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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팩션 31] 조선국권회복단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2008.03.14 19:21 수정|2008.03.14 19:21
망향가

1914년 일제는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개편했다. 그들은 500년 도성인 서울을 격하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한성을 경성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며 서울의 면적을 8분의 1로 축소한 후, 경기도의 한 시로 편입시켰다. 판서 급이었던 한성 판윤도 경기도 도장관의 지휘를 받는 부윤으로 낮추었다.

일제는 1908년 숭례문의 양쪽 성곽을 헐어내고 도로를 확장했다. 또한 그들은 서울에 남북축의 도로를 낸다. 남촌과 북촌을 잇는 도로 공사를 먼저 벌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 지역이 된 진고개는 비만 오면 남산에서 토사가 내려와 진흙탕 길이 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통행이 아주 불편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소통로를 내주기 위해 서둘러 공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유린하는 작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환구단 옆의 남별궁 터에 철도호텔(조선호텔 전신)을 세웠다. 그 결과 환구단과 황궁우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광화문과 경복궁의 일부 건물을 헐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 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시야에서 차단하는 자리에 들어서자 조선의 상징물인 경복궁 근정전은 남산에 올라가서야 겨우 그 지붕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남촌에 살았다. 그래서 북촌의 조선인들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두 민족이 갈렸었는데, 일본인들이 차츰 북촌까지 먹어 들어와 집을 짓고 상권을 쥐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변두리로 밀려났다. 현저동, 창신동, 이촌동, 신당동 등에 새로운 조선 빈민촌이 조성되었다. 종로는 철저히 방치되었다. 조선 빈민이 사는 청계천은 10년 넘게 준설 작업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2, 3년에 한 번씩 준설 작업을 해 오던 곳이었다. 청계천 일대는 도로 포장도 안 되어 갈수록 냇물이 오염되어 갔다. 일본인 거리인 충무로와 남대문로는 산뜻하고 화려한 문명의 장소가 된 반면, 조선인 거리인 종로와 청계천은 추잡한 비문명의 지대로 변해갔다.

식민지 서울은 이렇게 더럽혀지고 있었다. 조선 문화의 전통과 개성은 거세되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오기와 자존심은 훼손되고 있었다. 지방의 피폐상은 한층 더 심해지고 있었다. 조선인의 인정과 인심은 마르고 있었고 조선인의 여유와 후덕은 전설처럼 잊혀져가고 있었다.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은 이념과 전략의 정비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의병 전투와 계몽운동으로 전개되던 구국 운동 방식은 전략상 독립전쟁론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사가 많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서울의 우국지사는 대부분 망명을 선택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이미 독립 운동의 주류는 해외로 옮겨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국권 회복을 결의하는 지방 인사들의 은밀한 결사가 남도 땅에서 태동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무단 공포정치의 서슬에 위축되어 국내 지식인들이 숨을 고르거나 개화 계몽으로 비켜가고 있을 때, 분연히 국권 회복을 제1서약으로 내세운 조직이 결사된 것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3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조직되었다. 그들은 목숨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하자고 다짐했다. 그들은 국외의 민족 지도자들과도 연계하여 대규모 항일 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만주와 연해 지방에 임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정월 15일에 단군의 위폐 앞에 앉아 목적 수행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2년 후 '대한광복회'가 만들어진다. 대한광복회 단원들은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등을 비롯한 곡물상, 잡화상 등을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그들은 서울, 광주, 예산, 인천, 해주, 삼척, 용천 등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비밀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 안동현과 장춘에까지 연계 조직을 만들어 독립군 양성과 지원,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활동을 벌였다.

서상일은 달성 서씨로 대구 출신이었다. 그는 1909년 보성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13년 1월 15일에 윤상태, 이시영, 정운일, 홍주일, 정순영, 서병룡, 박영모, 윤창기 등과 함께 한 암자에 모여 국권회복단을 만들었다. 그는 자금 조달과 국외 통신 업무를 수행했다. 서상일의 동생 서상한도 훗날 조선 왕세자 이근이 일본 황족녀와 강제 정략 결혼하는 것에 민족적 수치를 느껴 식장에 폭탄을 던졌다가 7년 형을 선고 받는다.

이시영은 대구에서 포목상을 경영했다. 그는 자금을 만들어 만주 독립군에 갖다 주었다. 정운일은 전당포를 경영하며 번 돈을 독립 운동에 사용했다. 그는 나중에 만주로 가 대한광복회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와 대구 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홍주일은 상회의 점원으로 위장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정순영은 재산가였는데 독립운동에 스스로 투신했다. 그는 만주로 망명해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

이 밖에도 종이 제조업을 하던 박영모, 은행원을 하던 서병룡, 일신학교 교원 출신의 이영국,  휘문중학 교사였던 남형우, 대구 은행원이었던 신상태, 국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 출신의 안확 등이 생업을 포기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18년 총독부는 대한광복회 조직을 적발한다. 결과 대한광복회의 주요 인물들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회원들은 훗날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3·1운동 때 각 고을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게 된다.

