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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조심해! 나 이제 카드 잘랐어

쌀쌀맞은 신용카드 상담원 vs. 친절한 카드 외판원

등록|2008.03.05 14:54 수정|2008.03.06 08:46

▲ 외국 신용카드들. ⓒ 이승배


'02-6938-○○○○'

또, 그 여자다. 휴대전화 날짜를 확인했다. 3월 2일. 어쩐지, 벌써 그 날이 다가왔다. 전화가 올 성 싶었는데, 역시나다. 이럴 때는 아주 칼 같다.

"○○씨죠? 은행에 잔고가 부족하시던데, 연체하셨네요."

왠지 비꼬는 듯한 말투, 건들거리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상상만 해도 화가 난다. 곁에 있다면 정말 콱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친숙한(?) 멘트가 이어졌다.

"오늘까지 입금 안 하시면, 신용 등급이 떨어져 은행 거래를 완전히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카드도 정보 교류가 되기 때문에 사용에 불편이 생기게 됩니다."

나름 공손한데, 조금만 곱씹어보면 숫제 반 협박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컴퓨터에 ○○○회사에 다니는 걸로 돼 있는데, 맞나요?"

늦게 돈 넣었지만, 직원 태도가 너무한 거 아냐?

그 순간, 가슴에 커다란 멍이 하나 생긴다. 같은 질문만 벌써 다섯 번째다. 거의 매달 한 번씩 묻는다. 지난해 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어쩌면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나 지금 화 많이 났으니 잔말 말고, 돈이나 입금해라"라고.

늦게 돈을 넣은 것은 잘못이지만, 직원 태도가 참 건방지다. 화가 난다. 그래서 보름 전, 그 신용카드를 잘라버렸다. 소심하지만, 나름의 복수였다.

사실 만들 생각도 없었던 카드다. 2년 전, 한창 바빠 죽겠는데 카드 외판원이 회사로 찾아와 통사정을 했다. 한 장만 만들어달라고, 5만원만 쓰면 된다고 말이다.

옆에 딱 붙어, 한번만 도와주면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다는 눈빛을 마구 쏘아댔다. 불혹을 넘긴 듯한 아줌마, 친엄마 같아 눈길을 외면할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적었다.

카드를 받고난 뒤 몇 주 후, 외판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든 카드로 5만원만 결제해주세요. 만들기만 하고 안 쓰면, 실적에 도움이 안 돼요."

어느 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는데, 그 아줌마 얼굴이 떠올라 새로 받은 카드로 결제를 했다. 어찌 알았는지, "고맙다"는 전화가 이내 걸려왔다. 어차피 쓸 카드, 그냥 바꿔 쓴 것뿐인데 마냥 들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괜스레 나도 흐뭇해졌다.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카드 관련 기사가 있기에 유심히 살펴봤다. 한 카드 회사가 실적에 따라 항공사 마일리지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서비스를 했는데, 카드 회사가 사전 통보 없이 적립 포인트 양을 낮춰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는 내용이었다. 문득, 건방진 그 상담원이 떠올랐다. 소송 건 그 사람,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법정까지 갔으려나 싶었다. 난 고작 카드만 잘랐을 뿐인데.

툭 까고 생각해보자. 사람 맘 상하는 이유는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조금만 소비자를 생각했으면, 대부분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막장까지 가진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카드가 잘려 버려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안타깝게도, 세상엔 참 불친절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조심해라! 단돈 몇 만원 때문에 받은 마음의 상처, 조만간 고스란히 돌려줄 테니. 이젠 카드만 조용히 자르진 않을 테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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