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공산주의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
97세 최고령 평화통일 운동가 홍순명옹을 추모하며
12일 97세 일기로 별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 세기를 살아오신 최고령 평화통일운동가 (사)평화연대 명예이사장이신 홍순명 옹이 12일 97세의 일기로 별세하시어 3월15일 장례를 치뤘다.
필자는 일주일 전에 요양원에 계신 홍옹을 찾았다. 근간에 쇠약하여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천시 일동에 있는 안식의 집을 찾은 것.
지난 구정을 기하여 세배를 다녀올 때만해도 건강하셨는데 근간에 병원에 입원을 하시더니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셨다고 한다. 함께 찾아간 통일운동가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던 이사장 모습이 아른거린다. 우리들이 백수는 하시라고 말씀을 올리면서 통일을 꼭 보시고 가셔야 한다고 간절히 건의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무래도 극 노인의 건강이기에 내친김에 유언 같은 질문을 드렸다. "혹 남기고 싶은 말씀이나 미진한 것들이 있으시냐"고 했더니 없다고 하시면서도 "오직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기를 기원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머지않아 이뤄질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의 말씀을 드렸는데 빙그레 웃으시면서 "되면 좋지"라 하셨다.
오직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 열망하시던 이사장님은 95세까지 정렬적인 활동을 하시었다. 85세 때부터 늙은이가 주책이라 할까 걱정된다면서도 마치 어린이처럼 기뻐하시면서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 아카데미과정을 결석도 없이 이수하시었다. 그리고 민화위원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평화통일의 꿈을 넓히시곤 하시었다.
90에 이르러 보다 활동적인 평화통일 운동을 위해 발족한 (사)평화연대 이사장을 5년여간 맡으시면서 평화통일 아카데미에 재수강하시고 토론회와 거리시위에도 앞장서서 참가하시면서 통일운동은 말로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하시는 등 행동에 모범을 보여주시었다.
부역자 가족이란 너울에 모두 이민가고 '독거노인'으로 살아
홍순명 옹은 고향을 북에 두고 월남한 이산가족이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직을 하시다가 분단조국의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한때 여운영 선생의 조직에도 참여하여 한때는 좌익사상으로 2회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특히 젊은날에는 분단으로 인해 좌익부역협의자로 몰려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홍옹은 1남2녀를 두었으나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너울에 그만 모두 이민을 떠나버리고 그간 함께 고생만을 하던 부인마저 20여 년 전에 사별하시고 독고노인의 처지에서 외롭게 지내시었다. 그러던 중 6·15선언 이후 활발한 평화통일운동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하시었다.
문정동 사가를 평화연대 사무실로 내놓으시면서 임원과 실무자들까지 가깝게 지내시면서 마치 사는 보람을 찾았다고 하셨다. 언제고 부모님이 잠들고 계신 북쪽 땅을 찾을 날을 기다렸으나 그 꿈이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하자 실망과 한숨을 내쉬었다.
요양원으로 이거하시면서 외로움이 더해가고 우리들이 가끔 찾을 때에 한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었다.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이었다. 90이 넘어서도 지하철을 이용하여 약속을 하면 어김없이 철저하게 항상 먼저 와 계시어 나는 미안하기만 했었다. 철저한 약속의 이행은 바로 신뢰였다.
"난 공산주의를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이오"
홍 이사장님이 돌아가시기 1주일 전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기에 수척하심에도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사시겠다고 다짐하신 것은 아마도 못 보신 통일에 대한 큰 미련이 남으셨기 때문이시리라. 요양원이 서울에서 너무도 멀어 자주 찾아가보지 못해서 홍옹을 존경하던 통일꾼들이 아쉬움이었다.
이제는 먼 거리에도 계시지 않으니 우리들의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고 아쉬움과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남양주시장례식장에 잠시 안거하신 홍 이사장님을 뵙기 위해 우리는 늦은 밤이었지만 차를 몰았다.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함을 자괴하고 영정만이 자리 잡은 제단에 향을 피우고 공손히 재배하면서 기도했다.
유족들이 외국에 있어 긴급히 마련한 빈소가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장희 상임공동대표의 평화연대 조화와 백낙청 고문과 김춘진 의원, 그리고 통일협회의 조화가 홍 이사장님의 영정을 에워싸 위로를 드렸다. 이사장님께서 살아오시면서 뿌리신 통일의 씨앗에 비해 상당히 외소하고 부족한 빈소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동안 신앙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던 홍옹께서 세례를 받았다니 분명 천상에 오르실 것이다. 언제나 어린에 같은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시고 분단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셨기에 당신은 분명 분단역사에 당당히 한 페이지를 차지하실 것이다. 분명히 조국은 당신의 진실과 정의와 헌신을 평가 할 것이다.
"어머니 무덤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다"
필자는 2003년 9월10월 <민족화해>지 미니자서전에 실린 옹의 글에 절규처럼 부르짖은 맨 앞의 글귀를 떠올렸다.
"난 공산주의를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이오. (중략) 어머니…어머니…. 올해 나이로 아흔세 살인 나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소식을 듣는 일이다. 나는 외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더구나 어머니의 묘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디인가에 있을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붕서동 225번지이다. 나는 이곳에서 1911년 2월9일 태어났다."
벌써 5년 전의 홍옹의 절규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수십만 이산가족의 한이 서린 절규이다. 홍옹은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수하신 생애지만 여전히 고향도 부모님 산소도 찾지 못하고 오직 영혼으로만 만날 뿐이리라.
존경하는 홍순명 이사장님! 부디 천상에 드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당신과 8천만의 동포들이 소원인 평화통일을 위해 저희들은 매진하렵니다.