어찌 보면 1915년을 즈음한 시기는 한국 독립운동의 암흑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직업과 출신과 성향이 다양한 지방의 중산층들이 구국이라는 소명에 기꺼이 삶을 던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규식은 국내 동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국내 소식을 뒤늦게 들은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체포자 명단에 김좌진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틈나는 대로 집필했던 원고를 손질했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성찰하고 정리할 필요를 느껴 상해 도착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었다. 그는 신채호에게 조언을 구해 책의 제목을 <한국혼>으로 정했다.

그의 저서가 탈고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상해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을 제의해 왔다.

“세상이 변해 내일이라도 황화지감을 느낄 것이니 완곡히 사양합니다.”

그러자 중국혁명단이 주축으로 있는 신아동제회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신규식은 그것도 사양했다. 조선 민족을 위한 글이니 중국인들에게는 도움될 게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인 신문 민립보에서는 한국혼의 서평을 실었다. 서평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신규식이 보기에도 과찬이 많았다.

한 시대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자신의 민족 영웅 또는 그들 모두가 숭상하는 국혼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맞서 싸운다. 중국의 손중산이 그렇고 한국의 신규식이 또한 그렇다. 신규식은 한문학에 정통한 시인이자 의지가 굳은 혁명가이며 존경받는 사상가이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업은 그에게 있어 임무나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과도 같은 소명이다.

“서평이 아니라 서찬이로군.”
신규식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박달학원에서 <한국혼> 특강을 요청했다. 그는 응하기로 했다.

"내가 <한국혼>을 저술한 것은 내 마음 속에 쌓여 있는 깊은 슬픔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낀 대로 서술한 것이니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동포들이여, 모두 가슴 속 깊이 느낀 슬픔을 영원히 마음속에 기억해 망국의 치욕에서 벗어납시다.

프랑스는 자유의 종을 울리자 두 차례의 거국적인 혈전을 마다하지 않았고 아메리카가 독립의 깃발을 올리며 8년 동안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 사이에 이견이 생겨 전쟁을 그르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익을 탐내고 소견이 좁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유신사를 보면 처음 유신당이 결성될 때 바쿠한은 그들과 맞섰고 정검회나 중립사는 서로 물고 뜯었습니다. 그러나 국회가 성립되자 거연히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최근 중국 혁명사를 보더라도 정부에 대해 종사당이 성토하고 보황당이 반박하는 등 형형색색이 뭉치고 흩어져 어지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에 따라 결국 공리에 의해 평정되었습니다. 무릇 우리들의 구국의 종지는 같다 하더라도 그 주장이 끝내 사견을 버리지 못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면 말썽이 생겨 일을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불길이 센 숯불도 흩어지면 아무리 힘없는 아이들이라도 발로 차 꺼버릴 수 있습니다. 실 한 오라기로 어찌 동아줄을 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미약하고 취약하기만 한데 사치스럽게 큰 희망만 품는 것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아이들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습니다. 아이의 부모들이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들은 바퀴에 매달리기도 하고 철로에 눕기도 했습니다. 코사크 병사들은 그들에게 채찍질하고 발길질해 철로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기차가 움직이자 그들은 흐느꼈습니다. 여정에 아이들에게 배급된 식량이라고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검은 빵이 전부였습니다. 병든 아이들은 가차 없이 벌판에 버려졌습니다. 어떤 아이는 빵을 쥐고 먹다가 기운이 빠져 번데기처럼 죽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망국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민족정신을 가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자는 뜻에 동참한다면 고향, 종파, 남녀, 노소, 원근, 유 무명, 개인과 단체, 온건과 급진, 농부와 장인, 상인과 선비 등을 가리지 않고 다 우리의 동지가 됩니다. 동지 중에서 공복이 될 만한 인물을 선출해 돕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를 의심하거나 투기하고 반목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한 것이니 지도자도 법의 테두리를 지켜야 합니다. 화려한 금수강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고개를 돌려 보십시오. 고국의 풍광은 이제 옛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재앙을 당했으니 우리 영웅들은 괴롭더라도 때를 기다립시다. 어찌 마음에 품은 뜻이 멀다고 슬퍼하겠습니까? 다음의 봄에 광복의 소식이 있을 것이니 원하건대 동지들이여 조심하며 자기를 지킵시다. 광복의 그 날이 오면 잊지 맙시다. 제 올려 그대들 아버지에게 소식 알리는 것을."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등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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