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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의 레슬링장이 된 내 이불

주말부부 남편의 애환...봄볕이 좋아 이불을 빨았건만

등록|2008.03.11 08:43 수정|2008.03.11 15:42

▲ 내 방의 책상은 카오스 그 자체다. ⓒ 우광환


토요일 날(8일) 저녁에 큰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 대학 선배 결혼식이 있어 참석차 올라왔다가 전주 집엘 못 내려가니 아빠한테 와서 자고 가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휴일이건만 거래처 행사 때문에 집엘 내려가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이럴 땐 집을 떠나 혼자 사는 아빠도 아이들한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 때문에 집을 떠나 생홀아비로 사는 성남의 내 집은 이렇듯 간혹 서울엘 올라오는 우리 가족의 여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전엔 대학입시를 앞두고도 공부하는 깜냥이 신통치 않다 하여 엄마한테 쫓겨난 둘째 딸 아이가 나한테 올라와서 한동안 신나게(?) 놀다가 돌아간바 있다.

화창한 봄볕에 겨우내 찌든 이불빨래 생각이 나고

다음 날인 일요일 날 오전, 집에 내려가는 큰 애를 터미널에서 배웅하고 들어오는데 화창한 봄볕이 따사로웠다. 어차피 집에도 못 내려간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화창한 휴일 날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뜻 깊은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엊저녁 딸아이가 덮고 자던 이불이 좀 지저분했다는 기억이 떠 올랐다.

지난겨울 내내 청소는 물론이고 별로 샤워도 자주 하지 않는 내 몸과 집안의 먼지로 찌든 이불을 이런 날 산뜻하게 빤다면 더 이상 뜻 깊은 일이 없지 않을까. 서둘러 집에 돌아온 나는 급기야 행동에 돌입했다. 내친김에 침대 커버와 베갯잇까지 모두 뜯어냈다.

어차피 조그만 내 세탁기에 들어가지 않는 이불 빠는 방법은 역시 재래식 방법이 최고다. 큰 플라스틱 다라에 넣고 밟는 것. 이 때 확실히 해 두어야 하는 건 반 바지만 빼고 모두 벗는 거다. 밟다가 물기를 짜내려면 세탁기에 넣고 돌려야 하니 옷을 입고 있으면 모두 젖기 때문이다. 내가 이 방법을 터득하는 데는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결국 이불과 요, 그리고 침대커버와 베갯잇까지 장장 두 시간에 걸쳐 모두 빨아댔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어도 향기로운 냄새와 깔끔한 이불의 자태에 마음까지 후련했다. 나는 마음도 가뿐이 그것들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라. 옥상의 빨랫줄엔 누구네 것인지 이미 빨래들이 주렁주렁 달려 도대체 빈자리가 없었다.

‘어, 이거 야단났네.’

진작 확인하지 않은 자책감이 들었지만 때 늦은 후회였다. 게다가 옥상이 아니라면 이 넓적한 물건들을 어디 널 때가 없다. 내가 살고있는 집은 빨래 건조실이 따로 없는 개인 주택인 것이다. 어쨌든 이걸 저녁까지 건조시키지 못한다면 난 겨울 코트를 덮고 자야 할 판이었다.

이불을 든 채 옥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옆 집 옥상에 큰개 두 마리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털이 소담스러운 진돗개였다. 그 집 주인이 내게 그 개의 가문에 대한 자랑을 쏟아내던 어느 날의 술자리가 생각났다. 씨익 웃어주니 그 놈들도 역시 꼬리를 흔들며 반가운 기색을 했다. 그나저나 내 문제는 지금 그 개들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들고 있던 것들을 옥상 난간에 펴서 널었다. 어쨌거나 건조만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옥상을 내려와 발걸음도 가볍게 집 근처 남한산성을 올라갔다.

방 구석의 책 무더기지저분한 생홀아비 방에 근사한 책장은 차라리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다. ⓒ 우광환


내 이불이 뽀송뽀송하게 말랐겠지

날씨가 너무 포근했다. 유럽의 봄이 30년 사이 한 달이나 앞 당겨졌다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걱정어린 기사를 본 적이 있지만, 지금 당장 내 걱정은 이불이 빨리 건조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따뜻하고 청명한 하늘은 내게 있어 아주 중요했다. 특히 오늘 만큼은.

마침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약수터 옆의 포장마차로 들어가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며 담소하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내려왔다. 엷은 술기운으로 집에 들어온 나는 침대가 썰렁한 걸 보면서 문득 이불을 걷어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옥상엘 올라갔다. 맑고 푸르렀던 따사로운 봄볕 아래 내 이불들이 뽀송뽀송하게 말랐겠지, 라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런데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갈 무렵 옥상에서 개들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집 옥상에 진돗개 두 마리가 있긴 하지만, 우리집 건물에 사는 개들은 옥상엘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옥상에서 웬 개 소리? 왠지 불안했다.

이윽고 옥상의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려니 그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옆 집의 진돗개들이었다. 난간에 걸쳐 놨던 내 이불을 옥상 바닥으로 끌고 가 그 위에서 두 마리가 한데 엉겨 레슬링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나마 침대커버는 저 구석에 뭉개져 온통 흙투성이였는데, 가만 보니 이놈들이 물어뜯었는지 여기 저기 찢겨져 있었다. 달려가 호통을 치니 진돗개들이 겨우 30cm 될까 말까 옆집과 거의 맞 닿아있는 옥상을 건너 뛰어 도망간다.

‘아흐… 왜 저 놈들이 이쪽으로 건너올 걸 생각 못했지…. ’

결국 겨울 코트를 덮고 자다

온통 흙투성이에 개털 수북이 달라붙은 넝마가 된 이불을 들고 내려오니 다리에 힘이 쭉 풀려버렸다. 하, 기가 막힌 나는 전주 아내한테 전화해서 그 진돗개 놈들의 소행을 모두 일러 바쳤다. 그랬더니 집사람 하는 말.

“그러게 무슨 청승을 그렇게 떨어요. 가져와서 다른 걸로 바꿔 가랬더니. 그거 그냥 버려요. 내일 이불 가지고 올라갈테니까.”

결국 나는 겨울 코트를 꺼내서 덮고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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