▲ 홍순명옹 빈소에서 ⓒ 윤영전
필자는 일주일 전에 요양원에 계신 홍옹을 찾았다. 근간에 쇠약하여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천시 일동에 있는 안식의 집을 찾은 것.
지난 구정을 기하여 세배를 다녀올 때만해도 건강하셨는데 근간에 병원에 입원을 하시더니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셨다고 한다. 함께 찾아간 통일운동가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던 이사장 모습이 아른거린다. 우리들이 백수는 하시라고 말씀을 올리면서 통일을 꼭 보시고 가셔야 한다고 간절히 건의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무래도 극 노인의 건강이기에 내친김에 유언 같은 질문을 드렸다. "혹 남기고 싶은 말씀이나 미진한 것들이 있으시냐"고 했더니 없다고 하시면서도 "오직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이뤄지기를 기원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머지않아 이뤄질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의 말씀을 드렸는데 빙그레 웃으시면서 "되면 좋지"라 하셨다.
오직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 열망하시던 이사장님은 95세까지 정렬적인 활동을 하시었다. 85세 때부터 늙은이가 주책이라 할까 걱정된다면서도 마치 어린이처럼 기뻐하시면서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 아카데미과정을 결석도 없이 이수하시었다. 그리고 민화위원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평화통일의 꿈을 넓히시곤 하시었다.
90에 이르러 보다 활동적인 평화통일 운동을 위해 발족한 (사)평화연대 이사장을 5년여간 맡으시면서 평화통일 아카데미에 재수강하시고 토론회와 거리시위에도 앞장서서 참가하시면서 통일운동은 말로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하시는 등 행동에 모범을 보여주시었다.
부역자 가족이란 너울에 모두 이민가고 '독거노인'으로 살아
홍순명 옹은 고향을 북에 두고 월남한 이산가족이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직을 하시다가 분단조국의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한때 여운영 선생의 조직에도 참여하여 한때는 좌익사상으로 2회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특히 젊은날에는 분단으로 인해 좌익부역협의자로 몰려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홍옹은 1남2녀를 두었으나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너울에 그만 모두 이민을 떠나버리고 그간 함께 고생만을 하던 부인마저 20여 년 전에 사별하시고 독고노인의 처지에서 외롭게 지내시었다. 그러던 중 6·15선언 이후 활발한 평화통일운동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하시었다.
문정동 사가를 평화연대 사무실로 내놓으시면서 임원과 실무자들까지 가깝게 지내시면서 마치 사는 보람을 찾았다고 하셨다. 언제고 부모님이 잠들고 계신 북쪽 땅을 찾을 날을 기다렸으나 그 꿈이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하자 실망과 한숨을 내쉬었다.
요양원으로 이거하시면서 외로움이 더해가고 우리들이 가끔 찾을 때에 한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었다.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이었다. 90이 넘어서도 지하철을 이용하여 약속을 하면 어김없이 철저하게 항상 먼저 와 계시어 나는 미안하기만 했었다. 철저한 약속의 이행은 바로 신뢰였다.
"난 공산주의를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이오"
홍 이사장님이 돌아가시기 1주일 전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기에 수척하심에도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사시겠다고 다짐하신 것은 아마도 못 보신 통일에 대한 큰 미련이 남으셨기 때문이시리라. 요양원이 서울에서 너무도 멀어 자주 찾아가보지 못해서 홍옹을 존경하던 통일꾼들이 아쉬움이었다.
이제는 먼 거리에도 계시지 않으니 우리들의 마음은 한없이 허전하고 아쉬움과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남양주시장례식장에 잠시 안거하신 홍 이사장님을 뵙기 위해 우리는 늦은 밤이었지만 차를 몰았다.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함을 자괴하고 영정만이 자리 잡은 제단에 향을 피우고 공손히 재배하면서 기도했다.
유족들이 외국에 있어 긴급히 마련한 빈소가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장희 상임공동대표의 평화연대 조화와 백낙청 고문과 김춘진 의원, 그리고 통일협회의 조화가 홍 이사장님의 영정을 에워싸 위로를 드렸다. 이사장님께서 살아오시면서 뿌리신 통일의 씨앗에 비해 상당히 외소하고 부족한 빈소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동안 신앙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던 홍옹께서 세례를 받았다니 분명 천상에 오르실 것이다. 언제나 어린에 같은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시고 분단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셨기에 당신은 분명 분단역사에 당당히 한 페이지를 차지하실 것이다. 분명히 조국은 당신의 진실과 정의와 헌신을 평가 할 것이다.
"어머니 무덤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다"
필자는 2003년 9월10월 <민족화해>지 미니자서전에 실린 옹의 글에 절규처럼 부르짖은 맨 앞의 글귀를 떠올렸다.
"난 공산주의를 모르오. 독립과 통일만이 내 꿈이오. (중략) 어머니…어머니…. 올해 나이로 아흔세 살인 나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소식을 듣는 일이다. 나는 외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더구나 어머니의 묘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디인가에 있을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붕서동 225번지이다. 나는 이곳에서 1911년 2월9일 태어났다."
벌써 5년 전의 홍옹의 절규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수십만 이산가족의 한이 서린 절규이다. 홍옹은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수하신 생애지만 여전히 고향도 부모님 산소도 찾지 못하고 오직 영혼으로만 만날 뿐이리라.
존경하는 홍순명 이사장님! 부디 천상에 드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당신과 8천만의 동포들이 소원인 평화통일을 위해 저희들은 매진하렵니다.
덧붙이는 글
(사)평화통일시민연대 명예이사장인 고 홍순명옹은 우리나라 최고령 통일운동가다. 그간 온갖 역경을 다 격고 97세까지 살아오신 동안 오직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며 살아오신 생애다. 10여동안 이사징으로 모시고 일을 보면서 느낀점이 많았다. 그간의 홍옹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과연 언제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추모의 글을 올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