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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을지로 순환선'에 오르다

[새만화] 최호철 이야기그림 <을지로 순환선>

등록|2008.03.07 16:26 수정|2008.03.07 17:13

▲ 최호철의 첫 작품집 <을지로 순환선> ⓒ 거북이북스

황지우의 시집 <나는 너다> 속 제목은 모조리 숫자다. 이 숫자는 버스 번호이고, 그 번호에는 저마다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으니, 어찌 한 편의 시가 되지 못할까.

만화가 최호철(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이 최근 첫 작품집을 냈다. 10여 년간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작품이 살뜰히 모인 결과다. 책의 이름은 <을지로 순환선>(거북이북스). 만화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데 뭐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하여 책에는 ‘이야기그림’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과연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타고난 그림쟁이’의 오랜 발품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집. 스케치북 하나 둘러메고 온 동네를 뒤진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각 장면들이 살갑다. 봉천동 달동네와 신도림역이 내려다 보이는 전철 안 인물들의 이야기인 ‘을지로 순환선’, 홍대와 당인리 발전소, 난지도, 63빌딩의 풍경을 광각으로 유려하게 담은 ‘와우산’,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기지 정문 마을’과 이와는 분명 대조되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기지 뒤쪽 마을’까지.
‘우리 사는 풍경’, ‘일하는 사람들’, ‘큰 세상 작은 목소리’, ‘우리 집 이야기’, ‘스케치로 담은 기억’ 등으로 테마가 나뉜 책은 다녀본 곳, 봐서 아는 곳 그래서 친숙한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작가가 “이 풍속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내가 다녀본 곳들이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내 생활 반경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고 부끄러워할 정도.

명상 혹은 잡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보는 순간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도 좋다. 다른 곳 아닌 꼭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우리 이웃의 표정과 몸짓도 그대로 박혀 있다.

▲ ‘을지로 순환선’(2000년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최호철


작가는 승객을 한가득 실은 버스기사, 찜통같은 더위를 토해내고 싶은 지하철 가판대, 그저 한숨만 나오는 수해 현장까지 우리 이웃이 지닌 삶의 고단함과 정겨움을 모두 잡아내고 있다. 이 속에서 노인과 이주노동자, 여성, 어린이 등 더 힘없고 소외된 존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특히 빛난다. 물론 이는 120여권에 이르는 스케치북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고, 단순 명료하지만 곰삭힌 듯한 메모를 조용히 읽어 보는 재미가 크다. 빼곡히 들어찬, 답답하게까지 보이는 일상이 손금처럼 자세한 반면 작가가 남긴 몇 줄 안 되는 손 글씨 메모는 상대적으로 담백하고 깊다.

이야기가 꽉꽉 밴 그림은 그 자체로도 분명 매력적이다. 만화와 회화의 경계에서 ‘현대 풍속화’라는 독특한 그림 장르를 구현해낸 작가에 대해 동료인 박인하 교수(청강문화산업대)가 ‘한 화면에 압축된 광각의 서사는 최호철 작품의 핵심’이라 했던 것처럼 한눈에 잡아끄는 그림의 구도와, 세세한 이야기가 곳곳에 들었다. 차곡차곡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인물과 배경 뒤로 숨어 있다.

▲ ‘와우산’(1995년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최호철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인혜 학예사는 ‘회화와 만화의 장르 간 경계 위에서 빛을 발하는 그림’이라고, 화가이자 작가인 강홍구는 ‘19세기 풍자화와 겹치고 일부는 현대 만화’라고 평했다.

어린 시절부터 관찰하면서 그리는 것에 흥미를 가졌던 최호철 작가는 다큐멘터리 그림, 민중미술 등에 관심이 많았다.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에 ‘두벌갈이전’을 비롯해 ‘민중미술 15년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 한국작가전’ 등의 전시를 다수 열었다.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담은 <태일이>와 <십시일반-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코리아 판타지> 등의 단행본이 알려져 있다.

▲ ‘이번 정류장’(2000년 작품, 개인 소장) ⓒ 최호철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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