 부분은 접합한다. 깨져 없어진 부분은 석고 등으로 보충하거나 보완한다. 그리고 나서 유물 실측도를 작성한다.
7. 조사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만들어 학계에 보고한다.
▲ 차단용 방어벽과 해자 ⓒ 이상기
정문 매표소를 지나 아마노우키 다리를 건너면 역사유적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이 역사유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환호 입구 광장을 지나야 한다. 작은 규모의 광장을 지나면 바로 새가 세 마리 앉아 있는 도리이를 만나게 된다. 이 도리이의 좌우에는 외적이나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용 말뚝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끝이 뾰족한 기둥의 방어벽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안쪽으로 해자를 파 다시 한 번 외부와 내부를 경계 지었다.
▲ 남내곽 입구의 도리이 ⓒ 이상기
남내곽은 무라(村)의 차원에서 쿠니(國)의 차원으로 발전한 요시노가리의 대인들이 살면서 정치활동을 하던 공간이다. 이러한 대인들 중 최고의 실권을 가진 자가 왕으로 추대되고 그를 중심으로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 남내곽은 광장을 중심으로 왕과 대인들의 수혈 주거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에 조리실, 창고, 집회 장소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밖으로는 사방에 망루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올라가 보고 들어가 보고 만져도 보고
내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동쪽에 망루가 보인다. 병사가 올라가 주위를 감시하던 장치이다. 이 망루 건너편으로 남서쪽에도 또 하나의 망루가 있다. 이 망루는 계단을 만들어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계단을 보면 3층 형식임을 알 수 있다. 3층에는 나무판으로 바닥을 만들고 허리 정도 높이의 난간을 만들어 안전성과 방어성을 높였다. 망루는 서까래와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얹은 누각 형태이다. 이러한 망루는 감시기능과 방어기능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 망루에서 바라 본 요시노가리 유적 ⓒ 이상기
망루에서 사방을 조망하니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남내곽 내의 건물과, 북내곽 그리고 북분구묘의 유적들이 아주 조밀하게 보인다. 서쪽으로는 창고와 시장 구역이 보이고 그 너머 들판에 형성된 현대인의 집들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높게 만든 창고군(倉庫群)이 보이고, 그 뒤로는 넓은 마을지역이 펼쳐진다.
망루를 내려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펼쳐진 수혈식 주거공간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우리는 대인의 집을 살펴본다. 땅 위에 지붕을 얹었고, 문은 땅 위에 낸 형태이다. 문은 아래 위로 여닫도록 만들어졌고, 지붕 위에는 위엄을 상징하는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있고 그 안에 멍석이나 돗자리를 깔고 생활하도록 했다. 집 안에는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는데, 황톳물 들인 옷을 입고 머리는 길렀다.
▲ 수혈식 주거공간의 하나인 왕가 ⓒ 이상기
이들을 지나면 왕의 집이 나오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새 두 마리가 앉은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 만나는 왕의 집은 대인의 집보다 좀 더 위엄이 있어 보인다. 땅바닥에 나무판과 짧은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을 뿐 아니라 지붕 위의 장식도 훨씬 크고 화려하다. 지붕 꼭대기에 칼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이곳이 왕의 집임을 표시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세련된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다. 대개 나무로 만든 그릇과 생활용품이 대부분이며 다다미 형태의 침구류도 보인다. 다른 한쪽에는 천을 짜는 직기도 있어 그들의 문화가 꽤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곳에는 토기도 있는데, 모양과 크기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쓰임새도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 왕가의 내부 ⓒ 이상기
이들 왕가 옆에는 취사 및 조리용 건물이 있는데 현재로 말하면 주방과 부엌이다. 취사용 화덕이 가운데 있고 그곳에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판에 야요이인들이 조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에 따르면 화덕 위에 토기를 놓고 그 아래 불을 피우고 있다. 이렇게 조리된 음식은 왕이나 대인들에게 제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시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공회당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 형태가 주거시설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다. 이곳에서는 왕과 대인들이 모여 통치, 행정, 생활과 관련된 일들을 토론하고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또한 일과 후 지도자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남내곽이 가지는 의미
▲ 남내곽의 모습 ⓒ 이상기
남내곽은 요시노가리 환호취락 가운데 가장 커다란 주거 유적이다. 전체 면적이 1만㎡이며 해자, 방어벽, 4개의 망루, 10채의 수혈주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있는 정교일치의 주제전과 남쪽에 있는 80여 채 정도의 고상창고군(高床倉庫群)을 연결하는 생활공간이 바로 남내곽이다.
요시노가리 환호취락은 야요이 시대 큐슈 북부에 논농사가 시작되고 대륙의 선진문화가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는 남쪽 구릉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생활용품과 장신구, 무기 등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문화의 수준을 높여 갔다. 야요이 시대 초기인 이때에는 3㏊ 정도의 작은 취락이 만들어지는데, 이곳 요시노가리 남내곽이 이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 요시노가리 남릉구역의 취락 ⓒ 이상기
이러한 환호취락은 야요이 중기에 가면 20㏊ 규모로 커지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40㏊ 이상까지 확대된다. 이들 야요이인들은 취락 주변에 V자형의 해자를 만들어 마을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북내곽을 만들어 통치기반을 확고히 했다. 이때부터 땅 위로 건물이 나오고 대형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왜국은 고분(古墳)시대를 거쳐 4세기말 야마토(大和) 시대를 연다. 이때부터 일본에는 고대국가의 틀이 만들어진다.
▲ 요시노가리 유적 발굴 단면도 ⓒ 이상기
1. 인력 또는 중기로 표토를 제거한다.
2. 유물이 묻혀 있는 경우 유물 검출 면까지 파낸다. 수혈식 주거의 경우도 유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면까지 파내려 간다.
3. 유물 검출 면을 꼼꼼하게 파내면서 흙의 색깔이 다른 부분을 찾아낸다. 옛날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부분은 색깔이 틀리기 때문에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4. 수혈주거의 유구를 이식 삽과 대나무 주걱 등으로 신중하게 파낸다.
5. 유구의 모습과 유물의 출토 현황을 도면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정리한다.
6. 출토된 유물을 물로 씻고 깨진 부분은 접합한다. 깨져 없어진 부분은 석고 등으로 보충하거나 보완한다. 그리고 나서 유물 실측도를 작성한다.
7. 조사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만들어 학계에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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