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여수 진남관 앞에서 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이사장으로 부터 좌수영성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시민들 ⓒ 오문수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의 진남관(鎭南舘)은 임진왜란 직후(1598년), 이충무공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진해루 터에 세웠다. 두 번의 중창과 화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숙종 때인 1718년이다.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내에는 600여칸으로 구성된 78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진남관이다. 진남관은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 240평의 대형 건물로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과 함께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다.
건축은 삶 자체이며, 그것이 지닌 형태와 구조에는 조상들의 상징성이 담겨있다. 따라서 한국 전통 건축의 조형과 각종 표현은 한낱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 수준과 예술성을 반영한다.
▲ 기둥과 처마를 받쳐주는 '출목익공'과 비스듬히 휘어진 활주가 보인다 ⓒ 오문수
공포는 기둥과 보가 만나는 지점에 일종의 목침을 받쳐 지붕이 누르는 육중한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고 밖으로 길게 내민 추녀와 서까래를 받쳐주는 중요한 구조물이다.
▲ 진남관의 건축학적 의미에 대한 해설을 맡은 전남대학교 건축학과 박찬 교수(왼쪽)와 진남관 문화해설을 맡은 전장길씨(오른쪽) ⓒ 오문수
특히 “측면에서 바라보는 평면 장방형의 당당한 열주(기둥)의 정렬감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버금가는 자존감을 느끼는 해양문명의 산물”로 여겨진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대 목조건물인 진남관도 현재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측 처마를 받치는 활주(처마를 받쳐주는 기둥)가 상당히 기울어져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박교수는 현재 건물이 비스듬히 돌아가고 있다는 징후이며 정밀진단을 거쳐 보완작업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 열주(기등이 늘어선 모습)의 웅장한 모습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박교수의 설명이다 ⓒ 오문수
▲ 왜군을 속이기 위해 돌을 깎아 사람의 모습으로 세운 석인상 ⓒ 오문수
“진남관(국보 제 304호)에서 공부할 당시 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마룻바닥은 지금처럼 반듯이 다듬어 지지 않은 원목으로 돼있어 구멍으로 연필이 빠지면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찾곤 했다”
유럽의 성이나 일본에 흔히 있는 해자(성벽 외부에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둘러 판 인공 못)가 우리나라에도 있을까? 좌수영성 서문 쪽에는 인공이 아닌 자연의 계곡을 이용한 해자가 있다.
▲ 자연 계곡을 이용해 만든 '해자'로 가정 집 담과 담 사이에 흔적이 남아 있다. 원형이 거의 훼손됐지만 자세히 보면 하수관같은 모습이 보여 지금도 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문수
오늘따라 한 달 전 방문했던 이순신 장군의 숙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아름다운 오사카성의 해자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속상하다.
일본인들이 허물어 버렸다는 성터는 현재 거의 그대로 남아 여수시민들의 길이 됐다. 그 중 한 가정집에는 완벽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철희 여수지역사회연구소소장은 “여수지역의 랜드마크 개발을 위해서는 박제된 좌수영성이 아닌 살아있는 성이 복원되어야 한다. 현재 시민의 공감대는 이루어졌지만 주택 철거에 따른 보상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용역결과가 나오면 논의를 거쳐 시민이 합의한 좌수영성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진주성은 지역 유지들의 설득과 훌륭한 시민들의 결단으로 복원됐다.
▲ 성벽이 헐리고 지금은 길이 돼버린 성터를 따라 답사를 하는 일행들 ⓒ 오문수
고소대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곽 내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기 쉬운 높은 지점에 쌓은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로 보인다. '호좌수영지' 영성도에는 안산 기슭에 3칸의 건물로 표현되어 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것은 1947년에 세워진 것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지 6년 후인 1603년 부하들이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여 세웠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 이순신 장군 사후 6년 뒤에 부하들이 장군의 공적을 기려 세운 '타루비' ⓒ 오문수
바다를 관망할 수 있는 고소대를 구경하고 언덕을 내려가자 오래된 시멘트 건물이 일행을 맞았다. 겉은 그래도 괜찮은 데 깨어진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 본 내부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모습이다.
▲ 한국 최초의 세계복싱챔피언인 김기수와 유제두 선수가 훈련했던 복싱체육관 ⓒ 오문수
성터를 따라가는 길에 청년회관이 있다. 식민지 시대 서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은 ‘여수향우회’를 만들어 결속을 다지며 3·1운동 및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하거나 경찰에 쫒기게 되었다.
1921년 경찰의 눈을 피해 여수 지역에 숨어 있던 사람들 가운데 김백평 등 청년들이 모여 서로 돕자는 ‘맞돕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덕지(德地)라는 저수지를 사들여 손수 지게를 지고 메워 건물을 세웠다.
▲ 여수 독립운동의 산실인 청년회관 ⓒ 오문수
우리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혼이 서려있는 아까운 역사 유적들이 사람들의 무관심과 역사의식 부재로 사라지거나 사장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아까운 역사를 되살려 후손에게 물려주자.
덧붙이는 글
u포터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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